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97
297화
물론, 오늘은 굳이 지하가 아니라도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이미 밤인 데다가, 하늘에 먹구름까지 자욱하지 않던가.
밤은 루 솔라가 잠드는 시간이었고, 경험상 먹구름은 신들의 영향력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가장 안전한 방식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면 나도 명예 타락자 아닌가.’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어쨌건, 이게 굳이 이 도시를 들른 가장 큰 이유였다.
제도에서 검은 벽의 파편을 꺼내는 건 너무 위험성이 높았다. 제도는 말 그대로 신들의 축복을 받은 도시가 아니던가.
‘돌발 상황이라도 생기면 혼돈력을 흡수해야 하는데. 거기서 그랬다간 신들에게 바로 들키겠지.’
그러니 사실상, 오늘 밤이 제도에 도착하기 전의 마지막 기회였다.
“정복이 어서 도착하면 좋겠어요. 입으신 걸 보고 싶거든요.”
문틈으로 엘리야의 목소리가 스친 건 그때였다. 저녁 식사를 위해 방을 나서는 모양이었다.
“내일 오전이면 볼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요.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는데….”
“염려 마십쇼. 그러실 겁니다. 무뚝뚝해 보이셔도, 표현이 아예 인색한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목소리가 멀어졌다.
이안의 입꼬리는 어느새 다시 말려 올라가 있었다. 좀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미소였다.
‘짐을 풀자마자 왜 시종부터 찾나 했더니… 내 정복을 주문한 거였나.’
엘리야도 작별 선물을 준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안이 준비한 건 물론, 검은 벽의 파편이었다.
확인해 보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그는 파편을 엘리야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굳이 제도에 들어서기 전에 파편을 살펴보려는 것도 그래서였다.
물론, 엘리야 개인에게 주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위험성을 교육하고 파편 역시 하급품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 위험했다.
대신 추천서와 함께 동봉해서, 대학의 공식적인 연구 자료로 등록하게 할 계획이었다.
검은 벽의 연구뿐만 아니라, 엘리야의 입지를 공고하게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만약 운이 좋다면….’
이안이 검은 벽을 넘는 것보다 먼저, 벽을 안전하게 무너뜨릴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
나른하게 풀려 있던 이안의 미간에, 문득 다시 힘이 들어갔다.
영문 모를 불쾌감이 뇌리를 스치면서, 신경이 멋대로 바짝 곤두섰기 때문이다.
오감. 특히 청각이 예민해지면서, 욕실 밖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멋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찰랑거리는 물소리. 세라스의 나른한 목소리와 아스메의 속삭임. 종자를 위한 기도문을 읊는 중년 기사의 피로한 목소리. 벌컥 열린 문의 경첩에서 번지는 쇳소리와 저벅대는 발소리들. 여럿의 숨소리.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시종들의 다급한 발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멋대로 커졌다가 작아지며, 한순간에 이안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곧 초점이 맞듯, 가장 거슬리는 소리만이 남았다. 대문으로 들어오는 발소리와 숨소리들.
“공간을 확보해. 소란 피우지 말고, 시종들은 안에 가둬 둬라.”
정체 모를 남자의 목소리까지 귀에 담은 이안은, 비로소 낮은 한숨과 함께 욕조에서 일어섰다.
‘이제야 좀 쉬는 것처럼 쉬어 보나 싶었는데….’
불청객들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발소리로 봐서는 스물 안팎. 제대로 무장한 듯 쇳소리도 들렸고, 전신 판금 갑옷 특유의 묵직한 소리를 내는 자도 있었다.
몸의 물기를 닦아내는 사이, 이안의 신경이 곤두설 때만큼이나 빠르게 가라앉았다.
“당신들 뭡니까? 거기 멈추십시오. 더 다가온다면-”
필립의 싸늘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더는 소음이 귀를 파고들지 않았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방금 그건 육감이 만들어낸 반사적인 반응이었으니까. 위기감과 집중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선 길게 유지할 수 없었다.
어쨌건, 무력 충돌이 이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육감이 바로 다시 경고를 보냈을 터였다. 하긴. 뒤에 엘리야가 있을 테니, 필립도 무작정 싸울 수는 없을 터였다.
스륵-
이안이 재빨리 셔츠와 바지를 걸치는 사이, 늪지의 원한이 다시 손가락에 감겼다.
바지의 허리춤을 대충 묶은 이안은, 문 옆에 기대 두었던 진은 강철 장검을 검집째 집어 들며 방을 나섰다.
복도는 조용했다.
아직 황녀 일행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왼손의 검집만 콱 움켜쥔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그들이 이상함을 느끼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안은 복도 끝, 계단이 아래로 이어지는 난간 앞에 도착하고서야 멈춰 섰다.
“…….”
계단 아래. 전신의 벽면을 따라 병사들이 나란히 도열 해 있었다. 이안이 들은 발소리들의 정체이기도 할 터였다.
다들 사슬 갑옷 위에 제국 국기가 새겨진 검은 서코트를 걸쳤고, 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쇠뇌를 든 채였다. 그들은 이안이 등장한 순간, 놀란 기색도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라도 쇠뇌를 겨눌 태세였지만, 이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정규군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장내를 훑었을 뿐이었다.
이들을 이끌고 온 게 누구인지 알아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대문 옆.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마련된 탁상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그를 몸으로 막듯이 등지고 선 전신 판금 갑옷 차림의 기사였다.
갑옷 표면에 황금을 덧씌워 만든 듯한 문양이 빼곡했다.
실전적이기보단 장식품처럼 느껴지는 화려한 갑옷이었다. 늑대 머리를 형상화한 듯한 안면 가리개 역시 멋스러웠다.
기사의 곁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회색 정복을 걸친 중년인이 서 있었다.
마법사처럼 다소 마른 얼굴에,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기른 자였다.
그리고 둘 다, 묘한 경계심이 묻어나는 눈길로 이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내가 무단 침입한 줄 알겠네.’
헛웃음을 삼키며, 이안은 걸음을 옮겨 계단으로 발을 들였다.
저 둘의 뒤편, 의자에 앉은 작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사에 가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검은 두건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기까지 했다.
처저적-
동시에 병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쇠뇌를 겨눴다.
물론, 이안은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지 않았다.
지잉-
그저 백금 방벽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오른손으로 진은 강철 장검을 뽑아 들었을 뿐이었다.
“……!”
“……!”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그건 기사의 곁에 선 콧수염 중년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을 받은 기사가 재빨리 팔을 들었다.
병사들이 이안에게 겨눈 쇠뇌를 내리는 가운데,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혹, 저 위대한 분의 대행자이신 이안 호프 경이십니까?”
“나리, 오셨습니까? 다들 당장 무릎을 꿇고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
대답은 이안이 아니라 계단 옆에서 터져 나왔다.
이안은 몇 걸음을 더 내려가서, 계단 옆으로 이어진 복도를 돌아보았다.
병사들과 마주 선 필립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그는 병사들이 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투구는 물론이고 검과 방패도 위에 두고 온 모양이었지만, 어쩄건 나머지 갑옷은 걸친 상태였다.
저 상태로도 마음만 먹는다면, 병사들을 전부 때려눕힐 수 있으리라.
“그리고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히시오. 이런 무례한 방식을 선택한 합당한 해명도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오!”
덧붙인 필립이 이안 쪽을 바라보았다. 표정과 눈빛을 보아하니, 이안이 허락만 하면 당장 죄다 때려눕혀 버릴 기세였다.
슬쩍 고개를 저은 이안이, 뒤이어 옆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식당의 엘리야를 지키라는 의미였다.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순순히 뒤로 물러나는 사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성자 대행.”
시원한 목소리가 번졌다. 탁상 앞에 앉아 있던 검은 망토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말투와 목소리만으로도 꽤 시건방진 젊은 귀족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콧수염 중년인과 황금 갑옷 기사가 좌우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동시에 남자가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그 아래로 드러난 잘 다듬어진 금발을 본 순간,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역시, 이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 교단 아니면 황실이지.’
또 다른 황자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세라스와는 달리 신분을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긴. 그러니 병사들을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거겠지만.
“이들은 그저, 저를 경호할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성자 대행이나 일행분들을 위협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태연하게 내뱉으며, 황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진 건, 황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 때문이 아니었다.
‘이 새끼… 혹시?’
그의 다소 날카롭고 건방져 보이는 얼굴이, 어딘지 묘하게 낯이 익어서였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황자가, 이윽고 짧은 탄성을 흘렸다.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우측 뒤편에 있던 콧수염 중년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마도 그가 황자의 개인 시종인 모양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안을 올려다보며 허리를 꼿꼿이 편 그가 말을 이었다.
“루 솔라의 신도이자, 황궁의 고귀한 네 번째 별. 펠릭스 아스트레이아 전하이십니다.”
가슴 앞에 한 손을 얹은 펠릭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슬쩍 고개를 숙였다. 벌어진 망토 사이로, 황금 실로 자수를 화려하게 수놓은 보라색 정복이 드러났다.
그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역시, 맞았네. 그 새끼.’
게임에서 그를 찾아왔던 황자였기 때문이다. 별 볼 일 없는 보상을 선심 쓰듯 던져 주며 그를 별궁으로 보냈던, 바로 그놈.
그때와 달리 지금은 신분을 감추지 않은 데다, 대놓고 아랫사람 부리듯 오만하게 굴지는 않고 있긴 했지만.
특유의 시건방진 표정과 말투는 여전했다.
물론 지금은 그저, 이안의 미소를 더 진해지게 할 뿐이었다.
그의 표정을 오해한 듯, 펠릭스의 입가에 맺힌 미소도 짙어졌다.
“내일이면 바로 떠나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시오.”
이안은 대답 대신 백금 방벽을 거둬들이고, 왼손에 쥐고 있던 검집에 검날을 되돌렸다.
“감사합니다, 성자 대행.”
고개를 까딱인 펠릭스가 더 활짝 미소 지었다.
“황금처럼 빛나는 신성한 방패를 사용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비유적인 표현인 줄 알았습니다만. 덕분에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군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안은 주절주절 이어지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뒤편의 복도에서 연달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소리가 이어지자,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펠릭스가 공치사를 멈췄다. 이안이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덧붙였다.
“날 왜 찾아오셨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펠릭스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일 황자 전하의 뜻을 대신해, 성자 대행을 황궁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
세라스는 머리의 물기조차 제대로 닦아내지 못한 채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그건 뒤따르는 아스메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갑옷조차 벗지 않았던 페이든만이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사과할 필요 없어요, 경.”
페이든의 말을 자르며, 세라스는 걸음만 재촉했다.
그를 책망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이 된 것뿐이니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너무 늦지는 않았을지가 걱정될 뿐이었다.
“나는 이미 황녀와 동행하고 있소만.”
복도를 타고 번지는 이안의 목소리에, 세라스의 굳은 얼굴에 비로소 옅은 안도가 번졌다.
물론, 잠깐의 안도에 불과했다. 그저 최악만 면했을 뿐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지켜본바, 이안은 빈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조건만 충족된다면 얼마든지 다른 이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와의 계약을 독점하려면 그만한 추가적인 조건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리라.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어진 목소리에, 세라스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그녀의 이복형제인 펠릭스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 황자 파벌의 삼인자쯤 되는, 오만하고 덜떨어진 녀석.
하지만 동시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이기도 했다.
일 황자는 장자로 타고났다는 것 외엔 장점이 없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자였지만, 어쨌건 덕분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제시할 수 있는 보상 역시 막대하리라.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라스는 걸음을 늦췄다. 아스메가 페이든이 영문도 모른 채 속도를 줄이는 가운데.
“아마도 황녀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어 성자 대행을 찾아왔다고 전했을 겁니다.”
펠릭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성자 대행께서는 속고 계신 겁니다. 폐하께서는 그런 칙령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황녀가 제안한 것이죠.”
“그래서?”
“일 황자께서는 성자 대행께선 그런 농간에 놀아나서는 안 되는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황실이 아직도 성자 대행의 노고에 아직 제대로 된 감사조차 표하지 않은 것 역시, 큰 잘못이라 덧붙이셨고요.”
세라스의 한쪽 입꼬리가 싸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어느새 계단으로 이어진 난간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그녀가 몸에 걸친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사이, 펠릭스가 덧붙였다.
“물론, 말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금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와 감사의 인사가 모두 담긴. 합당하며 명예로운 보상을-”
“약속드렸지. 물론.”
자연스럽게 말을 자르며, 세라스가 난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 한복판에 선 이안과 전실을 둘러싼 무장한 병사들. 그리고 이안을 올려다보고 있던 펠릭스 일당의 모습이 한눈에 펼쳐졌다.
“나는 정당한 계약을 통해 성자 대행을 모시고 있는 거거든.”
눈동자만 굴려 세라스를 올려다본 펠릭스가,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정당한, 계약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