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13
313화
도톰한 남색 양단이 깔린 집무실.
쨍한 햇살이, 벽면을 따라 이어진 창문의 형상을 양단 위에 그려내며 장내를 밝혔다.
“끝내 떠났단 말이군. 대교회는커녕 성지에는 발도 들이지 않은 채 말이야.”
그 끝, 고급스러운 원목 책상에 앉은 중년 남자가 읊조렸다.
반백의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금실로 기도문과 루 솔라의 상징을 새겨 넣은 고급스러운 법복을 걸친 자였다.
그가 앉은 고풍스러운 나무 의자 뒤편의 벽면에도 황금으로 만든 원이 걸려 있었다.
“그렇습니다. 교구장.”
대답한 건 그의 맞은편에 앉은 사제였다. 황금 원이 새겨진 새하얀 두건 망토를 걸친 채였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흰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중년 사제, 교구장이 혀를 차며 콧잔등을 씰룩였다.
“교단을 외면하고 황제의 개가 되는 것을 선택하다니. 불경하기 그지없군. 그 기만으로 가득한 괴물의 대행자다워.”
두건 사제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 짙어졌다.
“교단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길 바라는 것이겠죠. 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 갈릴 테니까요.”
“성자 대행으로 공인된 자가 성지에도 발을 들이지 않고 성하조차 뵙지 않았는데.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단 말인가?”
“그는 늘, 가장 어두운 곳만을 찾아다니니까요. 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교구장.”
읊조리듯 조곤조곤 말한 사제가 잠시 말을 멈췄다. 교구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게다가 그가 향한 곳은 북부 전선입니다. 침식이 예정된 지금, 또다시 자신을 어둠 한복판으로 내던지는 고결한 선택을 한 것이죠. 빛을 등진 채 말입니다.”
“뭐라…?”
교구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황제와 그가 어떤 밀담을 나누었는지는, 아직 성황령에도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까.
두건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오늘 알게 된 사실입니다. 불경과 신성 모독을 논했다간, 역풍을 맞게 될 겁니다. 그러기 위해 발표를 미루는 거겠죠.”
“황제에게 알랑방귀나 뀌어대는 간신배들이 기뻐하겠군. 무엇이 진정 찬란한 여신을 섬기는 길인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것들….”
교구장이 낮게 침음했다.
이안 호프. 그 거짓 선지자가 나타난 뒤로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물론 세상에 차근차근 어둠이 덮이고 있었지만, 백성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자가 자신들을 구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찬란한 여신에게로 향해야 할 가장 순수한 믿음이 갈피를 잃은 것이다.
교단 내부의 의견도 갈리고 있었고, 그건 의회도 마찬가지였다.
본래라면 지금쯤 그들은 교단의 발원권을 장악해야 했고 그를 바탕으로 원탁 의회도 이끌어나가고 있었으련만.
심지어 이안 호프가 황제의 손을 잡은 데다 황제가 그를 전선으로 보냈으니, 교단이 황제의 무능과 불경을 책잡을 명분도 사라진 셈이었다.
교단 내부의 균형뿐만 아니라 황실과 교단의 균형도 깨진 것이다.
“…과연, 걸어 다니는 혼돈에 걸맞은 행보로군. 그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빠짐없이 그에게 눈먼 자들과 혼돈만이 남으니. 이 명확한 사실을 어째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지 모를 노릇이야….”
“저들을 미워하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그저 눈이 멀고 귀가 먹었을 뿐입니다. 교구장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자네는, 어느 순간부터 자주 그자를 옹호하는군.”
교구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자가 더 높이 날아오르기를 바라니까요.”
“뭣이…?”
사제가 내뱉은 말에, 교구장의 미간에 더 깊은 골이 패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은 두건 사제가 말을 이었다.
“그래야 그가 추락할 때, 만인이 더 확실히 알게 될 겁니다.”
“……!”
“찬란한 빛을 위해 가시밭길을 택한 것이 진정 누구인지. 빛의 시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자가 얼마나 모순과 위선으로 가득한 존재인지.”
말이 이어지는 동안 교구장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옳은 말이오. 주교.”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그가 사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우리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가능한 일일 테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니 그 거짓 구원자는 사라져야 한다네. 그 기만의 가면 속에 감춰진 본모습도, 드러나야 하고.”
사제의 미소가 설핏 굳어졌다.
“…그 자와 충돌하는 건 좋은 결정이 아닙니다. 교구장. 특히 지금은요.”
“충돌하지 않을 걸세. 혼돈은, 더 큰 혼돈으로 다스려야 하는 법이지.”
“…호오.”
비로소 주교가 낮은 탄성을 흘렸다. 계속 해보라는 듯한 시선에, 교구장이 말을 이었다.
“북부의 성전사들과 정화대를 불러들일 걸세. 우선 우리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자들부터. 성하는, 내가 설득하도록 하지.”
교구장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북부의 초인이 북부에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겠나. 게다가 전선은, 늘 손이 부족하고.”
“전선에 고루 전력을 분배하자는 명분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요.”
고개를 주억거린 주교가 교구장을 마주 보았다.
“저라면 우리의 성전사들은 남부로 보내겠습니다. 동부 전선을 양보해야, 성하를 설득하시는 데에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역시 현명하군…. 그러겠네. 역시, 자네의 조언은 늘 길을 밝혀 주는군.”
교구장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읊조렸다. 주교가 슬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은 그저 조언만 드리러 온 건 아니었습니다.”
“뭔가 제안할 게 있나 보군.”
“그자의 검이, 대교회에 들지 않았습니까.”
“성자의 기사…. 그자에게 볼일이 있었던 거군.”
교구장의 입매가 삐뚜룸하게 말려 올라갔다. 햇빛이 내리쬐는 장내로 시선을 돌리며, 그가 읊조렸다.
“여신께선 참으로 자비로우시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군. 거짓 구원자를 섬기는 눈먼 자에게까지 차별 없이 은총을 내리시다니. 그것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말이야. 지금은 의식을 치르고 있다지.”
“맞습니다. 아주 겸손하며 신실하다더군요.”
“그를 배제하자는 제안을 하려는 거라면, 어렵네. 알고 있겠지만, 그는 이미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니. 저들에게 명분을 내어 줄 수는 없어.”
“배제하자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이어진 주교의 말에, 교구장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그럼?”
“그를 우리의 일원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멈칫한 교구장이 주름진 턱을 어루만졌다.
“자격은 충분하네만…. 그 역시, 쉽지는 않을 것 같군.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거짓 구원자를 따랐다 알려져 있으니.”
“시도는 해볼 수 있겠죠. 그는 지금 우리 곁에 있고, 실패한다 해도 떠나보내면 그만이니까요.”
그제야 교구장의 눈빛이 변했다.
은밀하고 신중하게만 진행한다면, 잃을 것이 없는 계획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은 것이다.
교구장이 읊조렸다.
“만약 그자가 진실의 눈을 뜨게 할 수만 있다면…. 거짓 선지자를 지키는 것이 아닌, 찌르는 검이 되겠군. 가장 가까이에서.”
주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벽에 걸린 황금의 원이 그의 눈동자에 비춰 아른거렸다.
그가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교단의 순수를 증명할, 가장 찬란한 검이 될 겁니다.”
***
저 먼 동쪽에서 번진 번쩍임이, 하늘을 뒤덮은 잿빛 먹구름을 선홍색으로 물들였다.
쿠르릉…. 쿠릉….
천둥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떤 거대한 괴물의 울부짖음처럼 들리기도 하는 굉음. 사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건 검은 벽이 토해내는 포효나 다름 없었으니까.
이어진 또 한 번의 번쩍임에, 관도 위를 나아가던 백마, 닐라가 콧김을 뿜으며 헐떡였다.
“별 거 아냐. 진정해.”
이안은 방한 장구 사이로 드러난 녀석의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닐라가 투레질을 하며 고개를 털었다.
사실, 정신을 잃고 날뛰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할 수 있었다. 본래 말은 겁이 아주 많은 짐승이 아니던가.
닐라의 숨결이 안정되는 것을 느낀 이안은, 무심하게 육포를 질겅대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저 앞에 솟은 잿빛 성벽에서 멈췄다.
‘더럽게 칙칙하네….’
하지만 그 사실이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제도를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마주한, 제대로 된 도시였으니까.
변방과 북부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면서, 거짓말처럼 행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지도를 잘못 읽은 탓에 예정보다 서북쪽으로 더 깊이 들어간 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간신히 다시 방향을 잡은 끝에, 마침내 버르딘에 도착한 것이다.
‘…아마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가 마주친 도시는, 성벽 대신 나지막한 담벼락만 두른 작은 마을 하나가 전부였다. 심지어 텅 빈 건물만 남은 유령 도시였다.
변방의 위협이 갈수록 가시화되는 데다 출입까지 금지되면서, 마을을 아예 폐쇄해 버린 것이다.
주민들은 서부로 이주하게 됐고, 버려진 마을은 국경 순찰대의 전초 기지로 쓰이고 있었다.
텅 빈 마을 한복판의 게시판에 덩그러니 붙은 명령서를 보고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마을 전체를 하루 아침에 이주시키는 건, 제국이기에 가능한 짓거리일 터였다. 물론, 서부의 재건이 그만큼 중요하기도 했겠지만.
물론, 이안은 그 사실에 딱히 불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쨌건 그가 하룻밤을 보내는 데에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변방의 난민들과 달리 그는 순찰대와 마주치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땔감을 구하기도 편했다.
엘리야가 새로 양념해 준 보존 식량들도, 어설픈 음식들을 먹는 것보단 나았다.
‘교회만 멀쩡했어도 완벽했을 텐데.’
징표는커녕, 촛대까지 죄다 챙겨간 텅 빈 교회를 떠올린 이안이 낮게 콧방귀를 흘렸다.
어쨌건. 지난 일주일 여는 평화롭고 고독하고 홀가분함과 동시에, 익숙한 암흑시대의 본모습을 상기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시 익숙해져야 할 모습이기도 했다. 북부는 물론이고, 침식이 일어난 뒤의 중앙도 더는 예전 같은 모습은 아닐 테니까.
“멈추시오.”
성문 앞, 비스듬하게 기대 서 있던 경비병이 내뱉었다. 투구도 삐뚤게 쓴 놈이었다. 멈춰 서는 이안과 닐라를 훑어본 그가, 툭 내뱉었다.
“용병이오?”
“북부로 가는 여행객이오. 하루만 묵고 떠날 것이오.”
“여행객이라…. 이런 시기에.”
경비병이 턱을 어루만졌다. 신분증을 확인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한 표정.
물론, 이안은 그의 표정에 담긴 다른 의미를 읽었다. 품에 손을 넣었던 이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은빛 궤적이 경비의 품으로 포물선을 그렸다.
“능숙한 걸 보니, 확실히 여행객이시군.”
냉큼 받아든 경비병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변경 지역에 접어들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 나게 하는 미소였다.
그가 한결 너그러워진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버르딘은 처음이신가? 궁금한 게 있다면 물으시오.”
제대로 찾아온 게 맞군.
내심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마구간과 교회는 어디에 있소?”
“마구간은 성문을 지나서 우측으로 가면 바로 있소. 교회는 마을 중앙의 교차로에 있소. 첨탑이 있으니 한눈에 찾을 수 있을 거요.”
“여관은?”
“여관은 교회의 서쪽 대로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면 바로 있소. 아마, 방이 한두 개쯤은 남을 거요.”
“나 같은 여행객들이 꽤 있나 보군.”
경비병이 낮게 코웃음 쳤다.
“돈 벌러 왔다가 눌러앉았거나, 곧 벌러 갈 놈들이 대부분이지. 물론, 남몰래. 요즘 변방 국경을 넘는 건 불법이라서 말이오.”
아, 그래. 용병들이란 말이지.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경비병이 덧붙였다.
“당신은 운이 좋은 편이오. 요즘은 해가 지면 바로 성문을 닫고, 아침까지 열어 주지 않으니까. 오늘 같은 날은 특히. 좀 전에, 보셨잖소?”
“마물들이 출몰하고 있소?”
“아직은. 하지만 멀지 않았다는 소문이 많아서, 다들 불안해하고 있소. 현실이 될 때를 기다리는 승냥이 같은 놈들도 있긴 하지만.”
이안은 낮게 웃음 지었다. 지금은 이렇지만, 몇 달만 지나도 검은 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될 터였다.
“정보 고맙소.”
이안은 느긋하게 성문을 통과했다. 무채색에 가까운 도시의 전경이 설핏 드러났다.
역시. 사람 살 곳은 중앙뿐이라니까.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마구간으로 향했다. 꽤 큰 마구간이었다. 북부와 변방을 오가는 여행객들이 많았을 때는 제법 북적였으리라. 지금은 보관 중인 말이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다.
“훌륭한 말이군요. 나리.”
비쩍 마른 마구간지기가 다가왔다. 말에서 내린 이안이, 그에게도 은화를 하나 던지며 덧붙였다.
“가장 좋은 걸 먹이고, 가장 깨끗한 곳에서 재워주시오. 똑똑한 녀석이니, 굳이 묶지 않아도 문제 일으키지 않을 거요.”
“예. 며칠이나 묵으실 겁니까?”
“하루. 잔돈은 가지시오.”
“은총 받으실 겁니다. 나리.”
마구간지기가 싱글대며 몸을 돌렸다. 이안을 돌아본 닐라가 작게 투레질했다.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보자.”
녀석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린 이안이 몸을 돌렸다.
서늘하고 질척한, 어둠이 깔린 거리의 전경이 펼쳐졌다.
겨울이 될수록 해가 짧아지는 건, 비단 본래 세상에서만 있던 현상은 아니었다. 이 세계 인간들은 루 솔라가 휴식하는 기간이라 여기긴 하지만.
어쨌든, 거리에는 행인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경비병의 말대로, 좀 전에 있었던 침식의 전조 현상 때문일 터였다. 도시 전체에 깔린 불안과 걱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평화롭고 생기 넘치던 제도에 비하면,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분위기였다.
어쩌면 이 도시도 머지않아 이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중앙의 관료들은 적어도, 백성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기군.’
이안은 곧바로 여관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마도, 황제가 보낸 조력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놈들을 만나기 전에 끝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이안이 발을 들인 건 교회였다. 뾰족한 첨탑을 가진 낡은 벽돌 건물이었다.
회관에 발을 들이자, 늙수그레한 사제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쥔 채 다가왔다. 해가 진 뒤에 찾았으니, 뭔가 다른 용무가 있으리라 여긴 게 분명했다.
“기도실이든 뭐든, 크고 조용한 방 하나를 통째로 빌리고 싶소만.”
이안은 손에 든 것을 그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공손하게 받아든 사제가, 손아귀에서 번진 황금빛에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따라오십시오.”
“주위로 아무도 못 오게 해 주시오. 조용하게 진행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기도가 있으니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사제가 몸을 돌렸다. 이안은 느긋하게 그의 뒤를 따라 교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군.’
변방과 변경 지역이 가진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가장 큰 기도실입니다. 안에서 문을 잠그실 수도 있고, 창도 닫으실 수 있습니다.”
낡아빠진 복도 너머, 기도 보다는 고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두꺼운 나무문을 열며 사제가 말했다.
널찍한 내부를 눈에 담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쓸 수 있겠소?”
“자정 전까지만 비워 주십시오.”
대답한 사제가 몸을 돌렸다.
금화면 내일 아침까지라도 비워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내심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온 이안은, 곧바로 문을 닫고 문 위에 달린 창문까지 가리는 빗장을 걸었다.
벽면에 뚫린 작은 창문에서 흐릿하게 스며드는 빛. 그리고 벽면의 촛대에 걸린 세 개의 촛불이, 낡은 책상과 두 개의 의자만 덩그러니 놓인 넓은 장내를 밝혔다.
딱 좋은 공간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아공간에서 작은 부적을 꺼내 들었다.
곧이어 손아귀에서 불꽃이 튀었다.
화륵-
불꽃이 그대로 부적에 옮겨붙었다.
이안은 부적을 방의 빈 공간에 던졌다. 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부적이, 한순간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불티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솨아아아-
번쩍이는 불티 한복판에서 진언이 번졌다. 진언 주위로 빛무리가 장막처럼 넘실댔다.
일련의 과정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걸음을 옮긴 이안은, 의자에 앉고서야 비로소 설핏 미간을 좁혔다.
‘왜 안 나타나지.’
넘실대는 빛무리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언의 빛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그 너머로 흐릿한 실루엣이 드리운 건, 진언이 거의 빛을 잃기 직전이었다.
다시 밝아지는 빛무리 너머로, 황금빛 안광이 번졌다.
“…너는 늘 내 예상을 벗어나는구나. 이안. 이번에도 이렇게 빨리 나를 찾을 줄은 몰랐거늘.”
남자 같기도 여자 같기도 한 미성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백금룡, 아르케아스. 새하얀 옷을 걸친 채 뒷짐을 지고 선 그를 눈에 담으며, 이안이 비로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난 또, 주무시느라 못 오시는 건줄 알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