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75
275화
이안은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말을 몰았다.
같은 길로 되돌아가는 건 체포해 달라는 뜻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경비대와 한 밤의 추격전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 손에 잘린 머리를 들고 있기까지 하지 않은가.
다각- 다각-
적당히 굽어진 골목으로 들어선 백마가 속도를 줄였다. 이안의 시선이 옆으로 이어진 건물들의 지붕 너머로 돌아갔다. 웅성대는 소란과 외침이 메아리치듯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여기로 오길 잘했군.”
읊조리며, 이안은 비로소 적당히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눈에 담았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이었다.
보통은 온갖 범죄의 온상이겠지만, 이곳은 도시의 치안을 증명하듯 일찍부터 만취해 널브러진 취객과 비틀대는 행인, 그리고 반쯤 헐벗은 여인들의 모습만이 간헐적으로 보였다.
“잠깐 놀다 갈… 이런 젠장.”
다가왔던 여자가 인상을 구기며 재빨리 몸을 돌려 멀어졌다.
이안의 몰골 때문이거나, 앞에 앉힌 난쟁이, 혹은 그가 손에 쥔 잘린 머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셋 다일지도.’
어쨌건, 더는 아무도 앞을 가로막거나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안의 눈빛이 느긋해졌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그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도시들이 그렇듯 거미줄처럼 길이 이어져 있을 테니, 지금처럼 방향만 잘 맞춰 가다 보면 별채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일부러 천천히 가시는 건가요?
엘리야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래.
대답하며, 이안은 속삭임 스킬이 생각보다 마력을 많이 소모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엘리야의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주문이 아닌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의외로 엄청난 양의 마력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니라면, 속삭임이 고작해야 마력 탐지 정도의 소모값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뒷수습이 끝나기를 기다리시는 거군요.
잠시 고민한 엘리야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덧붙였다.
퀘스트 완료 창이 뜨길 기다리는 거기도 하고.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은 대답 대신 고삐를 쥔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헝클였다.
다 큰 성인인데 너무 애 취급을 했나,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난쟁이라는 종족의 특성상 종종 잊곤 하는 사실이었다. 물론 엘리야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곧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필립 경이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지고 있거든요.
-그 녀석은 쓸 줄 모른다며.
-요령을 알려 줘 봐야죠.
아직 마법 무구도 제대로 못 다루는 놈이, 그렇게 쉽게 될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어쨌건 시도해 봐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런데… 이 머리는, 계속 이렇게 들고 가실 건가요?
-그래.
엘리야가 작게 한숨 쉬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지.
웃음을 삼키며 엘리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이윽고 툭 덧붙였다.
-혹시, 너도 용의 진원을 마셨냐?
-진원이요…? 그럴 리가요. 그분께선 우리에게 자립할 능력을 기를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셨을 뿐, 그런 식의 도움은 주지 않으셨어요. …잠깐.
엘리야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대부님, 그분의 진원을 드셨나요?
-이젠 규칙을 전부 무시하는구나. 엘리.
-아, 죄송해요.
엘리야가 머쓱하게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낮게 실소한 이안이 대답했다.
-어쨌든, 그래. 마셨지.
-맙소사… 제가 알기로 그분께서 진원을 내린 건, 여러 대행자 중에서도 둘뿐이에요. 그마저도 상당히 오래전 기록이 마지막이고요.
-거 참 영광스럽군….
이안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물론 빈말이었다.
자신이 몇 번째로 진원을 마신 대행자인지보단, 차라리 아직도 뜨지 않고 있는 퀘스트 완료 창이 더 신경이 쓰였다.
뭔가 문제라도 생겼나.
-진원을 마신 분들은 전부 큰 힘을 손에 넣었다던데…. 이안 님도 그러시겠군요.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글쎄. 난 약발이 잘 안 받은 것 같은데.
-어떤 효과를 보셨는데요?
-주문을 빨리 완성할 수 있게 됐지. 잘 실패하지도 않게 됐고. 아마도.
-…엄청난 능력 같은데요.
난 마력 회복이나 마력량 증가를 원했거든.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하긴. 이안이 조금 특별한 경우일 뿐. 마법사는 보통 주문을 준비할 때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거칠게 움직이면 주문을 제대로 완성할 수도 없었다.
초 단위로 생사가 갈리는 전투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이안도 가끔은 주문이 깨지거나 아슬아슬한 순간을 겪지 않았던가.
하지만 진원을 마신 후로는 큰 충격이라도 받지 않는 한 주문이 실패하지 않았고, 하위 마법 정도는 눈 깜빡할 사이에 완성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지능 수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아야 가능했을 일이었다. 물론, 정신력도.
…그렇게 생각하면, 아예 구린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필립 경이 느껴져요.
곧이어 엘리야가 덧붙였다. 이안이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사이, 속삭임이 이어졌다.
-필립 경. 들리세요? 저택의 상황은 어때요?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코너를 돌며 이안이 덧붙였다.
-기도를 올린다고 생각해. 대신 신이 아니라, 우리한테 올리는 거다.
다시 적막이 이어졌다.
역시 안 되나. 이안이 입맛을 다실 찰나.
-들리십니까? 들린다고 해 주십쇼. 들리십니까? 들리시나요?
뇌리로 흐릿한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들리니까 그만해.
-되는군요! 드디어!
소리친 것도 잠시, 필립이 물었다.
-일은 끝내셨습니까? 저주술사는 죽이셨고요?
-그래. 머리를 들고 돌아가는 중이다.
-잘 됐군요. 그럼 어서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곧바로 대답한 필립이, 한숨을 내쉬고는 덧붙였다.
-이러다, 죄다 감옥으로 끌려갈 것 같거든요. …저만 빼고요.
***
저택으로 몰려든 병사들은, 부채꼴을 그리며 상단의 마차 주위를 포위했다. 결백을 증명하려 저택 밖으로 나가 있던 상인들은 곧바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바라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피해자입니다. 흑마법사가 우리 식구들을 몇이나 죽였는지 아십니까?”
파엘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의 뒤에 선 다른 상단주들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병사들의 창끝은 여전히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알고 있소.”
그 한복판에 선 관리의 표정 역시, 목소리만큼이나 싸늘했다. 병사가 든 횃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헝클어진 옷을 추스르지도 않은 채, 관리가 말을 이었다.
“찬란한 여신의 사도께서 증언하신 내용과도 일치하니, 그 부분에선 의심할 여지가 없지. 하지만.”
그가 짜증 섞인 냉막한 눈으로 상인들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당신들이 이 도시에 그런 위험한 종자를 들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타락자라니. 심지어 살아서 도망쳤다지. 사전 준비와 정보 없이 그럴 수 있을 리가. 당신들 사이에, 하수인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오.”
“우리가 왜 그러겠습니까? 아무런 이득도 남지 않는데요.”
“정말 아무런 이득도 없는지는 밝혀지면 알게 되겠지. 타락자와 관련된 일은,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허투루 넘어갈 수 없소. 자칫하면 도시 전체가 화를 입을 수도 있단 말이오. 그러니 모든 것은 법대로 집행할 것이오.”
팔짱을 낀 관리가 덧붙였다.
“당신들이 정말 결백하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무사히 풀려나게 되겠지.”
“…결백을 입증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파엘이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관리가 짧게 혀를 찼다.
“날이 밝으면 테디어스 백작 각하께서 황실과 대교회에 연락을 넣으실 것이오. 귀하들은 격리될 것이며, 수사는 대교회에서 합당한 권한을 가진 조사원이 도착한 뒤에 그들의 입회하에 이루어질 것이오.”
“대교회라니….”
파엘과 단주들이 탄식했다.
오랜 시간 더럽고 냄새나는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리란 건 둘째 치고, 여차하면 목이 달아나게 생겼기 때문이다.
만약 조사단에 대형 상단의 후원을 받는 이가 섞여 있다면, 사실상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찬란한 여신의 사도께서 이 자리에 계시며, 이분이 우리의 결백을 증명해 주셨는데도 그러신단 말입니까?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파엘이 뒤편, 마차의 문틀에 기대앉은 필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처음까지만 해도 앞에 서서 그들을 변호해 줬건만.
지금 그는 옆에 무기를 내려놓고 선 경호병들과 마찬가지로, 멀거니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파엘의 항변에도 대꾸조차 없었다.
“물론, 사도님의 증언은 믿소.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결백이 증명된 분이시지. 하지만 본인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소? 아직 대교회에 소속된 것은 아니시라고.”
관리가 슬슬 짜증을 참기 힘든 듯 혀를 차고는 덧붙였다.
“교단의 이름을 대행할 자격까지는 아직 없으신 셈이지. 게다가 사도께서도 속으신 걸 수도 있잖소. 타락자들은 기본적으로 간교하며,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인 자가 세 치 혀로 거짓을 논하는 걸 두려워할 리 없으니.”
“그런….”
“그러니 순순히 따라오시오.”
더는 입씨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자른 관리가, 파엘을 똑바로 응시하며 선언했다.
“이 이상 연행을 거부한다면, 공범으로 간주하고 집행하겠소.”
“그런…. 잠깐-”
이어진 파엘의 말을 무시하며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린 관리가 고개를 까딱였다.
“잠시 멈추셔야 할 것 같군요.”
덤덤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모두의 시선이, 비로소 일어서고 있는 찬란한 여신의 사도에게로 돌아갔다.
상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앞으로 나서며, 필립이 덧붙였다.
“이들이 무고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가장 확실한 증거가, 지금 도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필립이 손을 들어 병사들의 뒤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따라 돌아갔다.
다각- 다각-
쓰러진 대문을 넘어, 새하얀 마갑을 걸친 백마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 위에 탄 남자와 난쟁이까지 눈에 담은 관리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내가 아니라 이걸 보시오.”
병사들의 근처까지 다가온 남자, 이안이 관리를 향해 손에 든 것을 훌쩍 집어 던졌다.
“……!”
땅에 튕기며 발치로 굴러온 것의 실체를 확인한 관리가 눈을 치켜떴다. 잘린 머리였기 때문이다. 혀를 내밀고, 눈이 퀭하니 돌아간.
“이곳을 공격한 흑마법사의 목이오.”
말에서 뛰어내린 이안이, 엘리야를 안아 들며 내뱉었다. 엘리야를 땅에 무사히 내려놓은 그가 본능적으로 주춤주춤 물러난 병사들의 사이로 다가오며 덧붙였다.
“강에서 밀수선을 타고 도망치려는 걸 잡아 죽였지.”
관리의 놀람과 두려움이 섞인 눈을 마주 본 그가, 멀찍이 선 상단주들을 일별하며 덧붙였다.
“나는 저들의 부탁으로 이자를 쫓았고. 이 정도면, 저들의 결백은 증명된 것 같소만. 타락자의 하수인이라면, 그런 부탁을 할 리가 없잖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필립에게 저들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전부 전해 들은 그였다. 필립이 멀뚱히 앉아만 있었던 건, 그에게 말을 전하느라 다른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였다.
가만히 이안을 바라보던 관리가, 이윽고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내뱉었다.
“사도님의 종자이시오?”
종자…?
내심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날이 밝으면 두 분이 함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중언해 주십시오. 두 분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만, 상인들에 대한 조사는 절차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증거는 충분하잖소.”
“저도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백작께선 본래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의 작은 흠결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게다가 이번 일은 타락자가 얽혀 있지 않습니까. 교단과 황실의 주목을 받을지도 모르는 사안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시발, 더럽게 깐깐하네. 이것도 중앙이라 그런가.
이안은 내심 혀를 찼다. 퀘스트는 여전히 완료되지 않았다.
상단주들은 아직도 확실히 안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영주는 기어코 대교회의 조사단을 부를 것이며, 자신의 작은 손해도 용납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조사 과정에서 적어도 단주 한둘은 대신 책임을 뒤집어쓰고 죽게 되리라.
‘게임에서는 대체 어떤 식으로 완료되었던 거지. 무슨 선택지라도 튀어나오는 거였나.’
파엘을 중심으로 모여선 가지각색의 상단주들을 한차례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짧게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필립의 시선이 조금 전부터 뜨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며칠은 더 발이 묶이고, 상황도 골치 아프게 돌아갈 것 같은데요. 그냥, 그렇게 되게 두실 겁니까?
눈이 마주친 순간,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속삭였다.
-아니면… 그냥, 제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속삭임에 은근한 기대감이 묻어 나오는 건 아마도 착각이 아닐 터였다.
이안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필립이 그렇듯, 그 역시 이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할 방법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중앙에서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는데….’
물론,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안이 필립에게 간단한 몇 마디를 속삭이는 사이.
“그럼, 이 흑마법사의 머리는 저희가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단주들은, 병사들이 정중하게 후송할 겁니다.”
이안의 침묵이 동의라 여긴 듯, 관리가 옆에 선 병사에게 눈짓을 보내며 덧붙였다.
이안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는 그때.
“멈추십시오.”
필립이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머리를 주우려던 병사가 멈칫하는 가운데, 필립이 앞으로 한 걸음을 더 나서며 덧붙였다.
“바스무트의 영주님과 관리들이 얼마나 신실하며 법을 준수하는지 충분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타락자가 관련된 일이니, 수사권은 넘겨받도록 하겠습니다.”
“…그 부분은,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어리둥절하게 미간을 좁힌 관리가, 필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아무리 찬란한 여신의 사도시라 해도, 귀공께선 아직-”
“물론 나는 그렇죠. 하지만 지금부터 소개할 분은 아닙니다.”
“……?”
관리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낮게 헛기침한 필립이, 이윽고 넓게 번져 나가는 엄숙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들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