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11
311화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저택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자 대행.”
이젠 다소 식상하게 느껴지는 인사가 뒤를 이었다.
그들의 앞에 멈춰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소. 인사는 충분하니, 일어나시오.”
곧바로 일어선 백작이 이안을 마주 보았다.
빛바랜 금발에 푸른 눈.
아마 저 금발은 황가에서 물려받은 유전자일 터였다. 이들은 세라스의 외가임과 동시에, 전대 황실의 외척이기도 했으니까.
황족 중에 개차반이 많은 것도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육체나 정신에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이다.
물론 이들은 그저 혈통과 권력을 지킬 생각뿐이겠지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럼 우선, 별채로 모시면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정중하게 말한 백작이 한 팔을 들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곁에 선 세라스가 몸을 돌렸다.
이안은 그녀의 뒤를 따라, 정원의 옆으로 이어진 샛길로 발을 들였다. 그의 옆으로 재빨리 따라 붙은 백작이 말을 이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극구 사양하셨습니다만. 인사도 드리지 않을 수는 없어, 무례를 무릅쓰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례라 여기실 필요 없소. 덕분에 나 역시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소. 감사드리겠소.”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앞서 걷던 세라스가 조금 놀란 듯 그를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잘 받아줄 줄은 몰랐던 것이리라.
저쪽도 저쪽대로 날 개차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만.
이안이 내심 웃음 짓는 사이.
“도움은 저희가 많이 받았지요. 감사드립니다, 성자 대행.”
백작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케드릭이 했던 감사 인사와 같은 의미일 터였다.
“성자 대행께서는 정치적인 의도로 행동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자 대행의 뜻을 곡해하지 마세요. 가주님.”
세라스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살짝 입꼬리를 당겼다. 대변인이라도 자처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제가 무례를 저질렀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백작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이런 부분에 대해선, 굳이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서늘한 날씨에 시들고 있는 풀숲과 나뭇잎 너머로, 곧 별채 건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본가 저택보다는 다소 작은, 아늑한 느낌이 드는 2층짜리 벽돌 저택이었다.
“마중은 여기까지면 충분할 것 같군요.”
세라스가 덧붙였다. 곧바로 멈춰 선 백작이 이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예. 저는 여기까지만 모시겠습니다. 더 함께하고 싶습니다만, 성자 대행께 방해만 될 것 같군요.”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마음에 드시는 물건이 있길 바라겠습니다. 성자 대행.”
“환대해 주셔서 고맙소.”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대문을 연 세라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성자 대행.”
몸을 돌린 이안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재빨리 그의 곁으로 따라 붙은 세라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망하군요. 잘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 대행.”
“별로 어렵진 않았소.”
선물을 하나 더 주겠다는 말을 내심 기대하긴 했지만.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은 세라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비밀 창고로 이어지는 계단은 1층 응접실의 벽난로 옆에 감춰져 있었다.
쿠구구구….
세라스가 벽난로의 벽돌 하나를 밀어 넣자, 기관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벽면 일부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 너머로 지하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딱히 놀랍지는 않은 장치였다.
“저도 여길 들어가 보는 건 몇 년 만이에요.”
계단을 내려가며 세라스가 말을 이었다.
“그사이 물건이 여럿 늘었다던데.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면 좋겠군요.”
“염려 마시오. 뭔가는 있을 것 같으니까.”
이안이 대꾸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마력의 파장이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이 아니었다. 분명, 쓸만한 유물들이 있는 것이리라.
세라스는 곧 직사각형의 형태로 길게 이어진 어두운 지하실로 발을 들였다.
환기를 위한 구멍이 천장 곳곳에 뚫려 있을 뿐, 창문 하나 없는 완벽한 지하였다.
화륵-
세라스가 부싯돌로 좌우 벽면의 등잔에 불을 붙였다. 장내가 은은하게 밝아지며, 좌우로 길게 이어진 흰 천에 덮인 장식장들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끝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돌아보세요.”
세라스가 걸음을 떼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만져 봐도 되겠소? 그러는 게 더 빨리 끝날 것 같은데.”
“네. 얼마든지요.”
대답하며, 세라스가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촤륵- 촤르륵-
그녀의 손길에, 좌우의 천들이 연달아 땅으로 떨어졌다. 때때로 중간중간, 벽면의 등잔에 불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진열장과 장식장들의 모습이 차례로 드러났다.
투명한 유리 너머에 놓인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
‘뭐가 많긴 많네.’
이게 제도의 실세 귀족가문의 저력인 건가.
내심 감탄하며, 이안은 그 한복판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조각상. 그림. 벽면이나 천장째로 뜯어온 듯한 원시적인 음각 화. 푸르스름하게 녹슨 유물 병장기들. 용도를 알 수 없는 고서들. 세라스의 말대로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투박하게 세공된 보석 장신구들까지.
‘이건 딱 봐도 폐급이고…. 이건 정보 창도 안 뜨네. …이건 옵션이 개판이군.’
이안은 유리 칸막이를 열어, 눈에 띄는 물건들을 툭툭 손으로 건드리며 나아갔다.
손만 대도 바스라질 것 같거나, 예술품으로 보이는 종류의 물건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도 정보창을 확인할 수 없는 게 태반이었다. 확인할 수 있다 해도 내구도가 너무 낮거나 옵션이 중구난방인 것들 투성이였다.
게임에서는 일상적으로 겪던 일이었다. 물론, 쓸모없는 것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인 족장의 의식용 발톱…. 뇌전의 직검… 적단목 지팡이…. 이것도 쓸만하군.’
이안은 때때로 나타나는 등급에 걸맞은 능력치를 가진,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물건들의 이름과 위치를 기억해 뒀다.
“……!”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할 만한 물건을 발견한 건, 창고의 끝이 멀지 않은 때였다.
다섯 면이 모두 유리로 만들어진 정사각형의 장식장 안.
고리처럼 생긴 얇고 커다란 금속 띠의 끝부분에 손을 댄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흑요정 장로의 흑관이라….’
유물 등급의 투구였다.
방어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지만. 정신력과 몇 가지 상태 이상 저항력을 제법 높여 줬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을 잡아끈 건, 마력 회복 속도 증가 옵션이었다.
게임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옵션이지 않던가. 엄청나게 높은 수치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흐음….”
침음한 이안이, 흑관을 양손으로 집어 들어 밖으로 꺼냈다.
광택이 거의 없는 검은 금속 재질. 매끈한 표면에는 고대 요정어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고리 끝이 맞닿는 부분은 안쪽으로 살짝 구부러진 채 아무런 장식도 없이 마감된 채였다.
내부 단면이 비스듬한 건, 뒤통수부터 이마 위까지 사선으로 착용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리라.
좌우 측면의 살짝 위로 구부러진 곡선은 귀 위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함일 터였다.
‘수리 불가인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내구도도 사용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비로소 고개를 돌린 이안이, 창고 끝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세라스를 마주 보았다.
“이걸로 하겠소.”
“…다행이네요. 마음에 드신 물건이 있어서.”
세로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셔서, 내심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녀와 이안은 불과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안의 앞으로 다가온 그녀가, 그의 손에 든 흑관을 눈에 담았다.
“예상하지 못한 물건을 고르셨네요. 머리에 쓰는 관 같은데. 저는 이곳에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누가 쓰던 물건일까요.”
“정확하진 않지만, 요정의 유물이오. 아마도 흑요정이 쓰던 물건 같군.”
“타락한 요정이요…? 마족의 유물까지 수집하다니. 정말이지 욕심이 지나치군요.”
세라스가 가문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암흑 성물처럼 저주받은 물건은 아니잖소. 그럼 이제….”
그가 한 손으로 움켜쥔 흑관을 슬쩍 흔들었다.
“이건 그냥 가져가면 되겠소?”
“물론이죠. 결정하셨다면, 이제 그건 경의 소유물입니다.”
곧바로 대답한 세라스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 자리에서 바로 착용해 보시겠어요?”
“기꺼이.”
이안은 흑관을 머리에 걸쳤다. 후두부 하단에서 시작된 고리가 귀 위를 비스듬하게 지나쳐, 앞머리 사이에 안착했다.
고리의 앞부분을 살짝 누르자, 자연스럽게 머리에 딱 맞게 흔들림 없이 고정됐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진 몰라도, 고리 좌우를 힘껏 당기지 않으면 절대 벗겨지지 않을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서늘함. 동시에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뒤를 이었다.
“…훌륭하군.”
감각이 둔해져서 투구를 잘 쓰지 않던 이안에게 특히 딱 맞는 물건이었다.
물론, 필요하다면 이 위에 얼마든지 강철 뚜껑을 뒤집어 쓸 수도 있을 터였다.
게임에선 불가능했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그런 제약 따윈 없었으니까.
“멋지네요. 머리 색과 같아서 그런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뭔가를 쓰셨다는 것도 모르겠어요.”
세라스가 덧붙였다. 빈말이 아닐 터였다. 머리를 살짝 헝클인 것만으로도, 흑관이 머리카락 사이에 자연스럽게 가려졌으니까.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자신이 걸어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뒷정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장내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식장과 진열장이 죄다 열려있어서, 도둑이라도 들었던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냥 두셔도 돼요. 알아서들 정리할 겁니다.”
세라스가 말했다. 꽤 무책임한 말투였지만.
“뭐 그럼, 돌아갑시다.”
이안은 사양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세라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정오가 가까워진 제도는, 쨍한 햇살 아래 활기찬 본모습을 마음껏 드러냈다. 아침보다도 더 분주하고 번화했다.
“시간도 딱 맞는 것 같은데. 점심 식사는 하시고 떠나실 거죠, 경?”
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서쪽 번화가를 지나치면서, 세라스가 물었다. 그녀는 완전히 안심한 듯, 이제 두건을 굳이 깊이 눌러쓰지도 않은 채였다.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일 없다면 그러겠소.”
“잘됐네요. 다행이에요.”
세라스가 아쉬움과 안도가 뒤섞인 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럼 경을 배웅한 뒤에 입궁해야 겠습니다. 그때쯤이면 슬슬 이사 준비도 다 끝났을 테고요.”
“굳이 배웅씩이나.”
낮게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덧붙였다.
“마차를 내어 드리겠소. 그걸 타고 돌아가시오. 황도에 복귀하신 뒤엔, 다시 저택으로 돌려놔 주시고.”
세라스의 시선을 받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꽤 정이 든 물건이라서 말이오.”
“그럼 경은, 그냥 말만 타고 떠나시려고요?”
“혼자 움직이는 데 굳이 마차까지 끌고 다닐 필요는 없잖소.”
오히려 손만 더 많이 갈 터였다. 다른 이들이라면 짐을 운반하는 용도로라도 쓰겠지만, 이안에게는 아공간이 있었다. 짐 가방 하나 정도 들어갈 여유는 충분했다.
“조용히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으신 거군요. 알겠습니다. 경이 원하신다면, 따라야죠.”
세라스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고해 보이던 황녀가 이렇게 말을 잘 듣게 될 줄이야. 하긴. 한배를 탔으니 자존심을 내세워봐야 의미 없다 여기는 걸지도 몰랐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더 하겠소.”
번화가를 지나쳐 주택들이 이어진 주거지역으로 접어들면서, 이안이 문득 덧붙였다. 세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경.”
“나 대신 육각 연맹의 파엘 단주에게 인편을 보내 주시겠소? 약속한 물건은 북부의 트라벨가로 배송해 달라고 말이오. 내가 그곳에서 직접 수령할테니.”
“어렵지 않죠. 저도 단주에게는 볼일이 있으니, 안부도 전할 겸 겸사겸사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것도 잠시.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거리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이렇게까지 붐빌 곳은 아닐 텐데요.”
길을 오가는 마차들의 숫자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의 뒷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이안이 읊조렸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던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미간을 좁힌 세라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설마…?”
어깨만 으쓱이며, 이안은 코너를 돌았다. 저 앞, 줄지어 멈춰서 있는 마차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차된 마차의 행렬은 다음 갈림길까지 이어졌다. 몇몇 마차들은 간신히 선회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거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교통량이 유독 많게 느껴진 건 저런 마차들 때문이었으리라.
이안과 세라스의 걸음이 절로 느려졌다.
“마차를 끌고 나오지 않길 잘 했네요. 그랬다면 꼼짝없이 발이 묶일뻔 했어요.”
저쪽은 이안의 저택이 위치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저 마차들의 절반 이상은, 이안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자들이 분명했다.
어쩌면 선회하지 않고 멈춰 선 마차 전부가 그에게 볼일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페이든 경이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나 보군.”
귀족이 타고 있는 화려한 마차들과 대교회에서 보낸 게 분명한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까지 눈에 담은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소문이 나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곧바로들 죄다 몰려올 줄이야. 그를 만나서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모두가 그를 만나고 싶어하리라던 케드릭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건 분명했다.
“어쩌죠? 모른척 하고 그냥 지나쳐서 들어갈까요? 중간에 들킨다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긴 하겠지만요.”
세라스가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이안은 턱을 긁적였다.
들키지 않는다 해도, 어쨌건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간 오늘 출발은 물 건너가게 되리라. 분명 또다시 그놈의 성자 놀음을 해야 하겠지.
그런 귀찮은 상황을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
걸음을 옮기던 이안이, 불현듯 망토 위로 세라스의 팔을 잡아끌며 골목길로 들어갔다.
저택과 저택의 담벼락 사이로 이어진 좁은 샛길이었다.
“갑자기 여기는 왜요? 경. 무슨 생각….”
이안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던 세라스가, 이내 말을 멈추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멈춰선 이안이 그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
등에 담벼락이 닿자, 세라스가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눈동자만 굴려 이안의 얼굴을 올려다본 그녀가, 이윽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 성자 대행.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요….”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소.”
그녀의 읊조림을 무시한 채, 이안이 내뱉었다. 이안의 입술을 바라보던 세라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여기서요? 어떻게요?”
“허락해주시면, 실례 좀 하겠소.”
“허락은 하겠습니다만…. 무슨 실례를 말씀하시는- 힉?!”
되묻던 세라스가 숨을 들이켰다.
이안이 왼팔을 그녀의 어깨 위로 두르더니 그대로 눕히듯 끌어당긴 것이다. 동시에 오른팔을 그녀의 망토 위 오금에 걸친 이안이, 단숨에 그녀를 안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