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68
268화
“만물을 평등하게 비추는 자애로운 빛이여-”
기도문이 나지막하게 이어졌다.
뒤에 선 채 보르를 눈에 담던 이안은, 문득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하나의 루트 빼고는 전부 죽음으로 끝나는 퀘스트 라인인 건가….’
이안의 뇌리로 이들과 관련된 분기점들이 스쳐 지나갔다.
북부에서 이들을 트라벨가로 향하게 두었다면, 타후므리트가 침공했을 때 다른 상인들과 함께 도시를 떠나게 되었을 터였다.
물건을 다 팔 수 있었을지는 둘째 치고, 다시는 북부에서 거래할 수 없게 되었으리라.
당연히 변방의 상행에서 북부로 방향을 튼다는 차선책도 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변방에서 실종된 다른 상인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겠지.
애초에 이안 일행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북부 설원 지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이안이 며칠만 더 늦었다면 보르는 결국 죽게 되었을 터였다.
지금까지 본바, 파엘과 보르는 단순한 고용인과 호위 이상의 유대가 있었다. 분노와 슬픔에 잠긴 파엘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동맹이 결성되기도 전에 죽었을지도.’
보르가 죽고 나서도 멈추지 않는다면, 다음 차례는 파엘이 되었을 테니까.
하긴. 기본적인 결말이 비극인 건,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세계부터가 착실하게 멸망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던가.
게다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큰 흐름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서브 퀘스트일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었다. 테사이아나 북부 야인. 하다못해 드네로브가 그랬듯이.
하지만 어쨌건, 그들을 살린 건 어떤 식으로든 이안에게는 도움이 되었었다. 큰 흐름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작은 부분에서는 이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리라.
‘그럼 이자들을 살리면, 대형 상단들이 그때처럼 폭리를 취하지는 못하게 되는 건가…?’
너무 소소한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퀘스트 보상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솨아아….
중얼대듯 이어지던 기도가 끝난 건 그때였다. 필립과 보르를 중심으로 방안을 밝게 비추던 빛이, 모래 알갱이 같은 빛무리로 화해 흩어졌다.
가슴 앞에 양손을 모으고 있던 엘리야가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는 가운데.
“…최선은 다해 봤습니다만.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일어선 필립이, 황금빛의 잔재가 아른거리는 눈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젠 정말 성기사 태가 좀 나는데.
“수고했다.”
침대맡으로 다가선 이안은 보르의 상태를 다시 살폈다. 필립의 엄살과 달리,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피부를 뒤덮고 있던 저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오염된 마력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냄새는 여전했지만.
‘확실히, 루 솔라의 신성력이 좋긴 하네.’
게임이었다면 고작해야 1레벨 정도의 정화 기도였을 텐데.
하지만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환부는 여전히 고름을 잔뜩 머금고 부어 있었으니까.
물론, 이안에게는 이걸 손대지 않고 처리할 방법이 있었다.
‘다 먹을 수 있겠냐? 저주의 잔재가 남아 있다면 그것까지.’
보르의 옆구리 위로 오른손을 뻗은 이안이 생각했다.
대답하듯, 손가락의 검은 반지가 스르륵 풀리며 흘러내렸다.
보르의 몸 위를 기어간 늪지의 원한이 환부 한복판을 콱 깨물었다.
‘어쩌다 보니 이런 식으로 더 많이 써먹게 됐단 말이지….’
이안은 고름을 빨아먹은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게임일 때는 없던 활용 방식이었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이럴 때마다 장비로서의 능력치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성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와….”
어느새 침대 옆으로 다가온 엘리야가 탄성을 흘렸다. 늪지의 원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였다.
흑마법과 관련만 있으면 종류 불문하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말했다.
“나중에 실컷 구경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지금은 가서 물과 붕대를 받아 와. 벌써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말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소 지은 엘리야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곧이어 멈칫한 그녀가 다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 님. 남은 부분은 제가 해도 될까요?”
“그렇게 해.”
나야 고맙지.
이안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의 의료 지식이란 걸 믿을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남은 일이라 봐야 상처 부위를 닦아내고 붕대를 감는 것뿐이었다.
빙긋 미소 지은 엘리야가 걸음을 옮겼다. 초조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던 파엘이, 물이 가득 담긴 대야와 천을 그녀에게 건넸다.
부리나케 준비해서 온 걸 보면, 어지간히 걱정된 모양이었다.
“엘리야를 보조해.”
필립에게 덧붙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엘리야에게 물통과 천을 받아 드는 사이, 이안은 파엘에게로 다가갔다.
마른 침을 삼킨 파엘이 물었다.
“어떻게 됐소…? 문틈으로 찬란한 빛이 번져 나오는 것은 보았소만.”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은, 잘 된 것 같소.”
“정말이오? 루 솔라여…. 고맙소, 이안 경. 정말 고맙소…!”
눈을 치켜뜬 파엘이 거의 껴안을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그를 밀쳐내듯 손사래 친 이안이 덧붙였다.
“아직 마음을 놓을 때는 아니오. 보르의 회복력에 달렸지. 일단 창문은 늘 열어 두고, 침대보와 이불도 전부 바꾸시오. 방안을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란 말이오. 붕대도 끓는 물로 삶아서 매일 교체해 주시고.”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다시 바짝 긴장한 얼굴이 된 파엘이 대답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주의를 준 건, 아직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아서였다.
뒤에서 엘리야의 목소리가 번진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다 됐어요.”
벌써…?
파엘의 시선이 홱 돌아가는 가운데, 슬쩍 미간을 좁힌 이안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미간은, 보르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바로 다시 평평해졌다.
“…훌륭하군.”
몸을 꼼꼼하게 닦은 건 물론이고 붕대도 흠잡을 곳이 없이 감아 둔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정말 비전과 공통 스킬만 잔뜩 익힌 건가…?’
하긴. 보조 역할만 하는 용병도 드물지만 존재하긴 했었다. 방랑 사제라던가 하는.
“고맙습니다. 필립 경. 그리고 영애.”
보르의 상태를 확인한 파엘이 둘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필립과 엘리야가 뿌듯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아직 하나가 남았소.”
내뱉으며 엘리야를 안아 침대 아래로 내려준 이안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벗었다.
끝에 단단한 가죽 주머니가 달린 수수해 보이는 목걸이였다. 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엇이오?”
“성물이오. 델라 루의 은총이 담긴.”
“……! 루 솔라여, 아니, 델라 루여…!”
눈을 치켜뜬 파엘이 더없이 양손을 앞으로 모아 쥐며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요란 떨긴. 내심 코웃음 친 이안이 보르에게 목걸이를 걸어줬다. 성물이 담긴 주머니를 그의 가슴 한복판에 놓으며, 이안이 말했다.
“떠나기 전에 반납하시오. 빌려주는 거니까.”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죽지 않았는데도 완료된 걸 보면, 이제 살아나는 것이 확실해진 모양이었다.
“고맙소, 이안 경. 몇 번이나 도움을 받는지 모르겠군. 일생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소.”
파엘이 무릎까지 굽히며 인사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감사는 술과 음식, 그리고 도움으로 받겠소.”
“물론이오. 이미 별채에 새로 술상을 준비해 두라 일러뒀소.”
“잘 됐군. 아직 한참 부족했는데.”
필립과 엘리야에게 턱짓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뒷정리는 귀하가 하시오. 난 다시 가서 마셔야겠으니까.”
***
식탁에는 치즈와 햄. 구운 닭. 그리고 포도주가 말 그대로 통째로 놓여 있었다.
받침대에 옆으로 놓인 상태였는데, 마개를 열면 통 안에 담긴 포도주가 흘러나오는 방식이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해진 듯 필립과 엘리야가 연신 음식을 집어 먹는 가운데, 이안은 느긋하게 포도주만 홀짝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리.”
기름으로 번들대는 손가락을 날름대며 필립이 입을 열었다.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보르를 구했다고 해도, 흑마법사는 여전히 건재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이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홀짝였다. 엘리야가 고개를 갸웃하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상단주에게 경고를 보내는 게 목적이었으니, 목적은 이룬 것 아닌가요? 용병으로 고용된 마법사일 것 같다면서요.”
“일반적인 용병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입니다. 일반적으로 주문 쟁이는….”
필립이 이안과 엘리를 번갈아 보며 잠시 주저했다. 주문 쟁이를 둘이나 앞에 두고 주문 쟁이의 험담을 하려니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대신 말했다.
“아주 자존심이 세지.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잊지 않고. 이상한 부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파엘에게 경고가 통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 다른 수를 쓸 거다. 지금쯤 이미 알았을지도 모르지. 저주가 깨졌으니까.”
“어쩌면 애초에, 동맹이 결성되지 못하게 하는 게 의뢰 내용이었을지도 모르고요.”
필립의 첨언에,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읊조렸다.
“그럼… 상단은 여전히 위험한 거네요.”
필립이 어깨를 으쓱였다.
“용병으로 활동하는 흑마법사라면 도시 안에서까지 분란을 일으키려 하진 않겠습니다만…. 확신할 수는 없죠. 게다가 어차피, 상단은 도시를 떠날 테고요.”
“그래. 아마 파엘도 그걸-”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이, 문득 낮게 웃음 지었다.
“양반은 못 되는군.”
저만치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물론, 파엘이었다.
“새로 준비한 음식은 입에 맞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장내로 들어섰다. 이안이 술잔을 들며 고개를 까딱이는 가운데 필립이 미소 지었다.
“아주 맛이 좋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오셨습니까? 그분 곁을 지키실 줄 알았는데요.”
“코까지 골면서 자는 걸 보니, 아주 멀쩡해진 것 같아서 말이오. 살아났으면 됐지, 고용주가 경호병 간호까지 할 필요는 없잖소? 그보단 은인들을 대접하는 게 우선이지.”
파엘의 너스레에, 이안은 코로 웃음 지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걱정하더니. 막상 고비를 넘고 나니 다른 생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랴부랴 다시 찾아온 건, 이안 일행이 내일 바로 떠나 버리지 않을까 싶어서였으리라.
자신의 술잔을 채운 파엘이 자리에 앉으며 웃음 지었다.
“해서, 무슨 말씀들을 나누고 계셨습니까?”
“흑마법사에 대해서.”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반대로 술을 입에 가져가던 파엘이 움찔 굳어졌다. 이윽고 다시 잔을 내려놓은 그가 말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도, 보르를 저렇게 만든 게 타락한 주문 쟁이란 말씀이시군.”
“꽤 높은 수준의 저주였소.”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파엘의 낯이 굳어지는 가운데, 필립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경호병을 더 고용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가능하다면 많이요. 만약 상대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동하는 동안 또 습격이 있을 겁니다.”
“그게….”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쩝 입맛을 다신 파엘이 말했다.
“제국법상, 상단이 고용할 수 있는 경호병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소. 사실, 그리 많이 고용할 수도 없고. 게다가 요즘, 실력 있는 용병들은 죄다 변방으로 가버려서 인재를 찾기도 어려운 실정이오.”
“영주님께 병사를 빌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필립이 덧붙였다. 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도시 안에서는 가능하지. 영주님과 나는 꽤 좋은 관계이니 말이오. 하지만 황실이나 교단의 명령이나 적법한 이유 없이는, 다른 도시로 병사를 보내는 건 금지되어 있소. 상대 도시에서 요청이라도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상단의 호위로 병사들을 부리는 건 안 될 일이오.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지.”
술을 한 모금 마신 파엘이 갈등이 오가는 눈빛으로 읊조렸다.
“억지를 부려볼 수도 있긴 하겠소만…. 그런 선을 넘는 행동은 더 큰 문제만 불러올 것이오.”
“제국법은 확실히 엄격하군요. 변방 왕국들과는 다르네요.”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숨을 내쉰 파엘이 술잔을 들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한 상태요. 모레 낮. 늦어도 글피 새벽에는 도시를 떠나야 하니까. 보르는 함께 갈 수 없을 테고, 교단에 도움을 청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오. 마법사를 고용할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대안이 떠오르질 않았소.”
술로 입술을 축인 그가, 주저하며 이안과 필립을 돌아보았다.
“…두 분 말고는 말이오. 이미 큰 도움을 받은 주제에, 정말이지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소만…. 한 번만 더, 우리를 도와주실 수는 없으시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