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03
303화
“북부로…?”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대답을 한 순간 잠에서 깨어나서, 왜 그런 선택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세라스가 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까 복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눈빛이었다.
“물론, 추론은 할 수 있죠. 그런 판단을 내린 건, 결국 저 자신이니까요.”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해 보시오.”
“다른 황자들은 동부 전선으로 출진할 게 분명합니다. 가장 핵심적인 전선이기도 하지만, 남부는 내해를 건너야 하고 북부의 겨울은 혹독하기로 악명이 높으니까요.”
“그래서, 경쟁자들과는 다른 결정을 종용하셨을 거란 말씀이시군.”
“맞아요. 아마, 그게 첫 번째 이유일 겁니다.”
세라스의 눈을 마주 보며, 이안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을 다문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엘리야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게 북부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아니지 않나요? 중앙과 남부도 있잖아요. 중앙을 택한다면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고, 남부로 가는 것 역시 북부나 다름없을 텐데요.”
“북부를 택하는 것보다 단점이 크니까.”
이안이 선선히 입을 열었다.
“중앙에 머문다면 백성들의 지지는 얻겠지만, 황실과 교단의 눈에 띄지는 않겠지. 게다가 남부는 단일 세력으로 운용되는 전선이 아니야. 상대적으로 이종족의 비율이 훨씬 높지. 새로운 지지 세력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거다.”
물론, 그는 게임에서도 남부 전선으로는 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주워들은 이야기는 많았다.
실제로는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지만, 북부가 그렇듯 편의상 붙은 이름이라던가. 황야 요새들 너머에는 대사막이 펼쳐져 있다던가. 총지휘관은 인간이지만 휘하에 이종족 세력들이 훨씬 많다던가 하는, 자질구레한 설정 놀음들.
“정확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세라스가 엘리야를 일별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북부 전선의 군단은 강인하기로 이름이 높죠.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동부 전선보다도 안전할 겁니다. 게다가 이안 경께서 말씀하셨듯, 자치령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건 오라버니가 하기에 달려 있지만….”
그녀가 다시 이안을 바라보며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제가 돕는다면, 그들 사이에 융화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는 다른 황자들과 달리, 북부의 초인과 친분이 있으니까.”
그게 효과가 있는 건 잠깐 뿐일 텐데.
생각하며 낮게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결국, 여러모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셨다는 건데….”
“…네. 그런데도, 잘못된 선택이었던 겁니다.”
세라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아마 이안에게 조언을 요청한 것도 그래서이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었을 테니까.
‘사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고.’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에게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그와 백금룡의 활약 덕분에, 북부는 타후므리트의 공격을 최소한의 피해만으로 막아내지 않았던가.
게다가 지휘관인 루카스에게 검은 벽의 침식이 머지않았으리란 사실까지 알려 주고 떠났었다. 루카스는 그의 조언을 흘려들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심, 게임에서처럼 전선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여겼건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결과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내부적인 문제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게임일 때보다 침공하는 마물들이 더 많고 강해지는 걸지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뤄 봐선, 둘 다일 가능성도 차고 넘쳤다. 술잔을 전부 비운 이안이, 다시금 술병을 집어 드는 사이.
“아무리 생각해도, 나머지 선택지들은 북부만큼 매력적이지 않네요. 어디까지나 황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를 목표로 한다면요.”
턱을 괸 채 고심하던 엘리야가 읊조렸다.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경께 도움을 청한 겁니다. 저보다 폭넓은 시야와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잠시 머뭇댄 그녀가, 이윽고 이안이 내려놓은 술병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는 혈통의 능력만큼이나 대단한 무재를 타고났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소 자존심이 강하고 성격도 급한 편이지만… 다른 이복형제들만큼 오만하고 편협하지는 않죠.”
그녀가 자신의 잔에 맥주를 채우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곁에는 저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만용으로 일을 벌이다 불행을 자초하는 일은, 아마도 어딜 가더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술병을 내려놓은 세라스가, 손에 쥔 술병을 휘휘 돌리며 생각에 잠긴 이안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씀이든 가감 없이 해 주세요.”
이안은 내심 콧방귀를 흘렸다.
그가 보기에 황자의 성격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게임에서와 다를 바 없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면, 솔직히 어떤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그다지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어쩌면 북부를 택하지 않았더라도 예지몽을 꾸게 되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최선이 아니라, 최악과 차악을 가려내는 문제인 것이리라.
“황자가 제시한 선택지가, 귀하의 앞에 놓인 모든 갈림길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소?”
이윽고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말했다. 초조하게 맥주를 홀짝대던 세라스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아예 다른 길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적어도 하나가 더 있다는 건 확실하잖소.”
“그게 뭐죠?”
“결정을 보류하는 길.”
“……?”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세라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안을 잠시 바라본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리라 생각하시는 거군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군.
생각하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경쟁에 등 떠밀리듯 결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오. 폐하의 말씀이 맞소. 전선에 구멍이 뚫릴 정도의 상황이라면, 그런 소꿉놀이 같은 다툼을 신경 쓰는 건 어리석은 짓이오.”
“…….”
“가진 능력을 총동원하더라도, 확실한 승리와 성과를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이미 제국의 존망이 걸린 문제라는 것이오.”
저번과 달리, 세라스는 이안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녀는 전선이 무너질 리 없다고 자신하고 있지 않았던가.
“나라면 보다 확실한 정보들이 손에 들어올 때까지 출정을 미룰 것이오. 대신 휘하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만반의 준비가 될 때까지 훈련하고, 물자를 비축하겠지.”
이안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덧붙였다.
“중요한 건 경쟁자들보다 빨리 움직이는 게 아니라,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거잖소.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국을 품을 그릇인지도 입증할 수 있겠지.”
말을 마친 이안이 천천히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는 이제 미지근하다 못해 맹맹했다.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세라스가,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합당한 말씀입니다. 생각할수록 더 그렇네요. 아버님은 처음부터 정답을 제시해 주셨던 거예요. 자식들이 해석을 잘못했을 뿐이죠.”
이른 아침이 아니라 늦은 밤이라 해도 믿을 만큼 피곤한 목소리로 말한 세라스가,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하지만 오라버니가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황실 내부에서 겁쟁이라는 말을 듣게 될 텐데. 아마도 그걸 참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그건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술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냥 내 의견을 말했을 뿐이오. 귀하가 부탁한 대로, 가감 없이.”
이 이상의 도움을 바라지는 말라는 의미였다.
사실, 제 코가 석 자인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전선으로 가게 될 운명이지 않던가.
세라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적어도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겠네요. 제가 꾼 꿈이 현실이 되려면 적어도 두 달은 걸릴 테니까. 돌아가면, 오라버니를 잘 설득해 봐야겠어요.”
“돌아가서도 바쁘시겠군.”
이안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세라스가 옆자리의 아스메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경을 모시고 돌아가면 많은 것들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과제가 더 늘어난 느낌이에요.”
작게 한숨 쉰 세라스가, 뒤이어 자세를 바로 했다.
감사합니다, 경. 생각지 못한 길을 열어 주셔서. 경의 조언은 가슴에 새겨 두고 방법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됐소.”
대답하며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켠 이안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다, 엘리.”
덧붙인 그가 일어서는 일행들을 남겨둔 채 식당 입구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앞을 가로막고 선 필립의 뒷모습이 드러났다. 필립이 그를 돌아보았다.
“말씀은 다 나누셨습니까?”
“그래. 떠날 채비를 하자, 필립. 해가 지기 전에는, 제도에 도착하고 싶으니까.”
이안의 말에 순간 멈칫했던 필립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나리.”
일행이 모든 채비를 끝내고 내려왔을 때, 제도에서 온 사병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포로들과 시체, 마차는 물론이고 전투의 흔적까지도 전부 지워진 채였다.
어젯밤의 흔적이라고는 전실의 부서진 나무 바닥이 전부였다.
그 옆에 금화가 든 주머니를 놓아둔 세라스가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바로 도시를 벗어나 나아갔다. 자욱한 먹구름이 점점 옅어지고, 그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얼굴을 드러낸 이후로도, 계속.
마차는 끝도 없이 이어진 새하얀 성벽 한복판, 활짝 열린 성문 앞에 도착하고서야 멈춰 섰다.
세상의 중심. 제도였다.
***
새하얗게 이어진 구름이 푸른 하늘 아래를 흘러갔다. 하늘 구석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태양이 널찍한 대로와 그 한복판을 지나치는 마차들. 가장자리를 오가는 다양한 종족의 행인들을 비췄다.
“…오래 떠나있던 것도 아닌데,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맞은 편에 앉은 세라스가 읊조렸다. 이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마차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넓고 곧게 뻗은 대로 사이로 크고 작은 갈림길들이 바둑판처럼 이어졌다. 그 사이사이를 빈틈없이 채우며 지어진 건물들은, 행인들의 종족과 복식만큼이나 가지각색이었다. 대조적으로 잘 정돈된 구획과 이질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딱 한나절 거리군요.”
옆자리의 필립이 입맛을 다시며 읊조렸다. 그 역시 창밖으로 펼쳐진 제도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지만. 표정이 마냥 밝지는 않았다. 이곳이 이번 그의 여정의 종착지이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여길, 왜 제국의 심장이라 부르는지는 확실히 알겠군.”
이안이 덤덤하게 읊조렸다.
게임에서도 발을 들인 적이 있었지만, 현실이 된 제도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화려했다.
보이는 모든 곳이 도시였고, 동서와 남북으로 도시를 가르는 대로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처럼 뻗어 있었다.
중앙의 대도시를 적어도 세 개는 합쳐야 나올 법한 규모였다. 축복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구석구석까지 밝은 느낌이어서,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쉽네요. 여유가 있었다면, 한동안 이안 경을 제도에 모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세라스가 덧붙였다. 이안은 입가에 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은 그 역시 그럴 생각이었었기 때문이다. 중앙의 대도시들을 돌아본 뒤에, 적어도 한 달 이상은 머물면서.
“뭐, 기회가 또 있겠지.”
제도에 다시 발을 들이는 건, 검은 벽의 침식이 일어난 뒤가 되리라. 그때도 그다지 여유롭지는 못할 터였다. 검은 벽을 넘어야 할 순간이 머지않았을 테니까.
“곧 해도 질 텐데, 하루 정도는 이곳에서 머물고 헤어져도 되지 않을까요?”
잠깐의 침묵 끝에 필립이 말했다.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필립 경의 생각에 동의해요. 오늘이 지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잖아요.”
이안이 낮게 웃음 지었다.
“괜히 피곤한 일만 생길 수도 있어. 불청객들 때문에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상황은, 겪고 싶지 않아. 그게 아니라도….”
장내를 돌아본 그가 필립과 엘리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미 정해진 일을 미뤄 봐야, 미련만 더 커질 뿐이야. 적어도 너는 잘 알고 있을 텐데. 필립.”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만.”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한 필립이, 애써 지은 게 분명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마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게다가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나리의 이런 멀끔한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의 시선이 이안의 전신을 장난스럽게 훑었다.
지금 이안은 푸른 빛이 도는 제국 정복을 걸치고 있었다. 엘리야의 작별 선물이었다.
황제를 알현하는 데에 입을 옷이기도 했다. 세라스는 제도의 정문을 통과함과 동시에 경비병을 부려, 황궁으로 연락을 보냈다.
확실한 건 황궁에 발을 들여야 알게 되겠지만, 아마도 곧바로 황제를 만나 볼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건 가장 마지막 일정이었다.
“…거의 도착한 것 같군요.”
세라스의 목소리가 이어진 건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엘리야와 이안의 정복에 대한 잡담을 나누던 필립이 멈칫하는 가운데, 이안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로 저 너머로 도시 내부를 가르는 성벽이 보였다. 외부의 성벽만큼 높지는 않아서, 그 너머의 건물 지붕들이 훤히 드러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유독 높다랗게 솟은 뾰족한 첨탑과 그 위의 장식물이었다. 루 솔라의 상징인 황금색 원. 대교회였다.
“…거참 성스럽군.”
이안의 읊조림에 미소지은 건 세라스뿐이었다. 필립과 엘리야는 말문이 턱 막힌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마차가 길의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교황령은 필립 혼자 들어서야 했다. 다른 이들은 상관없었지만, 황녀인 세라스는 미리 통보하지 않으면 발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마차가 멈추자 한순간 장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누군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이안이 마차 문을 열었다.
“작별 인사는, 내려서 나눕시다.”
덧붙인 그가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걸음을 옮기는 그의 시선이 교황령으로 이어지는 성문과 그 주위를 훑었다. 사제복처럼 새하얀 옷을 걸친 경비병들 사이로 행인들이 자유롭게 오갔다.
그 뒤편의 제도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멈춰선 이안이, 다시 마차 쪽을 돌아보았다.
차례로 내린 아스메와 세라스, 엘리야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이안의 뒤편에 설 찰나.
철그럭-
마지막으로 필립이 마차에서 내렸다. 어느새 다시 투구를 눌러 쓴 그는, 안면 가리개까지 올려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였다. 전신 판금 갑옷 역시 이음매를 제대로 다시 조인 게 분명했다.
부위마다 형태와 크기가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흠잡을 곳 없는 성기사였다.
‘대교회에 들어가는 게 신경이 쓰이긴 하나 보군.’
내심 생각하는 사이, 필립이 이안의 앞에서 멈춰 섰다.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나리.”
필립이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새끼, 진지하긴. 옅게 미소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사고 치지 말고, 의식 잘 끝내라. 내 임무를 수행한 뒤에는 네가 원하는 길을 가. 그게 내 두 번째 명령이니까.”
“…주군.”
내뱉은 필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주먹을 꾹 움켜쥔 것도 잠시.
스릉-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안이 뭐라 덧붙일 틈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은 필립이, 검 끝이 땅에 닿도록 자루를 고쳐 쥐었다.
“비록 한동안은 곁에서 모실 수 없게 되었으나, 다시 저를 필요로 하시는 순간이 온다면 그 어떤 순간이라도. 그 어디에서라도 다시 주군의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필립의 안면 가리개 사이로 결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는 찬란한 여신께서 지켜보시는 아래 이루어진 맹세이니, 제게는 제국법보다 우선할 권리가 있으며. 교리로도 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굳이 뭐 맹세씩이나….”
웃음을 삼키며 읊조리던 이안의 목소리가 순간 잦아들었다.
무릎 꿇은 필립의 전신으로 한줄기 서광이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