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96
296화
“신분 증명은 끝났습니다, 나리. 머무실 저택이 필요하십니까?”
멈춰 선 마차 밖, 경비병의 목소리가 이안의 귀로 파고들었다. 페이든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오가는 이들이 많지 않은 곳으로 한 채 내어주시게. 하루만 묵고 떠날 걸세.”
“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시중을 들 일손도 필요하십니까?”
“넷 정도면 충분하겠군. 바로 따듯한 목욕물과 식사도 준비해 달라 전하게. 아가씨뿐만 아니라 귀빈이 셋 더 계시고 머무는 인원이 총 여섯이니, 목욕물과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해야 할 걸세. 물론, 술도. 금액은 신경 쓰지 말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페이든은 물론 경비병도 이런 식의 대화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
물론 그 사실이 이안에게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아마도 귀족이나 부유한 여행객이 많은 덕분에 만들어졌을, 중앙 특유의 문화에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아마도 이런 게 중앙 대도시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이기도 하리라.
“…….”
술병에 남아 있던 반 모금의 술을 전부 들이켠 이안은, 빈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연스럽게 마차 내부를 다시 눈에 담은 그의 입가에 건조한 실소가 스쳤다.
마차 내부의 무거운 분위기가 도무지 풀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세라스는 물론이고, 필립도 뭔가 고민하듯 눈을 감고 입도 앙다문 채 등받이에 뒤통수를 대고 있었다.
엘리야는 아직도 자신의 공책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한 장문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리라. 한 글자 한 글자 고심하며 꾹꾹 눌러쓰는 손길이 진중했다.
‘뭐, 각자의 짐은 각자가 짊어지는 거지….’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등을 깊숙이 기대앉았다.
그 역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게임에서의 기억들을 다시 한번 되짚으며 곱씹는 시간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이안의 눈빛이 문득 가라앉았다.
‘확실히… 까먹는 부분도 늘고 있단 말이지.’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졌다 해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겪었던 상황이 일어나면 다시 불현듯 떠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물론, 걱정보다는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씁쓸함이 더 클 뿐이었다.
그의 기억이 휘발되는 것보다, 미지의 영역에 도달하는 게 더 빠를 테니까.
예상대로면 앞으로 길어야 일 년 반. 그보다 빠르다면 일 년이면 도달하게 될 터였다.
‘그 전에, 레벨이라도 최소한 두어 개는 더 올려야 하는데….’
사실 진짜 걱정스러운 건 이쪽이었다.
게임일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고, 만약을 대비한 자원도 어느 정도 남겨 두고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 헤쳐나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전혀 확신할 수 없었다.
“아, 저기 오는군요.”
그때, 밖에서 다시 병사의 목소리가 번졌다.
“하루 동안 시종장으로 부리시면 될 겁니다. 저택으로 안내할 테니, 따라가십시오.”
“수고하시게.”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수많은 인기척들이 가까워지자, 이안은 창문을 밖을 볼 수 있을 정도로만 열었다.
부슬비 내리는 우중충한 거리의 전경이 드러났다.
날씨가 이렇지 않았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번화하고 생기 넘쳐 보였을 도시였다. 물론,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그저 날씨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아까 그게 대체 뭐였는지, 들은 게 있나? 설마, 정말 검은 벽이….”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여기서 전선까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 보지 않아서 알지 못하는 거지.”
길을 오가는 이들 대부분이, 몇 시간 전 일어났던 괴현상에 대해 쑥덕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 벌써 십 년도 넘게 지났군. 검은 벽이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거야. 분명해.”
“듣자 하니 변방 전 지역이 끔찍한 꼴이 되었다던데. 그 영향일 수도 있잖나.”
진실에 근접한 결론을 내린 이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다들 추측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긴. 아무리 제국이라도, 정확한 정보는 황족과 소수의 지식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앞으로도 그렇겠지.’
이 세계의 인간들도 지식과 정보가 곧 힘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런 세계이기에 더더욱 잘 아는 걸지도 몰랐다.
“…제도가 바로 지척인데도, 생각보다 훨씬 번화한 도시로군요.”
필립의 목소리가 번졌다.
그 역시 이안처럼 창문을 살짝 열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숙소에 도착할 테니, 그 전에 분위기를 좀 풀어 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세라스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로 가기 위해 먼 길을 온 여행객이 들르거나, 사정상 제국에 자리 잡지 못한 이들이 대신 머무는 도시니까요.”
“자리 잡지 못한 이들이요?”
세라스가 살짝 벌어진 창문 틈으로 시선을 돌렸다.
“듣기론, 제도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사업이나 거래를 이곳에서 대신하기도 한다더군요. 제도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중개인들도 여럿이라고 하고요. 그들은, 제도에 터를 잡은 자들이죠.”
“…제도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인 셈이군요.”
“괜히 제도에 사는 이들이 자신들을 제도 사람이라 칭하는 게 아니랍니다.”
세라스의 입가에 자부심 같기도, 비웃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미소가 스쳤다.
“설사 자유민이라 할지라도, 다른 지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회와 권리를 가지고 있죠. 그게 제도가 끝없이 번성하고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럼… 모든 이들이 제도로만 모여들게 되지 않겠습니까?”
“제도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엮인 곳입니다. 타지에서 온 이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정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물론, 물리적으로도 쉽지 않고요. 제도라고 빈 땅과 건물이 남아도는 건 아니거든요.”
“그보단, 의도적으로 제도의 인구를 통제하고 있는 것 아니오?”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세라스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모두가 살 수 있다면 오히려 가치가 떨어질 테니까.”
“…이젠 놀랍다는 말이 오히려 무색하군요. 맞습니다.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어야, 상징성과 가치가 유지되는 법이죠. 제도는 처음이신 것으로 아는데. 제대로 이해하고 계시네요.”
내가 원래 살던 세상에서도 많이들 쓰던 방식이거든.
속으로만 덧붙인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이는 사이, 세라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도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능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녀의 시선이 엘리야와 필립을 차례로 훑었다.
“앞에 계신 두분 처럼요. 물론….”
묘하게 떨떠름한 필립의 얼굴을 잠시 응시한 그녀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 뿌리는 황실과 교단에 있습니다. 제도가 대륙의 중심이라면, 황실과 교단은 제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죠.”
“많이 아픈 심장이군….”
이안이 농담처럼 읊조렸다. 하지만 폐부를 찔린 듯 멈칫한 세라스가, 이윽고 입술만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예견된 재앙 앞에서는 불협화음 없이 함께 뛰게 될 겁니다.”
“부디 그러길 바라겠소.”
“…그, 그래서, 정말 황궁과 대교회가 제도를 양분하고 있습니까?”
일말의 기대도 느껴지지 않는 이안의 대답에, 조금 어색한 헛기침을 흘린 필립이 재빨리 덧붙였다.
세라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양분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군요. 교황령은 제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역 중 하나이지만, 결국 제도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반면에 황궁은 실질적으로-”
이어지는 세라스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제도 타령보다 차라리,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밖의 목소리들이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어떻게든 제도에 집을 구해야겠군.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러느니 이곳에 확실히 눌러앉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지 않겠나?”
“여긴 아무리 제도와 가깝다 해도, 제도는 아니지.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자네도 알잖나.”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지 못하는 이들조차, 어쨌건 머지 않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외곽 지역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로 피신하려 하고 있었다. 제도가 무너지는 일은 없으리라 확신하는 것이다.
하긴, 아르케아스조차 제도가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되리라 확언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에선, 대륙에서 안전한 곳은 제도 밖에는 남지 않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대체 검은 벽을 넘은 뒤에,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걸 확인하기 위해 검은 벽을 넘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안은 황제의 명령을 수행한 뒤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오리라 결론 지었다.
그때는 게임에서 그랬듯,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그들이 줄 퀘스트들이 잔뜩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만큼 위험하겠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계속 살아남으려면.’
내키지 않더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역천룡을 상대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검은 벽을 넘어야 하는 순간도, 끝내는 오게 될 테니까.
그 시기가 생각만큼 멀지는 않았으리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거슬리게 마음 한구석을 긁어댔다.
***
숙소는 페이든이 요청한 대로 도시 외곽의 2층짜리 저택이었다.
건물에 비해 낮은 담장과 좁은 마당을 가진, 이제 꽤 전형적인 느낌이 드는 제국식 저택이었다.
좌우로도, 그리고 인근에도 비슷하게 생긴 저택이 여러 채 있었다.
이 도시는 다른 곳보다 더, 여행객을 상대로 한 숙박업이 발달해 있었다.
“식당에서 다시 만나요. 경.”
“각자 알아서들 합시다. 굳이 억지로 시간을 맞출 필요는 없잖소.”
이안 일행과 황녀 일행은 2층을 반으로 나눠 사용하기로 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무장부터 해제한 이안은,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이 저택은 욕실만 무려 세 개였다. 중앙의 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그나마 가장 목욕을 즐기는 자들인 덕분이었다.
돌을 깎아 만든 욕조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은은한 꽃향기도 번졌다. 물에 향유를 조금 섞은 것이리라.
중앙 지역에 접어들고서야 종종 접하게 된 호사였다.
“따듯한 물이 더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냉큼 옷을 벗어 던진 이안이 욕조에 몸을 담그자,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공손하게 말했다. 아마도 그가 이안 일행을 담당하는 모양이었다.
눈을 감은 채 간만의 열기를 만끽한 이안이, 입가에 다소 나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은 어쩌고들 계시오?”
“영애께서는 방금, 시녀 분과 함께 욕탕으로 향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각자의 방에 계신 것 같습니다만. 확인해 보고 올까요?”
“됐소. 뜨거운 물은 더 준비해 주시오.”
색이 변하고 있는 물을 슬쩍 내려다본 이안이 덧붙였다. 물론, 이래도 악취는 번지지 않았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미리 준비를 시작해 두고는 있었습니다만….”
“난 목욕부터 끝내겠소. 다른 이들에게는, 기다리지 말고 먼저들 먹으라고 전해 주시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필립 경에게 이야기하면, 필요한 물품들을 적은 종이를 줄 것이오. 목욕물을 준비하고 나면, 심부름할 사람을 찾아 전해 주시오.”
“예. 그럼, 뜨거운 물부터 준비해 오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시종이 몸을 돌렸다. 이안이 다시 입을 달싹인 건 거의 동시였다.
“하나만 더 묻겠소.”
“예. 말씀하십시오.”
멈칫한 시종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혹시, 이 저택에 지하 공간이 있소?”
“창고로 사용하는 작은 창고가 있긴 합니다만….”
“어디로 가야 들어갈 수 있소?”
“주방 뒤편 바닥에, 문으로 막아 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시종이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선선히 대답했다.
이안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소. 가 보시오.”
꾸벅 몸을 돌린 시종이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욕조 가장자리에 얹어져 있던 이안의 오른손 손가락 사이로 꾸물대는 움직임이 번졌다. 늪지의 원한이었다.
뱀의 형태로 돌아온 녀석은, 욕조 안으로 퐁당 뛰어들어 물속을 유영하듯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느긋하게 몸 곳곳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이안이, 이윽고 슬며시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지하실이 있단 말이지….’
혹시나 싶어 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 그는, 검은 벽의 파편을 꺼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신들의 눈을 피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