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78
278화
“그래.”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게임에서도 한두 번쯤 얻은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그때는 그냥 상점에 헐값에 팔아넘겼었다. 타락자 전용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이 된 지금은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제도의 암시장에 넘기는 거라면 모를까.
‘이걸 대체 어떻게 채취한 건지는, 여전히 감도 안 잡히지만.’
이안은 다시 상자를 자신 쪽으로 돌려, 구슬 속의 파편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이건 파편 중에서도 하급품이었다. 소지 시에는 마력 회복 속도를 미미하게 상승시켰고, 사용 시에는 혼돈력을 아주 조금 영구적으로 늘려 줬다.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었다.
“자신의 마력을 오염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던 거겠군요.”
멍하니 상자를 바라보던 엘리야가 이윽고 덧붙였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하긴. 모든 타락자가 암흑 성물이나 혼돈의 파편이 담긴 정수를 가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직접 공허에서 마력을 가져올 방법이 없는 자들은, 검은 벽의 파편을 그 대용품으로 사용하는 것이리라.
물론 이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겠지만. 마탑 소속의 마법사에게는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터였다.
“전선 인근에만 마법사들이 우글댄다더니. 이유가 있었던 거지.”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짧게 침음한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지나가듯이 읽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상자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에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일렁였다. 연구해야 할 대상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당연한 반응일 터였다.
파편을 잠시 내려다 본 이안이, 이내 다시 상자를 닫았다.
“이 물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
“손님이 오고 있거든.”
내 예상보다 빨리.
내심 덧붙인 이안이, 가방에 목함과 양피지를 비롯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진 건, 이안이 돈주머니와 마석 주머니까지 아공간에 넣은 직후였다.
“…파엘입니다. 성자 대행.”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엘리야에게 표정을 관리하라는 눈짓을 보낸 이안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술잔을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뒤이어 그보다 더 조심스러운 표정인 파엘이 안으로 들어섰다.
경직된 미소를 입가에 건 채였고, 이안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어쨌건 어제처럼 넋이 빠진 상태는 아니었다.
내심 웃음을 삼키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 아직 장례가 다 끝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찾으신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다들, 먼저 가 보라고 하더군요. 말씀드려야 할 내용도 있는데… 제가 적임이니까요.”
하긴. 방주 상단은 육각 연맹의 상단 중에서 희생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유일한 상단이었다.
게다가 다른 단주들은 이안에게 직접 뭔가 이야기를 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터였다. 이제는 파엘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쨌건 이안은 그의 개인 경호 신분으로 동행 중이지 않던가.
이안이 턱짓했다.
“일단 앉으시오.”
“아, 예.”
삐걱대며 몸을 돌린 파엘이 곧 의자를 들고 돌아왔다.
사이에 엘리야를 둔 채였다.
영애가 갑옷을 닦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을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의자에 앉으려던 파엘이, 이안이 손을 뻗자 엉거주춤하게 멈춰섰다.
“저주 술사가 가지고 있던 의뢰서요. 배후를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의도적으로 연맹의 결성을 막으려는 자가 있다는 증거로는 충분할 것이오. 백작에게 들키면 빼앗길 테니, 간수 잘 하시고.”
“따로 챙겨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인 파엘이 양손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그의 손에 종이를 건네준 이안이 덧붙였다.
“이젠 이걸 보여줘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진 것이오?”
의뢰서를 흘깃 내려다본 파엘이 재빨리 접어 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 일로 다들 적지 않은 손해를 입게 됐으니까요. 거기다 백작의 보고서에도 이름이 올라갔으니. 사실, 이제는 흩어질 수도 없게 됐습니다.”
“백작의 보고서가 벌써 나왔소?”
“밤새 작성한 모양이더군요. 몇 시간 전에 이미 제도로 전령이 출발했습니다.”
더럽게 부지런하네.
이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여긴 황실과 교단의 입김이 바로 닿는 중앙이었다.
정리를 끝내야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으리라. 백작이 달리 그렇게 야위고 예민한 게 아닌 것이다.
“그럼 이제….”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아직 앉지 않고 서 있는 파엘을 마주 보았다.
“내 의뢰는 완료된 셈이군. 추가 조항을 포함해서.”
“물론입니다. 성자 대행.”
대답한 파엘이, 곧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연맹의 모두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성자 대행이 아니셨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욕심에 눈이 멀어 서로를 죽인 수전노들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겠지요. 그리고….”
잠시 머뭇거린 파엘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간의 무례에도 사과드립니다. 성자 대행.”
아주 난리가 났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이안.”
“예…?”
“하던 대로 부르시오. 그렇게 불리는 건 영 불편해서 말이오.”
그가 슬쩍 고개를 든 파엘의 눈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알던 사이끼리 이렇게 낯간지러운 짓을 하는 것도 질색이고.”
“하지만… 제가 어찌….”
“우리가 처음 알았을 때는, 나는 용살자도 아니고 백금룡의 대행자도 아니었소. 게다가 그 이후로도 귀하에게 굳이 알려 주지 않았으니, 사과를 받을 것도 없지. 그러니 적당히 하시오.”
이안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솔직히, 뒤통수가 얼얼하셨잖소. 아니오?”
눈을 깜빡인 파엘이, 비로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라고 하지는 못하겠군요.”
대답하며 공손하게 일어선 그가, 비로소 의자에 앉았다.
“정말이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저를 보시면서 경이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재미가 아예 없진 않았지.”
이안의 대답에 파엘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가 덧붙였다.
“그래도, 억울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보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땅을 칠 테니 말입니다. 그 친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보르는 이미 알고 있소.”
“-궁금해서 참, 예?”
파엘이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 빠른 친구잖소.”
“허… 아니… 그럼… 저만 몰랐단 겁니까?”
“그런 셈이지.”
“루 솔라여…. 상인은 눈치와 감이 생명이나 다름없건만. 저는 정말 자격 미달이군요.”
“말했잖소. 단주의 감은 믿을 게 못 된다고.”
눈을 감은 파엘이 허탈한 웃음만 흘렸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의뢰 얘기로 돌아갑시다. 정산이 남았잖소?”
“물론입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제안을 먼저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안?”
“미드퍼트로 가실 예정이라고 하셨었지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도 함께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
***
오후. 별채의 응접실에서 이루어진 잔여 회담의 분위기는 전날과는 사뭇 달랐다.
“그럼, 정기 회담은 반년에 한 번씩 이곳 바스무트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단주가 불참 시 적법한 대리인이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소. 이의 있는 자는 잔을 드시오.”
“…….”
“…….”
남은 논의 사안 대부분이 상단주들의 이견 없이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있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귀빈의 자격으로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한 이안과 엘리야. 그리고 그들의 뒤에 선 필립 때문일 터였다.
“…….”
게다가, 필립의 곁에는 한 사람이 더 서 있었다. 북부인 경호병. 본래 풍차 상단 단주의 개인 경호병이었던 그는, 이안을 다시 본 순간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이안은 본업으로 돌아가라 명령했지만, 이곳에 함께 있는 동안만이라도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별수 없었다. 그리고는 회담 내내, 필립과 나란히 선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마 그의 시선도, 회담의 원활한 진행에 일부나마 도움을 주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지만.’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이안은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가 이 자리에 참석한 건, 파엘이 미리 약속했던 추가적인 보상 때문이었다. 회담 자리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안건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언급될 내용은 의뢰의 보상만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분들에 대한 안건으로 넘어가겠소.”
포도주로 입술을 축인 파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연맹의 공식적인 초대 대표자가 되었다. 연맹의 설립이 그의 계획이었던 것도 있지만, 이안의 후광이 큰 역할을 한 게 분명했다.
파엘의 시선이, 이안의 옆에 앉은 엘리야에게로 돌아갔다.
“이 자리를 빛내주신 영애께선, 제도의 대학에서 아주 중요한 연구를 하시게 될 예정이오. 저 검은 벽의 비밀을 밝혀낼 연구 말이오.”
“……!”
“……!”
단주들의 시선이 엘리야에게로 집중됐다. 다들 백금룡의 대행자와 함께 다니는 묘령의 난쟁이가 대체 누구인지 내심 궁금했던 것이리라.
“검은 벽은 이 자리의 모든 분들에게도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오. 누군가는 고향을 잃었고.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었을 테니.”
파엘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이 고개를 끄덕이는 단주들을 훑었다.
“이번에 우리가 겪은 일도 검은 벽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목숨을 잃은 이들 역시. 그러니 영애를 연맹의 이름으로 후원한다면, 의미가 있지 않겠소?”
엘리야는 전에 그랬듯 파엘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미 아까 방에서 이 부분에 대한 합의를 끝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이상, 상단주들도 그녀를 멋대로 휘두를 수는 없을 터였다.
“동의하는 분들은 잔을 드시오.”
파엘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차례로 술잔을 든 단주들의 시선이, 곧 이안의 앞에 놓인 술잔으로 향했다.
‘나는 왜.’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술잔을 들었다. 미소 지은 파엘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말했다.
“이제, 우리들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신 두 분에게 감사를 표할 일만 남았군요.”
파엘의 시선이 이안과 필립을 차례로 훑었다. 단주들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은 이미 파엘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안을 마주 본 파엘이 말을 이었다.
“두 분께는, 연맹의 황금 휘장을 발급해 드릴까 합니다.”
“황금… 휘장이요?”
이안이 슬쩍 고개를 갸웃할 찰나, 뒤에 선 필립이 그의 속내를 대변하듯 물었다.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맹의 은인이나 귀빈께는,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휘장을 발급해 드릴 예정입니다. 합당한 대우를 받으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연맹에 소속된 모든 상인에게요.”
파엘이 양손을 활짝 펼치며 말을 이었다.
“두 분께 발급해 드릴 황금 휘장은 가장 높은 등급의 휘장입니다. 앞으로 연맹에 소속된 상인들의 모든 물건을 가장 싸게, 그리고 가장 우선 적으로 구매할 권리를 가지게 되실 겁니다. 기본적으로요.”
…그러니까, 일종의 VIP란 거네.
이안이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생각지도 못한 추가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적어도 금화 백 개보다는 가치 있어 보였다. 게임에서처럼 바가지를 쓸 일은 없어지지 않겠는가.
“거처가 정해져 있으시다면, 필요한 물건을 요청하시면 직접 가져다드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약간의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이며, 구할 수 있는 물건일 경우에만 가능하긴 하겠지만요. 이 이외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혜택을 드릴 예정입니다. 연맹의 은인 분들이시니까요.”
어쨌건, 이건 연맹의 입장에서도 마냥 손해는 아닐 터였다.
아무에게나 황금 휘장을 발급해 줄 리는 없지 않겠는가. 심지어 백금룡의 대행자와 루 솔라의 사도가 첫 황금 휘장의 주인이니, 상징적인 기준점이 되기도 하리라.
연맹의 신뢰도를 높이는 건 물론이고, 고객들의 허영심을 자극하기에도 좋겠지.
‘감은 별로여도, 이런 머리는 잘 쓴다니까….’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잠시 숨을 고른 파엘이 입을 열었다.
“황금 휘장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단주들도 숨을 멈춘 채 이안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이안의 대답 여하에 따라, 저들의 계획 역시 달라지게 될 터였다.
필립의 시선이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가운데, 이윽고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받아들이겠소.”
“다행이군요….”
파엘이 안도를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단주들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번질 찰나.
“다만.”
이안이 덧붙였다.
“연맹이 그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면, 그때는 귀빈이 불청객으로 바뀌게 될 것이오.”
“……!”
단주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마찬가지로 멈칫했던 파엘이, 이내 한 손을 가슴 앞에 얹으며 허리를 폈다.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대형 상단의 횡포와 부조리한 처신에 고통받았던 이들만 있으니. 악습이 되풀이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맹세가 지켜지길 바라겠소.”
이안이 덧붙인 말에, 파엘은 물론 모든 단주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맹세하리라 덧붙였다.
…사명감 같은 걸 끼얹을 생각까진 없었는데.
이안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빙긋 미소 지은 파엘이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아직 휘장이 준비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미드퍼트에서 제작이 완료되는 대로 발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동행하자고 했던 거구만. 이안의 입꼬리가 비로소 다시 말려 올라갔다.
“그렇게 하시오.”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파엘이, 마침내 후련하게 미소 지었다.
“자. 이것으로 연맹의 첫 정기 회담은 모두 끝났소. 그럼, 저녁 만찬에서 다시 봅시다.”
약속대로, 이안은 백작과의 저녁 만찬에도 참석했다.
필립이 예상한 것처럼 백작은 그가 도시에 더 머물기를 바랐다.
아마 제도에 보낸 보고서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안이 남아 주길 바라는 것일 터였다.
이안은 딱 잘라 거절하는 대신, 자신과의 대작에서 승리하면 남아 주리라 약속했다.
그리고 만취해 기절했던 백작은, 다음날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다시 눈을 떴다.
연맹의 상단들과 이안 일행은, 이미 진작 도시를 떠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