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15
315화
“네게 선택권을 줄 생각이었었지. 처음에는.”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아르케아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바뀌더구나. 이렇게 해야 내가 더 안심이 될 것 같아.”
아르케아스가 활짝 펼친 손바닥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니 어서 줘 보렴. 어차피 저번만큼 큰 상을 받을 수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었잖니. 그중에서 가장 좋은 거란다.”
“순 제멋대로시군….”
이안이 입맛을 다시며 읊조렸다.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더 늘었구나. 본래 용과 대행자는 서로 닮는 법이지.”
이젠 돌려 까기까지.
결국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진은 강철 장검을 검집째로 분리한 그가 아르케아스에게 내밀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군. 아주 낯이 익어.”
냉큼 받아든 아르케아스가, 다시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왼손으로 검 자루를 쥐었다. 오른손을 움직여 검집을 벗기자, 어둠을 밝히듯 새하얀 검날이 그의 얼굴 앞으로 드러났다.
“정화자에게서 빼앗았구나. 네 장갑이 그렇듯이 말이야. 이게 내가 만든 검이라는 걸 알고 있니?”
“몰랐소만. 그랬소?”
“그렇단다. 진은을 녹이는 건 용암이나 성화. 그리고 용 정도나 가능하지.”
가로로 드리운 검날 너머, 노란 눈동자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진은은 사실, 방어구를 만들 때 가장 빛을 발하는 금속이란다. 단단하고 가볍잖니. 물론 그만큼의 진은을 구하는 것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것도 어려워서 강철을 섞는 게 대부분이지만.”
검집을 책상 위에 올려 둔 아르케아스가, 검날을 허벅지에 얹듯 내리며 말을 이었다.
“만들 수만 있다면 아주 대단한 물건이 나오게 되지. 내 둥지에도 순수 진은으로 만들어진 방어구가 몇 개 있단다. 오래전, 난쟁이 명인들이 만들어 준 것이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는 걸작이야.”
둥지에 정말 온갖 보물을 산처럼 쌓아두고 있나 보네.
이안은 내심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용과 계속 함께하다 보면, 그 보물 중 일부를 손에 넣을 날도 오게 되리라.
아르케아스가 오른손 손가락으로 가볍게 검날을 튕겼다.
팅, 청량한 소리가 번졌다.
“하지만 진은이 충분하더라도, 무기에는 강철을 섞을 수밖에 없단다. 무게를 맞춰야 하잖니. 물론 순수 진은에 비해 손색이 있을 뿐, 아주 뛰어난 무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이 검도 그렇고.”
동시에 아르케아스의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력의 파장이 그의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그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끝에 황금빛 마력이 실오라기처럼 모여들기 시작하는 가운데.
“여기에 용의 주문이 더해진다면, 명검이라 불릴 수도 있을 거란다.”
이안을 마주 본 아르케아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의 눈동자에 황금빛 마력이 소용돌이치듯 일렁였다.
“내가 준비하는 동안, 엘리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 주지 않으련? 함께 다니는 동안 어땠는지. 앞으로는 어떨지.”
아르케아스가 느긋하게 덧붙였다.
내심 궁금했던 것이리라.
하긴. 설명이 너무 짧긴 했지. 피식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여정 내내 제 몫을 톡톡히 해냈소. 똑똑하고 꼼꼼한 녀석이잖소. 손도 야무지고, 음식 솜씨가 특히 뛰어났지. 물론 아시다시피 호기심이 좀 과한 편이고, 말끝마다 대부라고 불러대긴 했소만.”
“저런. 네가 싫어할 것이라 일러두었거늘. 결국 그렇게 불렀나 보구나.”
“미리 알려 주셨다기엔, 만나자마자 그렇게 부르던데.”
“이해하렴. 난쟁이는 이상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잖니.”
이안의 대답에 아르케아스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 와중에도 손가락에 모여드는 실오라기 같은 마력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풍성한 백금발도 조금씩 넘실거려서, 지금 그의 모습은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끔 그 아이를 만나주렴. 나 대신. 그 아이가 싫은 게 아니라면.”
“그럴 생각이긴 하지만. 아니어도 안심하셔도 될 것이오. 육각 연맹이라는 이름의 상인 연합이 그 녀석의 연구를 후원할 테니까. 날 찾아왔던 황녀, 세라스 아스트레이아도 후견인이 되어 주기로 했소.”
“황제의 둘째 딸이로구나. 그래… 야망이 있는 아이였지.”
황족들의 이름도 다 아는 건가.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그래서 엘리를 이용하려 들지 말라 단단히 말해 뒀소. 나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니, 허투루 듣진 않았을 것이오.”
“어련히 잘했겠지. 네가 철두철미하다는 건 나도 이미 잘 알잖니. 육각 연맹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새로 만들어진 단체인가 보구나.”
“그렇소. 어쩌다보니 내가 그들의 특별 고객이 되어서 말이오. 엘리도 겸사겸사 그렇게 됐소.”
“힘을 많이 실어줬구나. 정말 대자를 보살피듯 신경을 써 준 거야.”
마력이 맺힌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본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다. 이안.”
동시에 마력을 머금은 그의 손이 진은 강철 장검의 검면으로 향했다. 십자 막이 바로 위의 새하얀 표면에 손가락이 닿았다.
솨아아-
동시에 검날 표면에 샛노란 문양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저 진언만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진언 회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즉석에서 회로를 만들어낸 건가.’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이안은 내심 감탄을 흘렸다.
그의 손등에 새겨진 백금 방벽은 미리 회로를 준비해 왔을 테지만, 이번엔 이 자리에서 구성한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솨아아….
검지와 중지가 검면 위를 천천히 미끄러졌다. 진언 회로가 주위로 차근차근 새겨졌다.
회로가 완성된 건 검날 중간 정도쯤에서였다. 검 끝쪽으로 뾰족하게 각진 선이 회로를 마감하자, 아르케아스가 손을 뗐다.
그의 검지와 중지에 일렁이던 마력이 실오라기가 풀리듯 흩어졌다.
“더 대단한 주문을 새겨 주고 싶지만. 이 이상은 신들이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구나.”
아르케아스가 반개하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
새하얀 검날 하단. 십자 막이 위부터 검날 절반까지 길게 이어진 진언 회로는 아직도 금빛 마력을 머금고 일렁였다.
“검도 이 이상의 주문은 온전히 견뎌내지 못할 거야.”
그 표면을 눈으로 훑은 아르케아스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아무리 대단한 주문이라도, 사용할 때마다 검을 손상시킨다면 의미가 없는 거잖니.”
“무슨 주문을 새기신 거요?”
“이름은 없단다. 그저, 검이 더 길고 날카로워지게 했지.”
오른손으로 검날을 쥔 아르케아스가 자루를 이안에게 내밀었다.
“자. 직접 쥐어서 확인해 보렴. 너는 물건 보는 눈이 남다르잖니.”
이안은 선선히 손을 뻗어 자루를 쥐었다. 아르케아스가 손을 놓은 순간, 비로소 진언 회로에 일렁이던 황금빛이 잦아들었다.
진언 회로는 검면에 음각된 것처럼 남아 있었다. 빛에 비춰 보지 않으면 회로의 존재를 거의 알아챌 수 없을 터였다.
검날을 내려다보던 이안의 입에서 이내 낮은 탄식이 번졌다.
“훌륭하군….”
물론, 그의 눈은 정보창을 확인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새롭게 추가된 각인 스킬을.
아르케아스는 이름이 없다고 했지만, 정보창에는 있었다. 백금의 발톱. 흑검에 새겨진 역천의 송곳니가 그랬듯, 활성화해서 사용하는 스킬이었다.
다만 이건 그의 마력이나 혼돈력이 아니라, 백금 방벽처럼 진언 회로에 담긴 마력을 사용했다.
한 번 활성화하면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써 봐야 알겠지만.
어쨌건 칼질 한두 번에 마력이 고갈될 것 같지는 않았다.
“용의 무구나 다름없어졌군.”
“다름없는 게 아니라, 용의 무구가 된 거란다. 네 손등에 새겨진 방벽이 그렇듯이.”
아르케아스가 첨언했다. 미소 지은 이안이 검을 날이 위로 가게 고쳐 쥐었다.
“만약 검이 부러져도, 회로만 무사하면 계속 주문을 사용할 수 있소?”
“벌써 검을 부러뜨릴 생각부터 하고 있구나.”
낮게 웃음을 터뜨린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자면, 그래. 그럴 거야. 진언 회로가 손상되지만 않는다면, 새겨진 주문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겠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한 그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검날이 부서지면, 무리해서 계속 쓰지 말고 내게 가져오렴. 다시 고쳐주마. 물론, 진언 회로가 무사하다면 말이야.”
사후 관리까지 훌륭하군.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아르케아스가 이걸 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검은 벽을 넘어온 마물들을 상대할만한 무기를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물론 화로의 사원을 들른다면, 새로이 날을 벼린 단죄의 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좋은 검은 많을수록 좋았다. 게다가 전선에서는 눈에 띄는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두고두고 잘 쓰겠소. …언젠가, 역천룡의 심장을 찌를 때에도.”
“……!”
이안의 대답에, 아르케아스의 미소가 또 한 번 굳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내가 어두워지거나 숨이 막히는 존재감이 번지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갔을 뿐이었다.
“사실은 귀하도, 언젠가 내가 그자와 싸우게 되리란 걸 예감하고 계시잖소?”
그의 시선에 태연하게 대답한 이안이, 오른손의 검과 왼손을 차례로 흔들었다.
“귀하가 선물해 주신 방패라면 용의 숨결이나 주문도 막아낼 수 있고, 이거면 용의 비늘도 가를 수 있잖소. 그자의 주문이 새겨진 마검보다, 이걸 쓰는 게 더 효과가 좋겠고.”
“…….”
아르케아스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의 입매가 다시 말려 올라갔다.
“역시. 너는 그를 죽이려는 생각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구나. 과연 용살자라 해야 할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그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네가 많은 용의 무구를 손에 넣은 건 사실이지. 심지어 나의 진원까지 삼켰고, 다양한 유물과 성물까지 가지고 있지. 거기다 네 본신의 능력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말투와 달리 착 가라앉은 노란 눈동자가 이안의 얼굴을 훑었다.
“지금의 너는 말 그대로 초인이라 할 수 있겠지. 어쩌면 그를 죽일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카르하 이후로 네가 처음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안.”
자신의 허벅지에 팔을 괴며 몸을 앞으로 기울인 아르케아스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아직은 아니란다. 지금 네가 그에게 도전하면, 백번 싸우더라도 아흔아홉 번은 패배하게 될 거야.”
“그래도 한 번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오.”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르케아스가 입 끝만 당겨 미소 지었다.
“그 한 번도, 결판을 낼 수는 없을 거다. 내가 그냥 지켜보지 않을 테니까. 말했듯, 너를 끌고 나갈 거란다. 정 언젠가 그와 담판을 짓고 싶거든, 먼 훗날로 미루자꾸나. 네가 충분한 준비가 될 때까지. 네가 더 강해질 때까지.”
“시간이 더 지나도 귀하의 판단이 달라지실 것 같진 않은데 말이오.”
“그렇겠지만. 네 고집을 꺾지 못하는 날은 오지 않겠니?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물론, 나는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만.”
아르케아스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웠다.
아마도 그날이 이안이 죽게 될 날이라 여기는 것이리라.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그를 전장에서 빼낼 생각이기도 할 터였다.
두세 번쯤 반복하면, 그냥 같이 싸워주려나?
내심 생각하며,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합시다. 어차피 당장 일어날 일도 아니고. 벌써부터 입씨름으로 힘을 뺄 필요는 없잖소.”
어차피 아르케아스가 단번에 받아들이리란 기대는 없었다.
그저 화두를 던져둘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아야, 아르케아스도 나름의 방법을 찾을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역천룡과 혼자 싸우는 건 미친 짓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 역천룡은 게임일 때보다 강할 테고, 이안은 그때와 달리 끝없이 반복해서 재도전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동료들에게 역천룡과 싸우자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같이 죽으러 가자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결국, 그와 함께 싸울 존재는 아르케아스 뿐이었다.
“…그래. 내가 또 잔소리가 길었구나. 이상하지? 최근 들어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드니 말이야.”
이안의 속내를 전혀 알지 못한 듯 머쓱하게 읊조린 아르케아스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가 자신의 백금발을 쓸어넘기며 덧붙였다.
“어차피 넌, 그자의 감옥을 찾을 수도 없을 텐데. 아무래도, 나도 늙는 모양이야.”
“이미 대륙에서 두 번째로 늙으시지 않았소?”
이안의 농담에 피식 웃으며, 아르케아스가 책상에 놓인 검집을 건넸다. 이안이 검을 검집에 되돌리는 사이, 술병을 집어 든 아르케아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서 그 뒤로, 그자의 또 다른 하수인이 찾아온 적이 있었니?”
“없었소. 아직은.”
“다행이구나.”
미소 지으며 술을 한 모금 마신 아르케아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당분간은 그자도 네게 관심도 두지 않을 거란다. 침식의 전조를 느꼈을 테니까. 아마도 봉인에 더 큰 균열을 만들어 낼 기회라 여기겠지.”
그가 술병을 내밀며 덧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첫 침식 때에 봉인에 틈을 만들어낸 것 같거든.”
“……!”
술병을 받던 이안이 멈칫했다.
역천룡이 언젠가 봉인을 깨뜨릴지도 모른다는 건, 물론 그도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던 부분이었다.
애초에 놈을 찾아가려는 것 자체가, 놈이 힘과 자유를 되찾기 전에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이안이 멈칫한 건 전혀 다른 가정이 뇌리를 스쳐서였다.
‘설마, 그놈도…?’
아주 섬뜩한 가정이었다.
침식이 예상보다 빨리 일어났듯, 역천룡이 봉인을 깨뜨리는 순간도 그럴지도 모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