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07
307화
등 뒤로 대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기압이 달라진 것처럼, 한순간 귀가 먹먹해지는 듯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안은 내색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 좌우를 따라 두껍고 높게 짝을 지어 이어진 기둥들.
“…….”
그리고 그사이를, 검은 머리 시녀가 앞서 걸어갔다.
뒤따르는 세라스와 이안의 좌우에도 각각 한 명씩의 시녀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따라왔다.
오직 이안의 발소리만이 낮은 울림을 만들어내며 적막을 깨뜨렸다.
‘게임에서도 이랬을까.’
덤덤하게 걸음을 옮기며, 이안은 온통 흰 대리석으로 뒤덮인 장내를 눈에 담았다. 높은 층고. 천장에 샹들리에처럼 이어진 촛대에는 수많은 촛불이 일렁였다.
‘갈아 끼우기 더럽게 어렵겠네.’
넓고 기다란 통로 좌우에는 또 다른 복도들이 이어졌다. 모든 입구마다 미늘창을 호위병들이 조각상처럼 서 있고, 그 너머로는 흰옷을 걸친 이들이 소리 없이 분주하게 오가는 중이었다.
낮이었다면 지금보다는 밝고 생기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옷깃 스치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하고 정적이었다.
거기다 감각을 교란하는 신성력과 정순한 마력도 더 짙어져서, 이제는 사방에 자욱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근원지가 어디지…?’
이안의 귀 끝이 씰룩였다.
전혀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었다. 신들의 축복이 깃든 황도에서도 가장 특별한 공간이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황궁 자체가 거대한 성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방에 신성력이 느껴지는 것도, 경건함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위압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르케아스가 제도를 최후의 보루처럼 여기는 것도, 결국은 황도 때문인 거군.’
어쩌면 언젠가는 황도도 무너지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물론, 그보다 먼저 타락해 버릴지도 몰랐다. 제국은 늘 안에서부터 무너진다는 격언도 있지 않던가.
어느 쪽이건, 영원불멸하지는 않으리라는 근거 없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알현실에 거의 다 왔습니다.”
그때, 세라스가 속삭였다. 어느새 통로 끝의 대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안은 슬쩍 일별한 세라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폐하를 뵌다면, 합당한 예를 갖춰 주세요. 성자 대행.”
혹여라도 이안이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을 걱정한 것이리라. 이안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나도 그 정도로 막돼먹은 놈은 아니오.”
황제라는 이름이 가진 권위는, 물론 이안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지만. 어쨌든 상대는 이 세계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였다.
말 한마디면 이안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황도가 거대한 신성 던전이라면, 황제는 그 던전의 주인인 셈이리라.
그런 상대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
그때, 흑발 시녀가 멈춰 섰다.
두 근위병이 지키고 선 또 다른 대문 앞이었다. 뒤로 몸을 돌린 그녀가 세라스와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은 세라스가 옆의 시녀에게 건넸다. 안에 걸친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은 그녀가 뒤이어 이안의 앞에 섰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는 거군.’
이안이 정복의 옷깃을 바짝 세우는 사이, 세라스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이안의 옷깃 각을 맞추고 단추를 깔끔하게 고쳐 잠그면서, 그녀가 속삭였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제 옆에 나란히 서 주세요. 저를 따라 하시면 됩니다. 먼저 입을 열거나 고개를 들지도 마시고요.”
거참 따지는 것도 많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정돈을 끝낸 세라스가 다시 이안과 나란히 서며 시녀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시녀가 옆으로 물러났다. 근위병들이 알현실의 문을 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쿠우우….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이 완전히 열릴 때까지 기다린 세라스가 비로소 장내로 걸음을 옮겼다.
이안도 태연하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길을 안내한 시녀들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대문이 다시 닫히는 가운데, 널찍한 붉은 양단이 앞으로 이어졌다.
좌우의 벽면에는 마찬가지로 근위병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미동도 없어서 갑옷만 장식해 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맞은편 벽면은 거대한 창문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아래, 계단 세 개 정도 높이의 널찍한 단상이 솟아 있었다.
그 한복판에 놓인 텅 빈 거대한 의자가 바로 황좌일 터였다. 윗부분은 커다란 황금 원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루 솔라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찬란한 빛이 황제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기도, 황제에게 후광이 서린 것처럼 보이길 의도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건, 웅장하긴 하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낮이었다면 훨씬 더 그랬을 터였다. 물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이는 지금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
세라스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면서, 이안은 단상 우측에 서 있는 노인을 눈에 담았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수염과 머리숱이 풍성하고 자세도 아주 꼿꼿했다. 고급스러운 검은 정복 차림에, 왼쪽 가슴에는 제국 국기 형태의 황금 휘장이 반짝였다.
“…….”
그는 형형한 갈색 눈으로 세라스와 이안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노인과 눈이 마주친 건 이안 뿐이었다. 세라스는 텅 빈 황좌를 묘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철컥-
단상 옆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세라스가 능숙하게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이안을 내려다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일곱 여신의 은총 받은 자이자 전 대륙의 진정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 납시오. 모두 합당한 예를 다하시오.”
척, 외곽의 기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안도 재빨리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의 신경은 단상 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장내로 들어선 인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다. 단상 좌측에 멈춰 선 기척이 하나. 그리고 황좌로 다가가는 인기척이 하나.
물론, 단상을 가로지르는 자가 황제일 터였다.
하지만 제국의 주인이라기엔 존재감이 평범했다. 그저 껍데기만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너무 아무런 특별함도 느껴지지 않아서 오히려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분명 신들의 축복을 한몸에 받았으며, 덕분에 강대한 힘과 능력을 품고 있을 텐데.
‘아니면 이것도 황제의 능력과 관계가 있는 건가…?’
이안이 내심 고개를 갸웃할 찰나. 황제가 황좌에 앉았다. 장내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은 것도 잠시.
“일어서라.”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졌다. 목소리는 권위와 위엄은커녕, 무심할 정도로 평온했다.
하지만 세라스는 물론, 무릎을 꿇었던 기사들도 일제히 일어나 손에 쥔 미늘창을 고쳐 쥐었다.
이안도 차분하게 일어섰다.
“고개를 들라.”
이어진 목소리에, 이안은 비로소 고개를 들어 황좌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 앉은 황제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깨까지 구불구불하게 기른 다소 빛이 바랜 듯한 금발.
그 위로 황금 왕관을 쓰고 있었는데, 수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장식도 되어있지 않았다.
적당히 주름진 눈매와 그 사이의 고요한 붉은 눈. 다소 야윈듯한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금색 수염.
새하얀 털가죽으로 만든 외투 아래로, 황금 실로 자수를 놓은 보랏빛 정복을 걸치고 있었다.
팔걸이에 얹은 손도 그렇고, 전체적으고 다소 마른 인상이었다.
‘이게 황제란 말이지….’
가라앉은 눈으로 이안을 내려다 보던 황제가, 눈동자만 움직여 그의 곁에 선 세라스를 돌아보았다.
비로소 이안도 슬쩍 눈동자를 움직였다. 단상 좌측,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흰 옷을 걸친 남자 시종이 서 있었다. 아직 청년이라 부르기에는 무색한 앳된 얼굴.
양손은 넓적하고 네모난 은쟁반의 가장자리를 쥐고 있었다. 쟁반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약속을 지켰구나. 기특하군.”
황제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그때였다. 빠르지도 않고 고저도 거의 없어서 감정을 읽기 어려운 말투.
하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세라스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폐하.”
“날이 밝으면 짐을 옮기거라.”
황제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세라스의 눈이 설핏 커지는 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샛별궁에 새로운 거처를 준비해 두었으니.”
“……!”
세라스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기쁜 마음으로 그리 하겠습니다. 폐하.”
그녀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동시에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황실의 부름 퀘스트가 완료된 것이다.
이안이 창을 닫을 찰나, 황제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을, 이안은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황제의 눈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안의 뇌리로 다른 사람들이 날 볼 때 저랬을까 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렇다면, 보이는 것과 달리 지금 황제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오가고 있으리라.
이윽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용살자. 초인. 그리고 저 위대한 백금룡의 대행자. 이안 호프.”
여전히 평온하고, 동시에 다소 느릿느릿한 말투.
이안의 가라앉은 눈을 잠깐 들여다보듯 응시한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묻겠노라. 황명을, 받들겠는가?”
아, 그래. 본론만 하겠단 건가.
이안은 내심 실소를 삼켰다.
하긴. 황제는 굳이 돌려 말할 필요도,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거나 설득하려 할 이유도 없었다.
그건 황제의 앞에 선 이들의 몫.
그리고 그건 이안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의 가장 굵직한 칭호들을 이름 앞에 붙여 부른 것도 그래서이리라.
어쨌건, 이안에게는 차라리 달가운 방식이었다.
“합당한 보상만 해 주신다면. 기꺼이.”
그 역시 굳이 돌려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이안의 대답에 노인과 쟁반을 든 시종, 심지어 세라스까지도 순간 그를 돌아보았다. 특히 세라스는 살짝 현기증이 난 듯 비틀댔다.
이안이 황제에게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줄은 몰랐던 것이리라.
하지만 정작 황제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눈가에 옅은 주름이 잡히고 있었다. 이안에게는 그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저쪽도 차라리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황제가 다시 입을 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렇다면, 황명을 받들라.”
이거, 준다는 얘기지?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선선히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까딱이며, 황제가 세라스를 돌아보았다.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가운데, 세라스가 곧바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
시종의 시선이 쟁반으로 향했다.
세라스는 정확히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새하얀 양피지. 황제의 칙서였다.
“……!”
그 위의 글자를 눈에 담은 세라스의 눈매가 순간 꿈틀댔다.
물론 찰나에 불과했다. 칙서를 양손으로 쥔 그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안 호프에게 남작 작위를 하사하며, 자유 남작으로 봉한다. 이는 황제 직속의 명예직이며, 제국의 뜻에 반하지 않는 한 대를 이어-”
“…….”
이안은 덤덤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황제가 작위를 내리는 것은, 사실 그다지 놀라운 부분이 아니었다.
그와 황제의 관계를 공식화할 가장 손쉬운 수단이었으니까.
게임에선 없었던 일이었지만, 그때의 이안과 지금의 그는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닐 터였다. 그랬다면 세라스가 그런 반응을 보일 리 없었으니까.
“또한, 이안 호프 남작을 북부 자치령의 백작으로 임명하며, 루 글라스트와 노르 린도르, 갤 마로의 통치권을 하사하여 변경백으로 봉하노니-”
…아, 그래. 이래서였군.
이안의 눈매가 비로소 꿈틀댔다.
북부의 작위와 영지라니. 그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황제가 그를 북부로 보낼 리는, 없다고 여겨 왔었으니까.
“-아직 군단에 소속되지 않은 북부인 전사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병단을 편성해, 북부 전선의 요새로 집결할 것을 명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