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83
283화
세라스의 입이 순간 벌어졌다.
술이 조금 들어가서인지, 아니면 솔직하기로 한 결과인지. 아까보다 표정의 변화가 더 도드라졌다.
그녀의 뒤에 선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페이든 경은 이안과 황녀의 대화가 오갈 때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냉탕 같았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용병이오. 많은 이들이 착각할 뿐, 지금도 그렇지.”
물론, 이안은 진심이었다.
솔직히 그리 내키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교단에서도 접촉해 오리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게임 속 성기사나 수행사제는, 황실이 아니라 교단의 부름을 받고 전선으로 가게 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현실이 된 지금은 직업에 따른 제약 같은 건 없으리라.
심지어 그는 저 위대한 백금룡의 대행자가 아닌가.
“그러니 나와 폐하를 만나게 하고 싶다면, 내가 그런 선택을 할 만한 합당한 보상을 먼저 제시하시오.”
다소 얼이 빠진 얼굴인 세라스를 바라보며, 이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내 입장에선 황실과 교단은 그다지 다를 게 없소.”
“루 솔라여….”
세라스의 입에 탄식이 번졌다.
“정말이지, 성자 대행께선 제가 전해 들은 것과는 여러모로 다른 분이시군요….”
“많이들 그렇게 말하더군. 실망했다면, 애석하게 됐소.”
“아뇨. 오히려… 그 반대에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세라스의 입가에는 오히려 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충격적인 와중에도 정말 무언가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게 어떤 부분인지는 이안도 알 수 없었지만.
“성자 대행께 누가 되지 않을 정도의 금화라면… 제 손을 잡아 주실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이어진 세라스의 말에, 이안의 입가에도 미소가 스쳤다.
“귀하가 아니라 폐하의 손을 잡는 것일 텐데.”
그가 세라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게 귀하의 손을 잡는 것이기도 한 모양이오.”
“…물론이죠.”
세라스가 선선히 대답했다.
부정하는 게 의미가 없다 여긴 것이리라. 자신이 협상에 유리한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확실히 인정한 모양이었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라면 구미가 당겼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아니오. 마침 오늘, 돈이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많아진 참이라서. 그러니, 다른 조건을 제시해 보시오.”
이를테면 유물이라든가. 성물이나 최고급 마법 무구. 황실의 보물 창고 열쇠라거나.
이어진 수많은 뒷말을, 이안은 포도주와 함께 삼켰다.
“…….”
마찬가지로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세라스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녀가 불현듯 눈동자만 움직여 이안을 바라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성자 대행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이안을 빤히 응시하며 술을 전부 들이켠 세라스가, 이윽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안은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는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세라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 이미 정혼자가 있으신가요?”
“……?”
이안의 입술에 닿은 술잔이 우뚝 멈췄다.
“전하…!”
“맙소사, 루 솔라여….”
동시에 사방에서 크고 작은 탄식이 이어졌다. 세라스의 뒤에 선 이들은 물론이고, 파엘과 필립까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건 황녀의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떡진 붉은 머리와 위태롭게 의연한 녹색 눈동자가 뇌리를 스쳐서였다.
“…정혼자는 없지만.”
상념을 떨치며 내뱉은 이안이, 술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정략결혼 같은 걸 할 생각도 없소.”
페이든과 아스메의 시선이 동시에 이안에게 집중됐다. 안도한 것 같기도, 뭔가 발끈한 것 같기도 한 묘한 눈빛들이었다.
그들과 달리, 세라스는 그저 빙긋 입꼬리만 말아 올렸다.
“아쉽네요. 제가 가진 가장 좋은 패였는데. 이렇게 단박에 거절하실 줄은 몰랐어요.”
“거절할 건, 이미 알고 있으셨을 것 같소만.”
“조금은 고민이라도 해 주시길 바랐죠.”
어깨를 으쓱인 세라스가, 옆으로 손을 뻗어 술병을 집어 들었다.
황족과의 정략결혼이라.
이안은 내심 곱씹으며 웃음 지었다. 이게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보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였더라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터였다. 얻게 될 혜택만큼이나 제약도 많을 것 같은 보상이 아닌가.
“어렵네요… 성자 대행을 만나는 게 가장 어려운 부분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천천히 자신의 잔을 채우며, 세라스가 읊조렸다. 그녀의 시선이 이안의 뒤편으로 향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윽고 술병을 다시 내려놓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필립 경은 아직, 대교회의 임명 의식을 치르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전하.”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는 듯, 필립이 조금 얼떨떨한 말투로 대답했다.
이번엔 주변을 공략해 보겠다?
이안은 실소를 삼키며 잔을 들었다.
또 다른 거한 헛발질이긴 했지만, 일단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어쨌건, 테디어스 백작이 정말 병적으로 꼼꼼한 작자였다는 건 분명했다.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사이, 세라스가 방긋 미소 지었다.
“잘 됐군요. 혹, 그 후에 교단의 성기사가 될 예정인가요?”
“글쎄요.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의식을 마친 후에 내게 오는 건 어떤가요?”
“…전하께요?”
순간 굳어졌던 필립이 되물었다.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기사는 많을수록 좋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여기 이 페이든 경처럼 실력과 신의를 겸비한 분은 더더욱 드물죠.”
그녀의 시선이 필립의 안면 가리개를 바라보았다.
“전 필립 경도 그런 분이시리란 확신이 들거든요. 찬란한 여신의 사도이며, 성자 대행의 친우이기도 하시니까요. 심지어, 교단을 신뢰하지도 않으시는 것 같고요. 그게 아니라면, 아까 제가 한 말에 질문이나 반박을 하셨겠죠.”
나를 낚기 위한 제안만은 아니군.
이안은 내심 웃음 지었다. 세라스는 정말 필립도 원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묘책이라 여기는 걸지도 몰랐다.
어쨌건 필립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황실. 그것도 황족의 직속 기사가 되는 건, 기사에게 가장 명예로운 일 중 하나였으니까.
이안이 보기에도, 교단의 성기사가 되는 것보단 차라리 이쪽이 나아 보였다.
“더없이 황송하고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필립이 더듬더듬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하.”
“어머… 왜죠?”
세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는 정말 놀란 것 같았다.
페이든과 종자, 아스메와 파엘도 마찬가지였다. 파엘은 말 그대로 입을 떡 벌린 채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필립이 굴러들어온 황금을 걷어차는 것으로 보이리라.
“저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내뱉고 나자 오히려 더 확실해진 듯, 이어진 필립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전하를 섬기면서 동시에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메브가 들으면 땅을 치겠는데.
내심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상하게 필립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많이 거절당하다니…. 오늘 밤을 평생 잊지 못하겠네요.”
탄식한 것과 달리, 세라스는 전혀 상처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필립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이 필립의 옆쪽으로 향한 건 그 직후였다.
…온 동네를 다 찔러 보겠군.
“구경하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불필요한 노력은 거기까지 하시는 게 좋겠소.”
느긋하게 내뱉은 이안이, 잔을 들며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거래 상대는 나잖소? 내 친구들이 아니라.”
“마땅히 떠오르는 게 많지 않아서요. …성자 대행께서 작은 단서라도 주신다면, 제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될 텐데요.”
잔을 쥔 손가락을 연주하듯 꼼지락대며 세라스가 대답했다.
이안이 짧게 웃음 짓고는 말했다.
“너무 거창하고 상징적인 보상을 생각하시는 것 같군. 나는 그보다는 실용적이고 물질적인 쪽을 선호하는 편이오.”
“아하…?”
탄성을 흘린 세라스가, 생각할 시간을 벌려는 듯 재빨리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며 술을 마신 것도 잠시.
“…소니에르가는, 다양한 귀중품과 유물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슬며시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중에, 성자 대행의 눈에도 드실만한 물건이 있을지도 몰라요. 제 손을 잡아 주신다면 그 비밀 창고로 들어가실 수 있게 손을 써 보겠습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오히려 조심스럽고 신중한 말투였다.
“원하시는 물건을 최소한 하나는 가지고 나올 수 있으실 겁니다. 그 이상은… 저도 확신할 수 없지만요….”
세라스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대답 대신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이안은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정략결혼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지르더니, 이런 걸 더 어려워할 줄이야.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게 그녀가 물질적으로 내걸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 창고에는 황녀조차도 확답을 줄 수 없을 정도의 물건들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황실의 보물 창고를 열어 드리고 싶지만, 그건 제 권한을 벗어난….”
“어쨌든,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제안이군.”
이안이 잔을 놓으며 말을 잘랐다. 세라스가 홱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정말이십니까…?”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세라스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정말 이게 통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럼, 함께 가 주시겠어요?”
“의뢰 내용과 보수를 확실하게 정리하는 게 우선인 것 같소만.”
덧붙인 말에,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신 세라스가 숨을 골랐다.
이내 침착하고 기품있는 얼굴로 돌아온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성자 대행. 저와 함께 입궁해, 아버님을 만나 주세요. 그래 주신다면,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소니에르가의 비밀 창고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자 대행께서 원하시는 물건을 드리겠습니다. 적어도 하나 이상은.”
비로소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황실의 부름.
이름은 같았지만, 목적지도 보상도 게임과는 달랐다. 보상에 물음표가 하나 더 있는 걸 보니, 잘하면 정말 추가적인 보상도 받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이 퀘스트가 생겨 버리는군.’
물론, 그 사실이 이안을 기쁘게 하지는 못했다. 이건 게임이 중반부를 넘어섰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퀘스트였으니까.
동시에 그가 직접 경험했던 부분들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4챕터까지는 아직도 제법 여러 사건이 남아 있었지만.
미지의 영역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원하던 것보다 빨리.’
어쩌면, 이어질 사건들도 그의 예상보다 빨리 일어날지도 몰랐다.
시간을 벌기 위해 미리 해결한 사건들이, 오히려 기폭제의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지금까지를 돌이켜보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 퀘스트를 거절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황자들은 죄다 재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이 황녀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분명 황위 계승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세라스의 언행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가리란 어떤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어쩌면 계승권에서 멀기에 오히려 더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폐하와 나눈 대화의 결과가, 황녀께서 기대하신 것과는 다를 수도 있소만. 그래도 괜찮으시겠소?”
그런 생각들과 달리, 이안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이름을 걸고, 타오르는 여신께 맹세할게요.”
“조금 돌아가게 될 것이오. 육로로 이동할 테니까.”
“다행이네요. 저도 배를 타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멀미를 아주 심하게 해서요.”
난 배가 침몰하면 살아나가기가 어려우니까 싫은 건데.
생각하며, 이안은 퀘스트를 수락했다.
“그렇다면 의뢰는 받아들이겠소.”
“훌륭한 결정이세요…!”
세라스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내뱉었다. 뒤에 선 아스메가 낮게 혀를 차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술까지 벌컥 들이켰다.
이윽고 잔을 내려놓은 세라스가, 기쁨을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로 미소 지었다.
“어려운 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 대행.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이안.”
“……?”
“앞으로 이름으로 부르시오. 의뢰인이시잖소.”
덧붙인 이안의 시선이, 세라스의 뒤에 선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요. 내가 백금룡의 대행자라고 사방에 떠들고 다니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명심하겠습니다. 이안 경.”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페이든이, 곧이어 덧붙였다.
“저도 부탁을 하나 드리자면-”
“가명은 너무 기니까, 그냥 영애라고 부르면 되겠소? 아니면, 공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덧붙인 말에, 페이든이 눈을 깜빡였다. 곧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가 대답했다.
“공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을 감추는 건 그에게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물론이고, 엘리야도 자신이 용의 아이라는 것을 감추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환영할 일이었다.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저쪽도 알아서 노력할 테니까.
“휴….”
그사이 자축하듯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세라스가, 숨을 내쉬며 잔을 내려놓았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듯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고 있었다.
저러다 만취하겠는데.
이안이 심드렁하게 생각할 찰나, 세라스가 덧붙였다.
“그럼, 내일 바로 떠나실까요?”
“모레 떠나야 할 것 같소. 도시에 남은 용무가 있어서.”
“아, 그러시군요.”
멈칫한 세라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이안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는 지금 이미 수행 중인 의뢰가 있소. 그걸 완수하는 게 우선이오. 입궁은, 그 후에 하도록 하겠소.”
“그래요… 영애가 의뢰인이라고 하셨었죠….”
뒤에 선 페이든의 얼굴에도 영문 모를 묘한 긴장이 서리는 가운데, 엘리야를 일별한 세라스가 덧붙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의뢰의 목적지를 알 수 있을까요?”
“제도.”
“네…?”
세라스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페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이 술이 거의 남지 않은 잔을 들며 덧붙였다.
“나는 영애를 제도의 대학까지 모시고 가는 중이었소. 그래서 필립 경도 동행하게 된 것이고. 그러니, 귀하의 의뢰에도 그리 큰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오.”
세라스의 얼굴에, 비로소 허탈한 미소가 번졌다.
“…제도에서 기다리고만 있었어도, 경을 만날 수 있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