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77
277화
이안의 시선에, 백작이 야윈 볼이 더 도드라지게 미소 지었다.
“귀한 분들을, 이렇게 폐허가 된 곳에 모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이런 말도 할 줄 알았지.
이안의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백작에겐 여러 가지 의미로 이득이 될 제안이었다. 이안도 딱히 손해 볼 부분은 없었다.
상단주들은 더는 백작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이안이 상관할 부분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고개를 끄덕인 건 아니었다.
“제안은 고맙소만. 희생자들과 마차를 두고 가는 건 마음에 걸려서 말이오. 나 때문에 더는 주위가 시끄러워지는 것도 원하지 않고. 소란은 오늘 밤만으로 충분한 것 같으니.”
미리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이 있었으니까. 백작이 염려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에게 현장을 수습하게 하겠습니다. 관계자 외의 출입을 금지하고, 날이 밝으면 적법한 절차로 장례를 준비할 것입니다. 성자 대행을 귀찮으시게 할 일도 없을 겁니다. 별채를 내어 드리고, 시종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할 테니까요. 다만….”
백작의 미소가 은근해졌다.
“감히 청하건대, 내일 밤 만찬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귀하신 분께서 도시를 방문하셨는데 식사조차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다면, 예의와 법도를 모르는 무뢰한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중앙의 귀족인 거군.
이안이 내심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백작이 덧붙였다.
“함께 가 주시지요. 따듯한 목욕물과 식사를, 바로 준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그가 양 손바닥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이안은 옆자리의 엘리야를 슬쩍 돌아보고는, 비로소 못 이긴 척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럼, 신세를 지겠소.”
***
‘분명히 한동안 이름 없는 용병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는데…. 또 정반대의 상황이 됐네.’
이래도 되나.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며 문득 생각한 이안은, 이내 실소를 흘렸다.
느지막이 일어나 시종들이 준비해 준 따듯한 물로 목욕까지 한 번 더 하고, 깨끗한 새 옷을 걸친 채 빵과 고기를 씹으며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도, 사실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는 경우가 언제나 더 많지 않았던가.
애초에 중앙이 이렇게 평화롭고 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지역이라는 것조차, 이안의 기억이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저녁에 만찬에 참석하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듣자 하니 백작 일가는 물론이고 도시 귀족들과 사제들도 죄다 참석할 예정이라던데요.”
식탁 너머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진작 식사를 끝내고 두툼한 누비옷 위에 갑옷을 하나씩 걸치는 중이었다. 이안이 닭고기를 우물대며 말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냐?”
“어제, 상단주들과 돌아오는 길에요”
이안, 엘리야와 달리 필립은 별장에 남아 뒷수습을 도왔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대답했다.
“뭐,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귀찮을 것 같으면, 넌 남아 있든가.”
“제가 있어야 조금이나마 시선이 분산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걱정은 조금 되는군요. 백작은 어떻게든 나리를 도시에 더 머물게 하고 싶어 할 테니까요. 어제 보니, 아주 귀족적인 작자던데요.”
“너도 서임을 받고 나면 귀족이거든? 어쨌든,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 테니까.”
피식 웃은 이안이 술잔을 집어 들며 일어섰다.
방 저편, 바닥에 깔린 곰 가죽 위에 앉은 엘리야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깨끗한 천과 정체 모를 기름으로 이안의 장비를 닦고 있었다.
“내가 해도 된다니까.”
이안의 말에, 엘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냄새를 다 없애려면, 제가 해야 돼요.”
실제로도 그녀는, 이안의 장비들을 거의 해체하다시피 해서 구석구석 닦고 있었다.
…이것도 난쟁이의 장인 정신 같은 거라고 봐야 하나.
“그러던가. 그럼.”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창가에 끌어다 둔 소파에 걸터앉았다.
포도주로 입을 헹구는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전경을 훑었다.
백작의 저택은 내성과 이어진 것처럼 지어져 있었다. 벽돌의 색이 다르지 않았다면 그냥 성의 일부라고 생각했을 생김새였다.
어쨌건 실제로 이어져 있는 건 백작이 머무는 본관뿐이었다. 이안 일행과 상단주들이 머무는 별관은 그저 벽면만 이어져 있었다.
일행은 최상층을 통째로 썼다. 각자 개인 방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방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장 큰 방에 모여서 잤다. 엘리야도 그 부분에 전혀 이견을 표시하지 않았다.
“뭔가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갑옷을 거의 다 걸친 필립이 물었다. 이안이 저 멀리, 별장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은 연맹에서 한 마리 준비해 준다고 했댔지.”
“예. 정오에 합동 장례를 치르고, 남은 부분들을 정리한다고 들었습니다. 말만 죄다 죽은 게 아니라 물건도 반절은 못 쓰게 됐다더군요. 그 뒤엔, 아마도 못다 한 회담도 마무리 짓겠죠.”
필립은 희생자들의 장례를 주도하게 됐다. 루 솔라의 사도로서 자처한 것이리라.
“그럼 장례가 끝나면 파엘 단주는 내게 오라고 해. 일정과 의뢰에 대해서 할 말이 남아 있으니까. 뒷정리는 네가 대신해 주고.”
어젯밤 이후, 이안은 아직 파엘과 한 마디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상단주들은 이안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별관에 도착했고, 이른 아침에 다시 밖으로 나갔으니까.
물론 이안도 굳이 먼저 그를 찾지 않았다. 충격이 꽤 커 보였으니,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남은 계산이 있지 않던가.
“예. 만나자마자 말해 두겠습니다.”
관절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 필립이 방패를 등에 짊어졌다. 마지막으로 투구를 뒤집어쓴 그가 비로소 몸을 돌렸다.
엘리야가 먼저 다 닦아 둔 덕분에, 갑옷이 새것처럼 반짝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내일 바로 떠나실 겁니까?”
“아마도. 잘 준비해 둬.”
“염려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벌어진 안면 가리개 사이로 미소 지은 필립이 밖으로 나갔다.
새끼. 넉살만 는다니까.
짧게 웃음 지은 것도 잠시.
“그럼 나도… 못다 한 걸 해 둬야겠군.”
이안은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툭, 뒤이어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짐가방이 소파 위에 떨어졌다.
견갑 안쪽을 닦고 있던 엘리야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뭔데요?”
“모가지 날아간 놈의 물건.”
“……!”
엘리야의 색이 다른 두 눈이 반짝였다.
“흑마법사의 가방이라고요?”
“그래. 같이 볼래?”
“…그래도 돼요?”
멈칫한 엘리야가,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어 되물었다. 확실히 어제의 경험이 기억에 깊숙이 박히긴 한 모양이었다.
이안이 가방의 가죽끈을 풀며 어깨를 으쓱였다.
“보기만 할 거라면.”
벌떡 일어선 엘리야가 그대로 곰 가죽의 머리 부분을 잡고 소파 앞까지 질질 끌고 왔다.
장비를 계속 닦으면서 보려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가방을 연 이안은, 맨 위에 보이는 것부터 집어 들었다.
저주술사의 품에서 꺼냈던 접힌 종이였다.
“역시….”
종이를 펼친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예상대로, 놈이 받았을 의뢰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단들의 연합이 결성되지 못하게 막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방주 상단의 위치와, 파엘의 간단한 신상 정보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저주술사가 직접 쓴 듯한 휘갈긴 글자들이 더 있었다. 바스무트 라던가 회담 일정 따위를 메모한 것이다.
‘하긴. 처음에는 보르의 목으로 경고만 하려고 했었지.’
경고가 동하지 않자, 그냥 단주들을 다 죽여서 결성을 막는 것으로 방향을 튼 것이리라. 흑마법사다운 논리의 전개였다.
의뢰인에 대한 단서는 전혀 없었다. 물론, 이안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있었다면 오히려 놀랐을 터였다. 종이를 대충 옆에 놓은 그가, 다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네가 좋아할 만한 게 있네.”
그가 두툼한 책을 꺼내 들었다. 작은 사전 정도의 두께였다. 이런 부류의 책들이 그렇듯, 불길해 보이는 잿빛 표지에는 아무런 글자도 쓰여있지 않았다.
“마법서군요.”
“아마도. 그리고 이건….”
마법서를 옆에 놓은 이안이, 이내 불그스름한 가죽으로 덮인 손바닥만 한 책자를 꺼내 들었다.
“놈이 쓰던 개인 일지겠고.”
“저도 읽어 봐도 되나요?”
엘리야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먼저 읽어 본 뒤에. 문제없을 것 같으면.”
“네.”
엘리야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경험이 중요하다니까.
싱긋 미소 지은 이안이, 뒤이어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마석이군. 정수도 하나 있고.”
안을 살펴본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소형과 중형 마석이 여러 개 섞여 있었다. 정수도 중급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아직 오염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안 그래도 슬슬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마석이나 정수는 돈이 있다고 무한정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돈주머니도 꺼내 들었다.
금화가 스무 개나 들어 있었다. 은화도 여러 개였다. 진행비. 혹은 선금으로 받은 것이리라.
만족스럽게 돈주머니를 던졌다 받은 이안은, 이어 돌돌 말린 채 들어 있는 양피지로 손을 뻗었다.
“호오….”
양피지를 활짝 펼친 그가, 이윽고 짧은 탄성을 흘렸다. 양피지 너머에서 엘리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뭔데요, 이안 님?”
“주문 회로야.”
이안이 얼굴이 드러나게 양피지를 내리며 덧붙였다.
“고통과 광란의 저주가 새겨진.”
“……!”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야가, 이윽고 덧붙였다.
“주문 회로를… 어떻게 읽으신 거예요? 마법사마다 회로를 만드는 방식이 제각각이라, 복잡한 주문 회로는 제작자가 아닌 이상 읽는 게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요….”
아, 그게 놀라웠던 건가.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잘.”
물론, 그는 주문 회로를 읽는 방법 따윈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정보창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이건 시전자의 마력으로 발동되며 중급 이상의 정수로 유지되는 설치형 주문 회로였다.
그가 다시 양피지를 말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사방에 저주를 뿌려야 하는 상황이 오면 유용하게 쓸 수 있겠네.”
“그런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요?”
“최악의 상황.”
“…….”
이안은 이제 작은 목함만 남은 가방 안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은 그가, 이내 목함 대신 작은 쇳조각을 집어 꺼내 들었다.
이것도 저주술사의 로브에서 꺼냈던 물건이었다. 의뢰서와 달리 안쪽 깊숙한 곳까지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이안의 대답에 말문이 막힌듯한 표정이던 엘리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으로 돌아갔다.
“휘장… 인가요?”
“아마도.”
이안은 조각의 뒷면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소매나 옷깃에 고정할 수 있게 뾰족한 핀과 고정쇠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정작 표면은 반질반질할 뿐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이 휘장의 본모습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
이안의 눈동자에 마력이 아른거렸다. 마력이 휘장으로 흘러들자, 표면에 옅은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엘리야가 눈을 깜빡였다.
“문양을 감춰 둔 거군요.”
“그래. 같은 마법사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게.”
말하며, 이안이 휘장 표면에 일렁이는 문양을 엘리야 쪽으로 보여 줬다.
위아래가 길쭉한 마름모. 그리고 십자로 교차한 직선이 각 꼭짓점 밖까지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청색 마탑….”
문양을 알아본 엘리야가 탄식했다. 그녀가 굳어진 얼굴로 덧붙였다.
“그자는 청색 마탑의 마법사였던 거군요.”
“과거에 그랬거나. 지금도 그렇거나.”
휘장 표면의 문양을 다시 내려다보며, 이안이 읊조렸다.
어느 쪽이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놈의 일지를 읽어 보면 확실하게 알게 되겠지만.
“혹시나 해서 묻는 거다만, 위치를 아는 마탑이 있냐?”
“아뇨. 애석하게도요. 아시다시피 모든 마탑의 위치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마법사들이 드나드는 통로의 위치도 알려진 바가 없지. 모르면 됐어.”
이안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임에서도, 그가 발을 들여 본 마탑은 회색 마탑이 유일했다. 그나마도 들키자마자 바로 추방당했었다.
마탑이 위가 아니라 아래로 향하게 지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회색 마탑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건 아니었다. 마경인 마법사의 악몽이 그들의 탑과도 이어져 있었기에 들어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한 가지 속성의 마법만 익혔다면 해당 마탑의 일원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안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물론 현실이 된 지금은, 뇌를 해부해 보겠다고 달려들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어쨌든 이게 있으면, 청색 마법사인 척은 할 수 있겠네.”
들키기 전까지는. 읊조린 이안이 휘장을 마석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이안 님은, 여러 색의 마법을 쓸 수 있으셨죠.”
엘리야가 새삼스럽게 읊조렸다.
이안이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분께 들었나 보군.”
“네. 이안 님은 여러 비밀을 품고 계시고, 그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고도 하셨어요. 대답해 주지도 않으시겠지만, 좋아하지도 않으실 거라고요.”
“예습을 잘했네.”
그냥 내 얘길 많이 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목함을 꺼내 들었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였고, 표면에 아주 낡은 주문 회로가 새겨져 있었다.
아무런 빛도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비슷한 것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암흑 성물을 보관하던, 지금은 공허의 표식을 보관 중인 봉인함.
‘암흑 성물 같은 걸 가지고 있기엔, 좀 모자란 놈이었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걸쇠를 푼 이안이,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 담긴 물건을 확인한 그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이건….”
호두알보다 조금 큰 크기의 유리구슬이었다. 정말 유리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물론, 이안은 구슬의 재질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새카만 덩어리가 구슬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숯덩이를 연상시키는 질감의 덩어리였다. 하지만 숯은 아니었고, 구슬 내부에서 살짝 떠 있기까지 했다.
상자를 꺼내며 흔들려서인지, 가루 같은 조각이 주위로 안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구웅….
이안의 손끝이 구슬에 닿은 순간, 내면에서 혼돈의 파편이 옅은 울림을 토해냈다. 이안의 눈매가 다시금 꿈틀대는 가운데.
“이안 님…?”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듯, 엘리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눈 감아야 하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
어쨌든 이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종류의 물건은 아니었다. 이안이 상자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이건…?”
엘리야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안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너는 바로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네.”
“……?”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시. 곧 엘리야의 눈이 서서히, 그리고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말도 안 돼…. 설마… 설마 이건….”
이안의 눈을 마주 본 그녀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검은 벽의… 파편인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