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10
310화
제도에서 제일 좋은 집에 사는 양반이 무슨….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귀하도 필요한 일이 있다면 종종 이용하시오.”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세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계속 비워만 두면 아깝잖소.”
이안은 깁슨을 일별하며 말을 이었다.
“이미 시종장에게도 말해 뒀소. 필립과 엘리야의 별채로도 쓰게 할 생각이니, 귀하도 사용하시오. 그 둘에게도 이야기를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고.”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성자 대행. 기꺼이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대답하며, 세라스가 식탁 앞으로 다가왔다.
그사이 이안이 다시 깁슨을 돌아보았다.
“두 분의 식사도 준비해 주시오.”
“예. 아까 말씀하신 부분들은, 식사를 준비한 뒤에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깁슨이 문 너머로 손짓을 보냈다. 긴장한 얼굴로 들어온 시종이 부엌으로 향하고, 깁슨도 세라스와 페이든의 식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시 식탁 앞까지 다가온 세라스를 바라본 이안이 내뱉었다.
“그건 집들이 선물이오?”
“그럴 리가요. 선물은 따로 있답니다. 이건, 우리의 첫 계약이 성공적으로 끝난 걸 자축하는 의미에서 가져온 거예요.”
대답하며 이안의 맞은 편에 앉은 세라스가, 술병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냥 본인이 마시고 싶었던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자신의 잔에 남아 있던 포도주를 단숨에 전부 들이켰다.
이내 잔을 내려놓은 그가 덧붙였다.
“어쨌든, 이야기는 잘 끝나신 모양이군.”
“일단은요. 먼저, 선물부터 드리겠습니다.”
세라스가 아직 뒤에 서 있는 페이든을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들고 있던 상자를 식탁 중앙에 내려놓은 페이든이, 뚜껑을 열어 이안 쪽으로 돌렸다.
그가 비로소 세라스의 옆에 앉는 가운데, 내부를 확인한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집들이 선물이라기엔 좀 과한 것 같은데.”
“가라드에서 넘겨주신 물건들에 대한 대금도 포함한 겁니다. 그 가치를 생각하면, 오히려 약소하다고 할 수 있죠.”
이안이 넘겨준 전리품과 펠릭스 황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세라스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금화는 그다지 많이 넣지 않았습니다. 대신 가문에 보관 중이던 마석을 여러 개 챙겨 왔어요. 이게 더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판단이셨소.”
소형과 중형으로 세공된 마석이 열 개쯤. 한복판에는 정수도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쌓여 있는 제국 금화도 오십 개는 되어 보였다.
“만족스러우시다니 다행이네요.”
안도한 듯 내뱉은 세라스가, 소매에서 둘둘 말린 양피지를 꺼내 상자 안에 얹었다. 돌돌 말린 표면에 잉크로 새긴 듯한 주문 회로가 무늬처럼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법 전서예요. 그 위에 글자를 쓰시면, 제가 가진 나머지 반쪽으로 같은 글자가 새겨질 겁니다. 반대로 제가 성자 대행께 답신을 보낼 수도 있죠.”
이안의 시선을 받은 세라스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한 번 글자를 새긴 부분은 더 쓸 수 없으니까, 다섯 줄 정도는 공간을 남겨 주세요. 제가 답신을 보낼 수 있게. 제도에 들어온 소식과 다른 두 분의 안부도 전해 드리겠습니다.”
일 처리 하나는 정말 시원시원하다니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상자를 닫으며 내뱉었다.
“혹시 전할 말이 있다면 그전에라도 글을 남겨 두시오. 나중에라도 읽고 답장할 테니.”
“네. 최대한 압축적으로 쓰도록 해볼게요. 지면을 낭비하지 않게.”
세라스가 대답하는 그때, 시종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깁슨이 그 위에 놓인 접시들을 차례로 들어 세라스와 페이든의 앞에 놓아주기 시작했다.
이안이 턱짓했다.
“식사부터 하시고, 마저 이야기 나눕시다.”
“냄새가 아주 좋네요. 고마워요, 시종장. 앞으로 종종 볼 텐데, 잘 부탁하고요.”
“영광입니다. 전하.”
깁슨이 미소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세라스와 페이든이 차례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기품 있게 시작된 식사는, 깁슨이 시종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자 곧바로 전투적으로 돌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둘 다 한나절이 넘게 식사할 틈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던가.
“…이런, 제가 너무 식사에 정신이 팔렸었네요.”
그녀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돌아온 건 접시가 반 이상 비었을 때쯤이었다.
“기껏 술까지 준비해 와 놓곤.”
머쓱한 듯 미소 지은 세라스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 페이든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전하.”
“아니에요. 경도 고생 많으셨는데, 내가 한 잔 따라드리고 싶군요.”
손수 마개를 연 세라스가, 이안 쪽으로 술병을 내밀며 덧붙였다.
“물론, 성자 대행께도요.”
이안은 고개만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그의 앞에 놓인 빈 잔에 천천히 술을 따르며, 세라스가 말을 이었다.
“약속대로 비밀 창고에 입장하실 수 있게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다만, 제 참관하에서요.”
이안의 눈을 힐끔 올려다본 그녀가 재빨리 덧붙였다.
“가문의 규칙상, 비밀 창고에는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거든요. 예외적 상황이니, 안내차 동행하는 겁니다.”
“못 믿어서 그러시는 거라도 상관없소. 계약 내용에만 문제가 없다면.”
태연하게 대답하며 이안이 술잔을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 페이든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면서 세라스가 말을 이었다.
“약속 대로, 원하는 물건이 있으시다면 무엇이든 하나를 가지고 나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가주께서도 천천히 구석구석 살펴보시라 전해달라더군요. 마음에 드시는 물건이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고요.”
마지막으로 자신의 잔을 채우며, 세라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낡아빠진 유물이나 지금으로선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 훨씬 많거든요. 물론 진귀한 보물과 예술품, 보석들도 섞여 있지만요.”
“천천히 둘러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소.”
“눈에 차는 게 없으시다면, 보석이라도 챙기세요. 오래전 기억이긴 하지만, 아주 크고 아름다운 금강석을 본 기억이 있답니다.”
다이아몬드라. 그것도 좋지.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세계의 보석들은 물론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비쌌지만, 마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고대의 보석이라면 더 특별한 능력을 품고 있으리라.
“내일 오전에 방문하실 건가요?”
세라스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마주 술잔을 들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소. 아침 일찍.”
이안과 페이든을 번갈아 바라보며 술잔을 슬쩍 치켜들었던 세라스가 미소 지었다.
“잘됐네요. 그럼,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갈게요. 물론, 페이든 경도 함께.”
술잔을 입에 가져가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남는 게 방이긴 하지만. 괜찮으시겠소? 이사 준비를 하셔야 할 텐데.”
“아스메가 알아서 할 거예요. 오히려 제가 없는 게, 준비하기엔 더 편할 겁니다. 게다가….”
세라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페이든을 슬쩍 일별하고는 덧붙였다.
“입궁하면 한동안은 황도를 떠날 수 없을 겁니다. 처리해야 할 일들도 아주 많을 테고요. 그러니, 제가 자유 시간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뭐… 그러시다면야.”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비로소 술잔을 입에 댔다.
이내 그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식도가 차가워질 정도로 독한 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이어 코로 번지는 향은 아주 청량했다.
…이거, 정말 엄청 비싼 술이군.
이안이 멈추지 않고 꼴깍대는 사이, 마찬가지로 술을 한 모금 마신 세라스가 낮은 탄성을 흘렸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네요. 내일은 정말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내일 소니에르가의 저택에는 걸어서 갑시다.”
이윽고 이안이 텅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손을 뻗어 술병을 집어 들면서, 그가 세라스와 페이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페이든 경 없이, 귀하랑 나 둘이.”
“……!”
세라스의 눈이 반짝이는 가운데, 페이든은 정반대의 의미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저, 성자 대행. 아무리 제도라 하더라도-”
“내일이면 내 집이 어디인지, 내 마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다들 알게 될지도 몰라서 말이오.”
말을 자른 이안이,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덧붙였다.
“조용히 편하게 움직이고 싶소. 게다가 귀하가 저택 앞을 지키고 있다면, 누가 찾아오더라도 내가 저택에 있다고 여기지 않겠소?”
물론, 귀찮은 상황이 생기면 문지기로만 써먹지는 않겠지만.
“흐음. 하지만….”
“옳은 말씀이에요, 경. 도시 귀족들은 물론이고 교단에서도 언제 성자 대행을 뵙기 위해 찾아올지 모릅니다. 제도 시민들은 또 어떻고요.”
재빨리 끼어든 세라스가 페이든을 돌아보았다.
“마차를 끌고 나갔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잖아요. 두건을 눌러쓰고 조용히 다녀올게요. 성자 대행께서 날 지켜 주실 텐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리도 없고요.”
그렇죠? 하고 덧붙이며 세라스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신났담.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에 의아해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입맛을 다신 페이든이, 이윽고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만약 두 분께서 출타하신 동안 손님들이 찾아온다면 출입만 통제하면 되겠습니까?”
“아예 물려 주시면 더 좋고. 안 되더라도, 길만 막아 주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페이든이 마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세라스가 재빨리 다시 술잔을 들었다.
“자, 그럼 이제 회포를 풀어 볼까요? 마지막 밤인데,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 보자고요.”
건배사가 무색하게, 세라스는 채 두 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너무 독한 술이었고, 길고 피곤한 하루였으니까. 그건 페이든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각자의 침실로 올라갔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하지만 이안은 식당에 남아 느긋하게 더 술잔을 기울였다. 세라스가 가져온 술이 전부 동날 때까지.
***
제도의 거리는 이른 아침부터 북적였다. 옅은 물안개가 낀 대로 한복판을 마차와 인마가 오가고, 길가에는 온갖 종족과 인종이 뒤섞여 왁자지껄했다.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더해지자, 말 그대로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를 방불케 했다.
덕분에 검은 망토와 회색 망토를 걸치고 두건을 뒤집어쓴 두사람은, 그 한복판에서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시간에 이렇게 걸어본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몇 년 만인지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예요.”
세라스가 속삭였다. 두건 아래의 푸른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낮게 콧방귀를 흘린 이안이 읊조렸다.
“적당히 두리번거리시오. 수상해 보이지 않게.”
“염려 마세요. 처음엔 저도 조금 걱정했지만.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아요.”
씩 미소 지은 세라스가 다시 한번 이안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어차피 뭔가 문제가 생겨도, 경이 지켜 주실 거잖아요.”
“…….”
이안은 입맛만 쩝 다셨다. 눈에 띄지 않으려 일상복 위에 그림자 망토만 걸치고 나왔지만. 실제로도 긴장은 전혀 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뭔가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기더라도, 맨주먹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소니에르 가의 저택은 제도의 북쪽 외곽에 있었다. 이안의 저택은 서남쪽의 주택가 한복판이었으니, 도시를 관통하고 다리까지 건너가야 했다.
“거리가 조금 좁고 어지럽죠? 서쪽은 초창기에 확장한 구역이라, 상대적으로 지저분하고 난개발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드는 구역이 됐다는 게 역설적이죠. 제도에서 생기가 가장 넘친다고나 할까요.”
걸음을 옮기면서, 세라스는 이안에게 제도에 관한 이런저런 잡다한 지식을 속삭였다.
번화가를 지나칠 때는 거리의 역사를. 강이 보이면 힐리센 강과 관련된 일화를. 다리가 가까워지자 제도에 몇 개의 다리가 놓여 있는지를 떠드는 식이었다.
그다지 관심 없는 이야기 들이었지만, 이안은 묵묵히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즐거움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었다.
“…….”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간 건 다리 한복판을 지날 때쯤이었다.
물안개가 완전히 흩어지면서,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도시의 전경이 강 좌우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 한복판의 황궁 역시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얬다.
“오늘은 도시가 유독 아름답네요. 평소보다 낮은 곳에서 넓게 봐서 그런 건지도요.”
세라스가 새삼스러운 감탄을 흘렸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의 눈에도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묘한 이질감과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세라스나 다른 황족들이 보여주던 자신감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산다면 혼돈의 시대니 검은 벽이니 하는 것들은, 다른 세상의 일이나 충분히 극복 가능한 시련 정도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하긴. 생각해 보면 나도 그랬지.’
이안은 이제 어렴풋한 과거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본래의 세상을 떠올렸다.
그때도 어딘가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테러와 세계 전쟁에 대한 경고도 늘 있어 왔다.
하지만 그게 피부로 와닿은 적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군 복무 중에나 신경이 쓰인 정도였다.
제도 사람들에겐 변방의 혼돈과 검은 벽의 광기가 그러하리라.
그 사실이 어떤 새삼스러운 박탈감이나 답답함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저 본래의 세상이. 그리고 이들처럼 평화가 당연하게 느껴지던 일상이 그리워졌을 뿐이었다.
“저기 보이네요.”
이윽고 한적하고 널찍해진 거리 저 너머, 세라스가 담벼락 한복판의 대문을 가리켰다.
높고 기다란 담장 너머로 대저택의 윗부분이 설핏 눈에 들어왔다.
제도의 귀족들은 이런 식으로 성 곳곳의 명당에 흩어져 살았다. 외부의 침략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다각나 세라스가 슬쩍 두건을 벗었다.
“문을 여세요. 시종장에게 잉그리드가 귀빈을 모시고 왔다고 전하고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영애.”
고개를 숙인 병사가 대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
하지만 대문은 곧바로 활짝 열리지 않았다. 다시 두건을 눌러쓴 세라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별다른 말 없이 묵묵히 기다렸다.
대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한 건, 몇 분이 더 지나서였다.
“…이런.”
그 너머로 드러난 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은 세라스가 짧게 혀를 찼다.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금발의 중년인과 시종이 분명한 비슷한 연배의 남자가 건너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소니에르 백작입니다. 분명 어제 나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뒀었는데. 기어코 멋대로 나왔네요.”
미간을 찌푸리며 이안을 돌아본 세라스가 속삭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성자 대행. 제가 가서 물러나라 전하고-”
“됐소, 그냥 갑시다.”
이안이 걸음을 떼며 말했다. 재빨리 곁에 따라붙은 세라스의 시선에, 그가 덧붙였다.
“인사 정도는 나눌 수도 있잖소. 귀하의 부탁으로 비밀 창고까지 개방했는데, 이 정도쯤이야.”
뒤에서 다시 대문이 닫히기 시작한 가운데, 세라스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자비로운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소개는 제가 대신할 테니, 편하게 물러나 계세요.”
하지만 그녀가 뭔가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대문이 완전히 닫힘과 동시에, 백작과 시종이 이안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