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18
318화
노골적으로 뜨끔한 얼굴이 된 미구엘이 굳어지는 사이.
“어… 그게요….”
루시아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우물댔다.
역시. 이상하다 싶더라니.
이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미구엘은 그렇다 쳐도, 루시아까지 조력자랍시고 합류한 건 의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사원의 차기 성녀가 아니던가.
아무리 이안과 이미 친분이 있다 해도, 위험할지도 모르는 임무에 투입할 리 없었다. 차라리 사원장인 화로의 성녀가 직접 나온다면 모를까.
“뭐, 밤중에 몰래 가출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술잔을 입에서 떼며 덧붙인 말에 미구엘이 반사적으로 헛기침을 했다. 루시아의 미소가 더 흐물흐물해지는 것까지 확인한 이안이, 결국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말 그런 거였군….”
“이, 이안 님을 돕는 일인데, 다른 사제님들이 가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침착을 유지하려 애쓰는 게 분명한 말투로 내뱉은 루시아가, 이내 턱 끝을 살짝 치켜들었다.
“당연히 제가 해야죠. 안 그래요? …아닌가요?”
이안의 시선에, 그녀의 고개가 슬그머니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식탁에 얹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채비도 단단히 해서 나왔고, 원장님께 장문의 편지도 남겼어요. 우리가 여기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다른 분들이 오지 않은 걸 보면, 제 편지를 읽고 그냥 우리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신 게 분명해요…. 정말로요….”
이안은 대답 대신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눈동자만 굴리고 있던 미구엘이 멈칫했다. 이미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그게. 내 잘못이오.”
이내 억지 미소를 지은 그가 내뱉었다.
“내가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않았소. 그러니까-”
“아뇨. 미구엘은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밀어붙인 거예요. 미구엘은 제가 걱정돼서 따라 나온 거고요.”
루시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다시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번에 이안 님을 뵙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쉬웠거든요. 이번에는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서, 그래서 일단 실행에 옮긴 거예요.”
“혼내려고 한 말이 아니야. 나도 다시 만나서 좋으니까.”
이윽고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멈칫한 루시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정말요…? 이안 님도 그러세요?”
“당연하지. 덕분에 화로의 사원까지 가는 길이 쓸쓸하진 않겠네.”
“…사원이요?”
이어진 말에 루시아의 미소가 어리둥절해졌다. 눈을 깜빡인 녀석이 덧붙였다.
“사원에는 또 왜 가셔요…?”
“왜긴. 어차피 들를 생각이었어. 경이 남아 있는지도 확인하고, 내 칼도 찾아야 하니까. 성녀께 전선에 합류해 달라고 요청도 할 생각이고.”
담담하게 말을 이은 이안이 미구엘을 슬쩍 일별하고는 덧붙였다.
“게다가 난 설원지대로 갈 거다. 춥고 위험한 지역을 돌아야 한단 얘기지. 저 녀석은 모를까, 넌 사원에 두고 갈 거야.”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던 듯, 루시아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얼빠진 표정은 특히 메브와 닮아 있었다. 맥주로 입을 축인 미구엘이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설득할 기회를 주실 수는 없을까요?”
간신히 표정을 수습한 루시아가 내뱉었다. 미구엘이 낮게 침음하며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가운데, 이안의 눈을 마주 본 그녀가 덧붙였다.
“이안 님이 굳이 다시 사원을 들르지 않으셔도 되는 이유들이 있거든요.”
어떻게든 따라오고 싶은 거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강철 장갑을 벗으며 턱짓했다.
“먹으면서 하자. 음식 다 식겠다.”
“…네.”
포크를 든 이안이 앞에 놓인 소시지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별 볼 일 없는 맛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미구엘도 재빨리 스튜 그릇을 들었다. 허겁지겁 입에 넣는 걸 보니, 배가 고팠지만 분위기상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먹는 둥 마는 둥 스튜를 몇 입 떠먹은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우선… 사원에 가셔도 언니는 없어요. 한참 전에 떠났거든요.”
“…아, 그래?”
역시는 역시군.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순간 멈칫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짧게 혀를 찬 그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구운 닭의 다리를 잡아 뜯었다.
“이안 님의 검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뒤이어 루시아가 덧붙였다. 고기를 한 입 베어 문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아직도?”
“네. 사원장, 그러니까 성녀께서 특별히 공을 들이기로 하셨거든요. 이안 님께 진 빚을 갚을 기회라고요.”
루시아가 포크를 단죄의 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로 들었다.
“검에 담긴 신성의 근원에, 타오르는 여신의 축복을 더하기로 했죠. 그래서 분리한 검날을 화로 가장자리에 넣고 축성 의식을 진행하고 있어요. 반년 쯤 걸릴 의식이라고 하시더군요.”
“반년이라….”
“그때까지만 해도, 침식의 전조가 시작될 건 몰랐으니까요. 언니도, 이안 님이 찾아오시는 건 적어도 반년은 걸릴 거랬고요.”
“그래. 그랬었지.”
이안은 낮게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서부에서 메브와 나눴던 이야기대로라면, 그는 아직도 신나게 중앙을 돌아다니고 있어야 했다.
“의식이 끝나야 검날을 성화에 녹여 다시 날을 담금질할 수 있을 거예요. 듣기론, 진은을 섞을 거라더군요. 성검에는 진은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요.”
…빚을 이자까지 쳐서 갚겠네.
아무래도 정말 대단한 검이 완성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검은 벽을 넘기 전에만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으면 충분했다.
어차피 당장은 용의 마법이 더해진 진은 강철 장검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사원은 이미 자치령에 협조하기로 결정을 내렸어요. 사제단을 조직해 전선의 각 요새에 파견할 거예요. 성녀께선 남으시겠지만요.”
“본인은 남으신다고?”
이어진 루시아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그사이에도 닭 뼈를 접시 위에 내려놓고, 스튜를 떠먹기 위해 수저를 집어 드는 중이었다.
루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성화를 계속해서 지피셔야 하거든요. 도시의 장인들이 성화를 계속해서 조금씩 옮겨 가 병장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전부, 전선으로 보낼 것들이죠.”
“신성이 깃든 병장기들을 만들고 있단 거냐?”
“훨씬 더 단단하기도 하고요. 북부 전선에 우선적으로 공급하고, 다른 전선으로도 보낼 거예요. 다는 아니라도, 많은 병력이 무장할 수 있겠죠.”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튜를 우물댔다.
화로의 성녀가 참전하지 못하는 건 물론 아쉬운 일이었지만.
성화의 신성이 깃든 병장기로 무장한 군단과 그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전자였다.
성물만큼의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해도, 마물들을 상대로는 어지간한 마법 무구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할 터였다. 심지어 도시의 모든 장인이 매진하고 있다면, 상당한 물량을 공급할 수 있으리라.
‘확실히, 게임보단 상황이 훨씬 좋아진 것 같은데.’
이제야 밸런스가 좀 맞는 것 같달까. 맥주잔을 든 이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가 개고생하며 만들어낸 작은 변화들이, 어느새 거대한 흐름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의 결실을 맺고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방심한 건 아니었다.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변수를 숱하게 겪지 않았던가.
준비와 대비는 아무리 많아도 과하지 않았다. 동원 가능한 전력 역시.
“성화를 지피는 건 네가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덧붙인 이안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화로의 관리자는 한 명인 게 원칙이라서요. 성화를 다시 타오르게 하고 다음 대의 성녀로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제 역할은 다한 셈이에요. 적어도 앞으로 십 년간은요.”
자신의 흉갑에 손을 얹은 그녀가 덧붙였다.
“차기 성녀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저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수행 사제에요. 혹은, 타오르는 여신의 사도이거나요.”
“그렇군….”
결국, 화로의 성녀가 전선에 합류할 수는 없는 것이리라.
깔끔하게 포기하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읊조렸다.
“…내가 굳이 사원을 들를 필요가 없다는 건 알겠어.”
술잔을 내려놓은 그가 루시아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게 널 데리고 다닐 이유가 되지는 않아. 루시.”
“저도 제가 아직 부족하다는 건 알아요. 타오르는 여신께 계시를 받았고 훈련에도 매진했지만, 실전은 또 다른 거니까요.”
차분한 말투와 달리, 초조한 듯 혀로 입술을 축인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언젠간 결국,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고 제 몫을 다해야 할 순간이 올 거예요. 그때를 대비할 실전 경험을 쌓기에, 지금보다 좋은 상황은 없잖아요. 이안 님이 함께 계시고, 미구엘도 곁에 있으니까.”
이안에 이어, 고기를 우물대는 미구엘까지 일별한 그녀가 덧붙였다.
“원장님도 같은 생각이실 거예요. 그래서 저를 잡으러 오지 않으시는 거고요. 남기고 온 편지에도 같은 내용을 썼거든요. 이안 님을 조력하면서, 필요한 경험을 쌓고 오겠다고요. 그러니까….”
마른침을 삼킨 루시아가, 조금은 애다운 간절한 눈빛이 되어 덧붙였다.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흠….”
이안은 손가락으로 입가의 기름을 닦으며 침음했다.
사원 생활이 답답해서라거나,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볼 생각 같은 거였다면 단칼에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루시아의 말투나 눈빛에는 그런 치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열의만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애를 잘 키워줄 줄 몰랐는데.’
하긴. 떡잎부터가 남다르긴 했지.
생각하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이왕 실전 경험을 해야 한다면, 내가 보는 앞에서 하는 게 속이 편하긴 하겠네.”
“역시 그렇죠…?”
루시아의 표정이 설핏 밝아졌다. 입꼬리만 말아 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훈련도 열심히 받은 것 같았고. 아까 건달들을 두들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던데.”
“안 그래도, 다들 피는 못 속인다고 하더군요. 안 그래요, 미구엘?”
“으응…? 아, 뭐. 그거야 그렇지. 저 녀석이 철퇴 휘두르는 걸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인 미구엘이, 장갑에 묻은 기름을 핥으며 웃음 지었다.
“허수아비 대가리를 죄다 터뜨려 놓는다니까. 작다고 깔보다가 머리가 띵 해진 사제가 한둘이 아니오. 맨손 박투도 수준급이지. 나도 관절이 몇 번 부러질 뻔했으니까.”
팔불출 다됐군.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긴. 그저 너스레만은 아닐 터였다. 그 난장판이 벌어졌었는데도, 루시아의 얼굴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없었으니까. 정말 한 사람 몫은 너끈히 해낼 수 있으리라.
물론, 싸움 솜씨가 일취월장한 건 미구엘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용병들과 싸울 때 보여준 체술은, 예전에는 전혀 보여준 적 없는 움직임이었다.
책을 가까이할 성격은 아니었으니, 사제가 된 후로도 무예 수련만 줄창 한 것이리라.
“하지만 트라벨가 까지만 동행할 거다.”
이어진 이안의 말에, 헤실대던 루시아의 시선이 홱 돌아왔다.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그때쯤엔 거기에도 사원에서 파견 나온 사제들이 있겠지. 거기 껴서 사원으로 돌아가. 거기서부턴 미구엘만 데리고 갈 거다.”
“하지만….”
“전선은 나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이야. 내 독단으로 너를 그런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사원에는 물론이고, 메브 경에게도 면목이 없을 거다.”
“…알겠어요. 더는 고집부리지 않을게요.”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가, 이내 빙긋 입술을 말아 올렸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안 님.”
“그래. 이제 식사나 마저 해라. 속 편하게.”
“네…!”
냉큼 포크를 집어 든 것도 잠시, 루시아의 시선이 다시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그런데요, 이안 님.”
“……?”
“만약에, 원장님께서 파견을 허락하신다면요? 그때도 절 두고 가실 건가요?”
그걸 허락할 리가. 내심 코웃음을 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원에서 사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까진, 내가 간섭할 부분이 아니지.”
싱긋 미소 지은 루시아가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입맛이 도는지, 앞에 놓인 소시지부터 크게 한 입 베어 물고 있었다.
“덕분에 콧바람을 조금 더 오래 쐬겠구만. 고맙소. 사실 내심, 다시 형씨 얼굴을 본 거로 만족해야겠다 싶었는데 말이오.”
그 와중에 식사를 끝낸 미구엘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이안을 돌아본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진 않았소. 나도 그렇지만, 루시도 형씨를 엄청 보고 싶어 했거든. 소원 성취한 셈이지.”
거 참 원대한 소원이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식탁 위에 얹어둔 미구엘의 왼손을 슬쩍 턱짓했다.
“손이 아주 멋져졌군. 네가 사제가 된 것만큼이나 인상적이야.”
“아, 이거?”
미구엘이 씩 미소 지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대로 왼팔 팔목 보호대를 풀어버린 그가, 보란 듯이 팔을 내밀었다.
“난쟁이 장인들의 작품이오. 거의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강철 의수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팔꿈치 아래까지 강철로 거의 다 덮여있었고, 어깨부터 상박까지 이어진 가죽띠에 얇고 정교한 철사들을 이어 붙여 고정해 둔 형상이었다.
진짜 주먹처럼 정교하게 생겼고, 움직이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팔목 여기, 이 홈에 쇠뇌도 고정해서 쓸 수 있지. 지금은 위층에 빼놨는데, 이따 보여드리겠소.”
미구엘이 뽐내듯 덧붙였다.
비슷한 걸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의수를 바라보며 내심 읊조린 이안이, 이내 내뱉었다.
“혹시, 손목에서 대포도 나가나?”
“대포…? 뭐, 투석기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
미구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게 손목에서 뭐 어떻게 나간단 거요?”
“…아냐, 아무것도.”
피식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은 이안이, 다시 맥주잔을 들었다.
“잘 어울리는군. 철권이라고 불러도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