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06
306화
이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가 직접 마중 나온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세라스의 반응이 의문스러웠다.
‘황녀가 부른 게 아닌 건가…?’
그가 생각하는 사이, 세라스가 이번에는 케드릭을 돌아보았다.
“저 위대하신 백금룡의 대행자이자 용살자. 북부의 초인인 이안 호프 경이십니다. 오라버니.”
그 순간 횃불을 든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이것이 저들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일 터였다. 저들의 무릎은 오로지 황제의 앞에서만 땅에 닿을 테니까.
“반갑습니다. 성자 대행!”
이안을 마주 본 케드릭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황족 특유의 오만함과 시원함이 반씩 섞인 미소였다. 그가 팔을 좌우로 슬쩍 벌리며 말을 이었다.
“드디어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러셨소?”
이안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케드릭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왜 아니겠습니까? 성자 대행은 살아있는 전설이나 다름 없습니다. 아마 제도에서 성자 대행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그가 이안에게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거리의 음유 시인들은 벨리움에서의 전설적인 전투를 노래하고, 아이들은 자신을 용살자라 칭하며 골목을 뛰어다니죠. 귀족들은 성자 대행께 축성 받을 수 있다면 가보라도 들고 찾아올 겁니다. 나를 포함한 황족들도 마찬가지죠.”
앞에 멈춰 선 케드릭이 넓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귀하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읽었습니다. 성자 대행. 언젠가 반드시 만나리라 다짐하면서요. 그리고 마침내 이 순간이 왔군요. 오늘의 만남은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
“그러시군….”
이안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유명세가 슬슬 귀찮아지고 있었다. 물론 유용할 때가 더 많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요란 법석을 떨어대는 걸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김칫국부터 마셔대는 꼴을 보는 건 더더욱.
“사실 처음에는 그리 기대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걱정이 훨씬 더 앞섰죠. 제도 밖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인 케드릭의 시선이 세라스에게로 향했다.
“내 동생은 오라버니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군요. 수고 많았다. 세라스. 네가 아주 자랑스럽구나.”
“…별말씀을요. 오라버니.”
입꼬리만 말아 올려 미소 지으며 세라스가 대답했다.
황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목숨 건 모험을 감행한 주제에, 막상 그와 만난 이 상황이 여전히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네가 말한 일정보다 하루 일찍 도착했구나. 그럼 내게 먼저 사람을 보내지 그랬니.”
케드릭이 마주 미소 지었다.
“가슴이 다 철렁하더구나. 혹시 몰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홀로 고생한 동생을 마중조차 나오지 못 할 뻔했으니.”
“그러실 것 같아서요. 굳이, 번거롭게.”
역시 비밀로 했던 건가. 굳이 왜?
이안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세라스가 덧붙였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바로 만나 뵙겠다고 하셨나요?”
“그래.”
케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자 대행께서 황도에 드시면, 곧장 황궁으로 모시고 오라고 하시더구나.”
황궁이라. 확실히, 대우가 달라지긴 했네.
의문을 털어버리며,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전혀 영광스럽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진짜인지도 의심스러운 벽 너머의 목소리에게 명령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은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한 번도 도움된 적 없는 황제의 낯짝이 궁금하기도 했고.
“그럼, 가면서 말씀 나누시죠.”
그때,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돌린 케드릭이 한 팔을 들었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이안은 선선히 걸음을 뗐다.
세라스가 아스메와 페이든을 돌아보며 뭔가 손짓을 보내는 사이, 이안의 오른쪽에 자연스럽게 나란히 따라붙은 케드릭이 목소리를 낮췄다.
“가라드에서 보내주신 뜻깊은 선물은, 아주 잘 받았습니다. 성자 대행. 유용하고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펠릭스 황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거의 물건 취급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케드릭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원하면서도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덧붙였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내가 보위에 오른 뒤에도 말입니다.”
“잊으셔도 괜찮소.”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케드릭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비로우시군요. 성자 대행.”
진심인데. 이안은 내심 덧붙이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정말 황실의 후계 다툼이 어떻게 흘러가건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펠릭스를 넘겨준 건 개인적인 복수와 동시에, 귀찮은 뒷수습을 떠넘긴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보아하니, 케드릭은 이미 그 의미를 단단히 오해한 게 분명했다.
“이곳에서 하기에 적합한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오라버니.”
이안의 왼편에 따라붙은 세라스가 덧붙였다. 케드릭이 어깨를 으쓱이는 가운데, 근위병들이 자연스럽게 원을 그리며 주위를 감쌌다.
그들이 손에 든 횃불 덕분에 원 안쪽은 상당히 밝았다.
하지만 일렁이는 횃불과 근위병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원 바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밖에서도 안을 확인할 수는 없으리라.
이안의 시선을 느낀 듯, 케드릭이 덧붙였다.
“이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성자 대행을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준비한 이들입니다.”
그보단, 내가 왔다는 걸 온 황도에 광고하고 싶은 것 같은데.
이안은 내심 코웃음을 흘렸다.
무력 충돌을 각오하지 않는 한 이 근처로 접근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위에서 보면 이 안쪽이 어떤 상태인지 훤히 보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가올 엄두도 내지 말고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조용한 개선식인 셈이었다.
물론, 전리품은 이안이리라.
케드릭이 세라스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그리고 너는, 정문 앞에 기다리고 있거라. 세라스.”
세라스의 시선을 받은 그가 덧붙였다.
“성자 대행은 내가 모시고 들어갈 테니.”
“…….”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세라스를 돌아본 이안이, 비로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래서 그런 표정을 지은 거군.’
뒤통수를 맞은 충격보다는 올 게 왔다는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케드릭에게 도착을 알리지 않은 건, 아마도 이런 상황을 예견했기 때문일 터였다.
당연한 처사였다. 공적을 빼앗기는 것과 자신의 공을 바탕으로 그를 조력하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을 테니까.
물론 이안을 데려온 게 세라스라는 것은 황제도 알고 있겠지만.
케드릭이 동행한다면 결국, 공식적으로는 그의 공적이 될 터였다.
“아쉽겠지만, 이게 우리 둘 모두를 위해 더 옳은 결정이라는 걸,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세라스.”
하지만 케드릭은 그녀가 거절하거나 물리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다면 그녀의 명분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될 테니까. 남매간의 우애에 금이 가는 건 물론이고, 경쟁자들에게는 기회가 될 터였다.
케드릭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거겠지.
…피곤하게도 사는군.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소만.”
“……!”
“……?”
세라스와 케드릭이 거의 동시에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이 더는 뭐라 덧붙이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한 케드릭이 입을 열었다.
“어떤 게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성자 대행?”
“내가 받은 의뢰는 황녀 전하와 함께 폐하를 뵙는 것이오. 황자 전하가 아니라.”
이안이 비로소 그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한차례 눈을 깜빡인 케드릭이, 이윽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들은 그대로군요. 스스로를 용병이라 칭하신다기에 어떤 모습이실지 궁금했는데. 정말 의뢰를 받으시는 거였어요. 또 하나의 의문이 풀렸습니다.”
이안의 덤덤한 얼굴을 바라본 케드릭이 덧붙였다.
“하지만 성자 대행. 황녀와 나는 한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황녀가 성자 대행을 모시고 이 자리까지 온 건, 전부 저를 위해서였죠. 그러니 황녀도 제 뜻에 동의할-”
“황녀의 뜻은 상관없소만.”
이안이 말을 잘랐다. 세라스에게로 향하던 케드릭의 시선이 다시금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의뢰 도중에 내용이 바뀌는 건, 의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오. 계약을 파기해도 무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심지어….”
고저 없이 말을 이은 이안의 시선이,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세라스에게로 돌아갔다.
“황녀께선 이미, 계약을 파기해도 될 만한 물의를 일으키신 전적이 있소. 더 이상의 기회가 없으시다는 뜻이오.”
“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안의 말에 담긴 속뜻을 깨달은 듯, 세라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릴 틈이 없었지만, 성자 대행께서는 철저한 규칙에 따라 의뢰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어떤 의문점이나 거짓도 용납하지 않으시죠. 하지만….”
말을 이어가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미안함이 자연스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세라스가 면목이 없다는 듯 케드릭을 돌아보았다.
“저는 그 사실을 간과해서, 계약이 파기될 뻔했습니다. 누군가 제 목숨을 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았거든요.”
“…누가 네 목숨을 노렸다고? 가라드에서가 전부가 아니라?”
이윽고 케드릭이 미간을 슬며시 찌푸리며 물었다.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얘기는 따로 나누도록 해요. 분명한 건 성자 대행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으리란 겁니다. 거기다 자비를 베풀어 계약을 파기하지도 않으셨죠.”
“…….”
“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계약의 내용을 바꾼다면, 두 번의 자비를 베풀지는 않으실 겁니다. 제가 아는 성자 대행이라면 아마도….”
세라스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대로 몸을 돌려 황도를 떠나시겠죠. 내일이면 다른 형제들이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요. …안 그러십니까, 성자 대행?”
질문한 세라스가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좀 전과 달리, 웃음을 참기 위해서 깨문 게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제대로 먹히긴 했네. 내심 생각하며,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도에서의 내 몸값이 얼마나 될지, 가늠할 기회가 됐겠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성자 대행?”
케드릭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아니겠소? 나는 용병인데.”
“…….”
케드릭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물론, 황제를 누구와 함께 만나느냐는 사실 이안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세라스에게 마음의 빚을 하나 더 지워둘 수 있었다. 어쨌건, 그녀는 은혜를 잊지는 않는 부류였다.
분명 필립과 엘리야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리라.
물론, 당연하다는 듯이 숟가락을 얹는 케드릭의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눈썹을 더 처연하게 내리깐 세라스가 케드릭을 돌아보았다.
“성자 대행께서 이렇게 완고하게 나오시는 건, 전부 제 불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지.”
이윽고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신 케드릭이 내뱉었다.
“모든 일이 늘 합리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닌 법이니.”
배알이 꼴리겠지만, 여기서 판을 엎어 버릴 수는 없을 터였다.
이미 개선식까지 벌이고 있지 않던가. 여기서 이안이 돌아가 버린다면, 말 그대로 개망신을 당하게 될 터였다.
어쩌면 이안을 놓치는 것보다 그게 더 싫을지도 몰랐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라버니. …벌써 황궁이 보이는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린 세라스가, 화제를 돌리려는 게 분명한 말투로 내뱉었다.
동시에 그녀가 이안의 팔을 감싸 쥐었다.
“……?”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녀의 눈매가 슬며시 휘어졌다.
“걸음을 조금 재촉해도 될까요, 성자 대행? 오라버니를 오래 기다리시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이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앞서 걸어갔다. 이안의 팔을, 여전히 꼭 움켜쥔 채였다.
***
황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황궁은, 이름과 달리 궁전보다는 거대한 성에 가까웠다.
몇 대에 걸쳐 증축해 지금의 모습이 완성된 것이리라.
등대 같던 두 개의 쌍둥이 첨탑은 황궁의 좌우에 대칭을 이루며 솟아 있었다.
‘더럽게 크긴 하네.’
정문으로 이어지는 높다란 계단을 오르며, 이안은 황궁의 새하얀 외벽을 눈으로 훑었다. 드러난 창문만 해도 수십 개는 족히 됐다.
좌우에 직각으로 꺾이며 이어진 별궁들은 벽면으로만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황궁과 달리, 보다 저택에 가까운 형태들이었다. 종종 지붕 위로 솟은 첨탑들 역시 황궁의 쌍둥이 첨탑에 비해 낮았다.
물론 성벽 밖은 충분히 볼 수 있을 높이였다. 별궁에 사는 황족들은 때때로 저 위로 올라, 힐리센강과 제도를 굽어살피리라.
“…….”
그리고 지금은 제도 대신 그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별궁의 창문 곳곳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에 목덜미가 다 간질거릴 지경이었다.
‘내일 아침이면 온 제도가 내 방문을 알게 되겠구만….’
내심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높다란 대문 좌우, 타오르는 횃불 아래 선 두 근위병의 모습이 드러났다.
둘 다 똑같이 생긴 육중한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치고, 기다란 미늘창을 한 손으로 세워 든 채였다.
“…….”
그들은 케드릭과 세라스를 알아보았을 텐데도, 아무런 예의도 표하지 않았다. 그저 멈추라는 듯 앞으로 왼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이안은 선선히 멈춰 섰다. 케드릭과 세라스도 마찬가지였다.
“쯧….”
짧게 혀를 찬 케드릭이 세라스를 일별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계단에 접어든 순간부터 뒤로 따라붙었던 병사들이 그를 따라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갔다.
비로소 절도 있게 서로를 마주 보고 선 근위 기사가 문을 하나씩 붙잡아 당겼다.
거대한 대문의 사이가 소리도 없이 벌어졌다.
그 너머로 은은한 불빛과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
문 바로 뒤에 선, 사제복처럼 소매가 치렁치렁한 흰 옷을 걸친 세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이도 생김새도 가지각색이었지만, 묘하게 아스메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여인들이었다.
중앙에 선 검은 머리 여인이 세라스와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고개를 끄덕인 세라스가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속삭였다.
“모시겠습니다. 성자 대행.”
…거, 더럽게들 분위기 잡네.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그녀를 따라 황궁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