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05
305화
“……!”
엘리야가 숨을 들이켰다. 세라스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그러니 영애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이오. 그로 인해 영애의 연구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귀하와 나의 관계에도 차질이 생길 테니까.”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리며 말한 이안이, 세라스와 아스메를 번갈아 일별했다.
“이 자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밝히는 사실이오. 그러니, 비밀도 지켜 주시리라 믿겠소.”
소문이 난다면 너희를 범인이라 생각하겠다는 의미였다.
“맙소사….”
비로소 세라스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번졌다.
“경의 대자라니. 괜한 호기심을 부렸다가 더 큰 궁금증만 남았군요. 하지만 더 묻지는 않을게요. 또 어떤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올지, 조금 겁나기 시작했거든요.”
어차피 이 이상은 말해줄 생각도 없었거든.
이안이 생각할 찰나, 엘리야가 다시 그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손길이 좀 전보다 묘하게 더 정성스러웠다.
“…그렇다고는 해도, 영애의 후원자로 이름을 올리는 건 여전히 허락해 주시는 거겠죠?”
세라스가 덧붙인 건 그때였다. 이안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더욱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것까지 상관할 생각은 없소. 어차피, 전하만 영애를 후원하시는 건 아니잖소.”
“아. 그러네요. 육각 연맹이 있었죠. 흠… 그래요. 나쁘지 않네요. 그들과의 대외적인 접점으로 삼기에 아주 자연스러워요. 아. 물론, 영애가 사이에 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염려 마세요. 경.”
세라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일 찰나, 마차 바닥이 조금 더 덜컹대기 시작했다.
아마도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접어든 것이리라.
엘리야가 손을 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다 됐어요. 올라오세요.”
이안이 냉큼 다시 의자로 올라왔다. 엉덩이가 조금 아파지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멋대로 뻗쳐 있던 그의 머리는 어느새 깔끔하게 눌려 뒤로 넘겨진 채였다.
새삼스러운 눈길로 이안을 바라보던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이 조금 더 날카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훨씬 보기 좋네요. …확실히.”
“또 청혼할 생각이시면 넣어 두시오. 나도 자꾸 거절하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아서 말이오.”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인 말에, 세라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아셨나요? 마침, 한 번 더 여쭤보려던 참이었는데.”
“이제 슬슬 귀하의 머릿속이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오.”
피식 웃으며 대답한 이안이, 우측의 창문을 열며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바닥으로 내려와 다시 신발을 신은 그녀는, 의자에 얹어 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 큰 가방도 아니건만. 저 안에는 이안이 직접 검열한 마법서들은 물론, 검은 벽의 잔재가 담긴 목함과 육각 연맹의 휘장까지 전부 들어 있었다.
‘저건 언제 또 저렇게까지 정리해 둔 거람….’
내심 감탄하며, 이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대로 다리 위였다.
어느새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제도 한복판을 관통하는 힐리센강의 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도시 외곽의 부두에 정박한 배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아치를 그리는 수상 성벽과 활짝 열린 수문이 이어졌다. 마침 한 척의 배가 수문을 통과해 멀어지는 중이었다. 돛의 크기를 보니, 내해로 향하는 게 분명했다.
“하류 쪽도 아름답지만, 여기서는 반대쪽 창문을 여는 게 더 보기 좋을 거예요.”
세라스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이안의 좌측, 엘리야의 머리 위로 몸을 기울인 그녀가 손을 뻗었다.
“황궁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 중 하나거든요.”
그녀가 창문을 열었다. 그 너머로 드러난 상류의 전경을 눈에 담은 이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
저 먼 성벽 너머로 기울어지고 있는 주황색의 태양. 노을빛에 물들고 있는 도시와 강물. 그리고 그 한복판, 부자연스럽게 휘어진 강줄기를 해자처럼 두른 새하얀 성벽이 차례로 펼쳐지고 있었다.
“황도를 감싼 강줄기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물길이라고 하더군요. 본래는 직선에 가까웠던 부분을 저렇게 둥글게 새로 파낸 거라고요. 그 안쪽이, 옛 제도였고요.”
세라스의 차분한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이안은 성벽 너머의 성들을 눈에 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강을 바라보며 나란히 솟은, 똑같이 생긴 가장 높은 두 개의 첨탑이었다.
게임에서도 본 적이 있는, 현실이 된 지금도 제도에 들어서기 전부터 진작 보았던 탑이었다. 저 두 개의 탑이 솟은 성이, 바로 황궁이었다.
그리고 황궁의 좌우로는 그보다 낮은 탑이 솟은 건물들이 성벽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이안이 게임에서 들어갔던 별궁이 저 중 하나였다.
“제도는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한 끝에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다더군요. 그리고 과거에 제도였던 곳은 황도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본래의 강줄기였던 곳을 전부 메우고, 대신 그 자리에 숲을 조성했어요. 황도의 정원이죠.”
말을 이어가는 세라스 역시, 새삼스러운 감정들이 오가는 눈으로 황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족들이 모여 살기에도 충분해 보이긴 하는군.”
“겉보기엔 하나의 성 같아도, 실은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아예 동떨어진 건물들까지 합하면 더 많아지고요.”
“…아름답네요. 아주 정교하고요.”
가방을 다시 꾹꾹 눌러 잠그며, 엘리야가 세라스의 말을 받았다. 그녀를 돌아본 세라스가 미소 지었다.
“대학도 아주 멋진 곳이에요. 제도의 다른 구역에서는 보기 힘든 아주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져 있죠.”
마차가 다리를 완전히 건넜다. 곧 제도 북부의 거리가 이어졌다.
남쪽과 서쪽이 시끌벅적하고 교황령으로 이어지는 동쪽이 경건하다면, 북쪽은 차분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묘한 분위기였다. 학자들이 길가에 앉아 노을을 받으며 골똘이 독서를 하거나 사색에 잠겨 있고, 학생들로 보이는 이들은 저마다 열띤 토론을 주고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검은 벽의 발작이 여기서도 보인 모양이군.”
덕분에 그들의 대화 주제 대부분이 검은 벽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안이 중얼댔다.
“그렇겠죠. 당분간은 지식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다시 검은 벽이 될 겁니다.”
대답한 세라스가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두건 망토까지 다시 두른 엘리야는 복잡한 생각이 오가는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세라스가 덧붙였다.
“어쩌면, 영애는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에 제도에 발을 들인 것인지도 몰라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어쩌면…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거든요.”
엘리야가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이안은 그게, 아르케아스가 검은 벽을 무너뜨리기까지의 남은 시간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한 박자 늦게 눈치챘다.
엘리야는 검은 벽의 침식이 백금룡의 결단에도 영향을 미치리라 추측한 것이다.
이안이 보기에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엘리야에게 부담을 주거나 조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연구의 성과보다는 그녀의 타락만을 부추길 테니까.
다각- 다각-
곧 마차가 길 가장자리로 붙으며 속도를 줄였다. 다양한 종족과 인종이 뒤섞인 수많은 학생이 오가는 거리 너머. 회백색 벽돌로 만들어진 곧고 낮은 담벼락이 직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온갖 형태의 나무들과 그 위로 솟은 지붕들이 보였다.
“저는 여기서 배웅해 주세요. 내려서 들어가는 건 저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두건을 깊이 눌러쓴 엘리야가 가방을 들쳐 메며 덧붙였다. 이안이 보기엔 작아 보였지만, 가방은 그녀의 상반신과 거의 같은 크기였다.
“이걸 가져가라.”
이안이 어느새 들고 있던 밀랍으로 봉인된 편지 봉투를 건넸다. 아르케아스가 준 추천서였다.
“이걸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럼요 걱정 마세요.”
엘리야가 곧바로 추천서를 받아 들었다. 그녀가 봉투를 가방 맨 위에 넣는 사이, 이안이 덧붙였다.
“육각 연맹에도 꼭 연락을 넣고. 내게 배운 교훈들도, 절대 잊지 말도록 해.”
“물론이죠. 흑마법을 익힐 일도, 혼돈에 매료될 일도 없을 거예요.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이제는 알거든요. 게다가….”
또박또박 덧붙인 엘리야가 다시 자신의 가방을 들쳐 맸다.
“제게 주신 것들만으로도 반년은 족히 연구할 수 있을 거예요. 사명감을 가지고 해 볼게요. 대부님을 위해서라도.”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맺힐 찰나, 엘리야가 무릎을 굽혔다.
“무사히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대부님. 그리고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요. 제 인생 최고의 모험이었거든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래. 그런 모험은 추억으로만 간직해라. 게다가, 여기서 네가 겪게 될 모험도 만만치 않을 거야. 그러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이안이, 품에서 꺼낸 단검을 검집째로 엘리야에게 내밀었다. 고대의 운철 단검.
“보호 장구 말고도 호신용 무기 하나 정도는 필요하겠지. 늘 가지고 다녀라. 암시장 같은 곳에 발을 들일 때는 더더욱.”
“대부님….”
감동한 듯 탄식한 엘리야가, 이윽고 편지를 품에 갈무리하고는 단검을 받아 들었다.
검집과 자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녀가 읊조렸다.
“늘 새것처럼 관리할게요. 물론, 가능하다면 쓸 일이 없게 하고요.”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먼저 소니에르 가의 이름을 대도록 해요. 소니에르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걸 알면, 대부분은 영애를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세라스가 덧붙였다. 그녀를 돌아본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뵙겠습니다. 전하.”
“물론이죠. 자주 만나요. 영애는 늘 바쁠 테니까, 내가 찾아갈게요. 공녀의 신분으로.”
세라스의 말에 미소로 화답한 엘리야가 마차 문을 쥐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언젠가 꼭 다시 뵈어요. 대부님.”
“…그래. 또 보자. 엘리.”
이안을 잠시 가만히 바라본 엘리야가, 이윽고 미소 지으며 힘껏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차 문을 붙잡은 이안이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하지만 엘리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잠시 멈춰서 이안이 준 단검을 허리춤에 고정하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을 뿐이었다.
가방을 둘러맨 채 멀어지는 난쟁이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것도 잠시.
“…….”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아르케아스가 내린 두 번째 과업이 완수되는 순간이었다. 아직 받지 못한 보상은, 그를 불러내면 얻을 수 있으리라.
이안이 이내 확인 창을 닫았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미, 거리를 오가는 학생들과 학자들의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후였다.
‘…단검 값은, 그 양반에게 청구해야겠네.’
내심 읊조린 이안이 다시 마차 안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마차는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출발했다.
이안이 창밖을 가만히 응시할 찰나.
“…경도 그런 표정을 지으실 때가 있군요.”
마주 앉은 세라스가 문득 읊조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온 이안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어떤 표정?”
세라스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다음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물감이 번지듯 붉게 물들었다. 두건 아래로 흘러내린 갈색 머리칼 역시 삽시에 황금빛으로 되돌아갔다.
“우리 의뢰 얘기로 넘어갈까요? 제 순서가 아닌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럽시다. 오래 기다리셨소.”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스가 미소 지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정문으로 들어갈 겁니다. 조용히 황도로 숨어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경을 모시고 그러고 싶지는 않네요.”
“편할 대로 하시오.”
“오늘 밤 묵으실 숙소는 성밖에 따로 준비해 둘 겁니다. 아버님을 뵙건 뵙지 못하건, 오늘 밤은 거기서 머무시게 될 거예요. 다른 황족들을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저택이죠. 저는 안전 가옥이라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세라스의 말을 들으며, 이안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색으로 물들고 있는 하늘 아래, 높다랗게 이어진 황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다각- 다각-
마차가 첫 번째 성문을 통과했다.
뒤이어 길 좌우로 나무가 무성해졌다. 갑자기 모든 소음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황도의 정원.
“……?”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안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마족의 소굴이나 마법사의 결계 따위에 발을 들였을 때와 비슷한 묘한 중압감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다른 건 불길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게임이었을 때도 이랬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신들의 축복 때문인가? 보호 결계? 그도 아니면….’
세라스와 아스메가 마차의 창문을 닫은 건 바로 그때였다. 아스메가 천장의 마석 등을 켜는 가운데, 세라스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말씀드렸듯이, 아마도 우리 쪽 사람들이 마중 나올 겁니다.”
그녀의 입가에는 그린 듯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긴장을 머금은 채였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닐지도 모르고 말이오. 말씀하셨듯이.”
그녀가 긴장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터였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이안의 앞에 새로운 협상 테이블이 열리는 건 보고 싶지 않을 테니까.
‘…여기까지 와서, 굳이 새로운 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지만.’
이안은 내심 읊조렸다. 칼자루를 쥔 김에 세라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도 떠넘기지 않았던가.
잘 길들인 거래 상대를 버리는 건, 지금에 와선 오히려 이안의 손해였다.
물론, 그런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
곧 마차가 한 차례 덜컹댔다. 성문을 지나친 것이리라. 아스메와 눈빛을 교환한 세라스가 두건을 더 깊이 눌러 썼다.
그사이 마차는 방향을 틀며 나아갔다. 정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는 마부석에 앉은 페이든과 세라스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혹시 내가 모르는 후반부엔, 여기서도 싸울 일이 생기는 건가…?’
다리를 꼰 채 느긋하게 기대앉은 이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방에 서늘하게 깔린 신성력과 마력이, 그의 오감을 교란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신성한 던전에 발을 들인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감각이 아예 일반인 수준으로 둔화된 건 아니었다.
“확실히, 마중을 나오긴 했군.”
“……!?”
이어진 이안의 읊조림에, 세라스와 아스메가 눈을 번쩍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차의 속도가 느려진 건 거의 동시였다.
“…제가 먼저 확인해 볼게요.”
세라스의 말에,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침을 삼킨 세라스가 옆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창문 틈으로 은은한 불빛이 흘러들었다.
그 너머를 차근히 응시하던 세라스의 얼굴에, 비로소 옅은 안도가 스쳤다.
“다행히 우리 쪽….”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춘 건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사람이네요.”
다시 창문을 닫은 세라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와 새로운 긴장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
“문제라도 있소?”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가 먼저 내려야 할 것 같네요. 준비가 되시면 말씀해 주세요.”
“뭐, 더 준비할 건 없을 것 같소.”
“그러시다면….”
코로 숨을 내쉰 세라스가, 다음 순간 마차 문을 열며 밖으로 나갔다. 재빨리 손을 뻗어 이안의 옷깃을 다듬은 아스메가, 그의 양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쓸듯이 마무리 짓고는 미소 지었다.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마차에서 내렸다.
“…….”
마차 주위는 아주 밝았다. 횃불을 손에 든 스무 명쯤 되는 이들이, 주위에 반원을 그리며 촘촘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판금과 사슬이 섞인 갑옷과 코와 볼을 가리는 투구를 쓰고, 제국 국기가 그려진 검은 서코트를 걸친 이들이었다. 검이나 창 대신 횃불을 들긴 했지만, 아마도 황도 근위병들이리라.
“호오….”
그리고 그들의 한복판에, 세라스의 눈매를 가늘어지게 만든 장본인으로 보이는 자가 서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와 넓은 어깨. 멋스럽게 기른 금발과 횃불의 불빛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붉은 눈. 또 다른 황자였다.
이안을 본 순간 탄성을 흘린 그는, 이안이 세라스의 곁에 설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안이 덤덤하게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가운데.
“…소개하겠습니다.”
이안 쪽으로 몸을 돌린 세라스가, 황자를 향해 한쪽 팔을 들며 입을 열었다.
“황궁의 가장 용맹한 별. 호령하는 자. 삼황자이자 제 오라버니인, 케드릭 아스트레이아 전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