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20
320화
순간 멈칫한 미구엘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 그건 그렇소. 그건 닥쳐 봐야 아는 일이긴 하지. 암….”
그의 시선이 다시 채워지고 있는 술잔으로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물론 그저 용병 시절의 버릇이 나온 거겠지만, 어쨌든 이안의 말이 진담이라 여기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안의 말은 반만 진심이었다. 필요하다면 목숨을 놓고 위협을 할 생각이긴 했지만, 정말 죄다 죽여버릴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함께 전선으로 가게 될 소중한 전력들이 아니던가.
“저도 한 잔만 주시면 안 돼요?”
이안이 술병을 내려 놓을 찰나, 루시아가 물었다. 이안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당연히 안 되지. 꿈도 꾸지 마.”
“저는 내년 생일이 지나면 성년이에요, 이안 님.”
“그럼 그때부터 마시면 되겠네. 한 모금 남겨 줄 테니까.”
“…네.”
대답한 루시아가 술병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입맛을 다셔?
“설마, 사원에서 벌써 술도 마시고 지낸 건 아니겠지.”
“가끔 한 잔씩만요. 맛만 보는 것 정도는 괜찮다던데요.”
“누가.”
황급히 입술을 입안으로 오므린 루시아가 시선을 돌렸다. 물론, 이안은 곧바로 범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음미하듯 술잔을 입에 대고 있던 미구엘이, 이안의 시선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이마에 다시 살짝 땀이 돋아났다. 이내 술잔을 슬그머니 내린 그가 주절댔다.
“그… 정말 맛만 보게 한 거요. 맛만. 거, 뭐냐,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는 말도 있잖소.”
물론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애한테 참 좋은 것만 가르쳐 줬군.’
묘하게 용병 느낌이 나던 루시아의 자잘한 언행들이 뇌리를 스쳤다. 죄다 누구에게서 영향을 받은 건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 그래서, 이 술은 어디서 사 오신 거요?”
화제를 돌리려는 듯 황급히 술잔을 내려다본 미구엘이 덧붙였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이만한 술이 넘쳐날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엄청나게 비싼 술인가…?”
“…이름은 나도 몰라.”
혀를 차며 대답한 이안이, 술병을 미구엘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비싼 술이라는 것밖엔. 백금룡께서 선물해 주시고 간 술이다.”
“배, 백금룡…?!”
미구엘의 눈이 커졌다. 그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술병을 내려다보는 사이,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이 된 루시아가 내뱉었다.
“그분을 뵈셨어요? 또 언제요?”
“오늘. 몇 시간 전에.”
루시아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미구엘도 타오르는 여신의 이름을 읊조리며 탄식했다.
이윽고 루시아가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요. 저도 한 번은 꼭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기다리고 있는 게 너희라는 걸 알았다면 그랬을 거다.”
“또 만나 뵐 계획은 없으세요?”
“전선을 지켜낸 후에.”
“그땐 저도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분은 만물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을 가지셨고,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계시단 얘기를 들었거든요.”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그것도 경이 해 준 말이냐?”
“네. 나세르도 그렇게 말했고요.”
그 양반과 만난 게 어지간히 인상적이었나 보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술을 한 모금 삼켰다.
하긴. 아르케아스의 속내는 그도 정확히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역천룡은 물론이고, 교단이나 황실에 대해 품고 있는 본심 역시 이번에야 알게 되지 않았던가.
다른 복심을 품고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검은 벽을 없애는 것이 그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닐지도 몰랐다.
‘순수 교도들 주장처럼 자신의 보이지 않는 족쇄를 풀어버리고 싶은 걸지도….’
물론, 당장은 확실하지도 않고 결론을 내릴 문제도 아니었다. 상념을 떨치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경은 잘 채비해서 떠난 거겠지?”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원에 머문 건 보름도 되지 않았어요. 며칠은 푹 쉬었지만, 그 뒤론 틈틈이 몸을 단련하고 떠날 채비를 했죠.”
“생각보다 더 빨리 떠나셨군….”
“저도 말려 봤는데 소용없었어요. 몇 달 더 머물렀다면 이안 님 소식을 들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럼 여기 함께 올 수도 있었을 테고요.”
“…다시 볼 수 있을 거다. 별문제 없이.”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루시아가 아쉬움과 걱정을 떨치듯 미소 짓는 사이, 술을 홀짝이던 미구엘도 보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소. 메브 경도 경이지만, 그 종자 양반도 장난이 아니더구만. 둘 다 틈만 나면 대련을 했는데, 말이 대련이지 결투나 다름없었소. 눈이 다 핑핑 돌 정도였다니까. 변방에 어떤 끔찍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그 둘을 당할 수는 없을 거요.”
이안이 동의하듯 술병을 그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씩 미소 지은 미구엘이 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새가 모이를 먹듯 홀짝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감사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네요.”
루시아가 문득 입을 연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자, 자세를 바로 한 녀석이 말을 이었다.
“덕분에 가문의 복수를 완수할 수 있었다고 들었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이안 님. 언니의 숙원을 이뤄 주셔서. 그리고 무사히 다시 제 곁으로 보내 주셔서요.”
…원래도 애어른이었는데, 진짜 다 커 버렸네.
고개를 숙이는 루시아를 바라보며, 이안이 낮게 웃음 지었다.
“인사는 이미 경에게 다 받았어. 충분하게.”
“그리고 다시 잘 부탁드려요. 이안 님께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그를 마주 본 루시아가 싱긋 미소 지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그럼 오늘 밤은 잘 먹고 잘 자 둬라. 내일부터는 잘 때 빼고는 종일 이동할 거니까.”
옆으로 시선을 옮긴 그가 덧붙였다.
“미구엘. 너도. 여기서 네가 제일 체력이 약할 것 같으니까.”
“걱정마시오. 흐흐. 하지만 내일 졸다가 안장에서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오늘 이 술은 다 마시고 자야겠소. 그럴 가치가 있는 술이니까.”
미구엘이 너스레를 떨었다. 피식 웃은 이안이 알아서 하라는 듯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시시콜콜한 대화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주로 루시아와 미구엘의 사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
한동안 그다지 마주친 적 없던 언덕과 얼기 시작한 냇물이 흐르는 계곡, 완만한 숲이 이어졌다.
공기에서 겨울 냄새가 났다.
꼬박 하루 한나절이 지나도록, 일행은 단 한 명의 행인도 마주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안이 가장 빠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변방과 인접해 출입이 금지된 관도를 지나고 있었으니까.
갈림길에서 이어진 길 한복판에는, 위험 지역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이 떡하니 솟아 있었다.
미구엘의 말에 따르면 반대쪽도 이렇다고 했다. 그래서 하루 이틀쯤 더 걸리는 길을 빙 돌아서 왔다는 것이다.
“흐, 시부럴. 더럽게 조용하구만.”
덜 가죽으로 만든 두건 망토를 뒤집어쓰고 쪼그려 앉은 미구엘이, 육포를 얹은 칼날을 모닥불 위에 얹은 채로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어둠에 휩싸인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낮은 칙칙하고 밤은 어두웠다. 모닥불의 불빛도 간신히 어둠을 핥아내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텐데.”
모닥불 옆에 땔감으로 쓸 나뭇가지들을 떨어뜨린 이안이 말했다.
미구엘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에헤이. 거기까지만 하쇼. 재수 옴 붙으니까.”
사제란 놈이 아직도 미신을 따지네.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그의 뒤편을 돌아보았다.
미구엘과 마찬가지로 두툼한 털가죽을 덧댄 두건 망토를 걸친 루시아가, 관도 쪽 나무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무에 묶인 말들이 깔고 앉을 털가죽을 펼치고 있었다.
루시아와 미구엘이 타고 온 말들은, 다소 다리가 짧은 데다 털이 유독 빽빽하고 갈기도 풍성했다.
닐라가 늘씬하다면, 녀석들은 옆으로 단단하게 벌어진 체형이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지구력도 좋아서, 이틀간 꽤 빠르고 오래 이동했는데도 그다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물론 그런 건 닐라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나무에도 묶여있지 않아서, 루시아가 가죽을 펼쳐놓자 냉큼 그 위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이렇게 똑똑한 말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녀석의 갈기를 쓰다듬은 루시아가, 일행이 쓸 모포를 들고 돌아오며 말했다. 말할 때마다 하얀 입김에 어둠에 일렁였다가 흩어졌다.
“그런 녀석이지. 그러니까, 뭔 일이 생기면 저 녀석을 등지고 서 있어라.”
이안이 미구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육포가 지글대는 검날을 옆으로 빼던 미구엘이 인상을 구겼다.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시라니까…. 어제도 그러시더니.”
“별 일 없었잖아?”
“하면 안 될 말씀만 골라서 하시네요.”
미구엘의 망토 위에 모포를 덮어준 루시아가, 이안의 어깨에도 덮어주며 말했다.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걸 보니 이 상황 자체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긴. 예전에도 담은 컸지.’
자리에 앉는 루시아의 앞으로, 미구엘이 육포를 얹은 칼날을 내밀었다. 그는 손이 하나뿐이어서, 이런 자잘한 일들은 잘 처리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루시아가 뜨거운 육포를 들어 찢는 사이, 미구엘이 시선을 돌렸다.
“형씨. 정말 이제 이걸 포함해서 두 덩이밖에 남지 않았소?”
“그래.”
“더럽게 아쉽네. 맛이 끝내줬는데.”
“남기지 말고 먹어라. 보아하니 사냥감도 없는 것 같은데, 내일은 종일 굶어야 할지도 몰라.”
“내일 저녁쯤엔 완전히 북부에 접어들 거요. 거기선 토끼라도 있겠지. 뭐, 내가 잡아 오겠소.”
루시아가 이안과 미구엘에게 차례로 육포를 건넸다.
이안은 손으로 받아들고, 미구엘은 아예 먹여 달라는 듯 입을 벌렸다.
남은 작은 조각을 입에 물며, 루시아가 모닥불 너머의 숲을 눈에 담았다.
“오늘은 확실히 더 조용하네요. 어젯밤에는 그래도 꽤 시끄러웠는데 말이에요.”
“루시 너까지….”
미구엘이 짧게 침음하며 입을 우물댔다.
밤중의 숲은, 왜 이 길의 출입을 통제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게 했다.
때때로 정체 모를 마물들의 비명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 것이다.
아주 멀리서 번진 소리였다. 마물들끼리 싸우고 있다는 걸 유추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먹을 게 없으니까 이제 저들끼리 잡아먹기라도 하는 건지. 씁.”
곧 뭔가 체념한 듯 미구엘이 읊조렸다. 검을 땅에 박고 뒤편에 뒀던 술병을 집어 든 그가 말을 이었다.
“흉지에서 태어난 것들이 왜 밖으로 기어 나오는지 모르겠소. 그런 놈들은 밖에선 비실대다가 결국 죽잖소. 정말 일대가 죄다 광기에 물들기라도 하는 건지….”
용병 출신이기에 알고 있는 지식일 터였다. 벌써 식고 있는 육포를 우물대며,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안에도 먹을 게 없나 보지. 아니면 머리가 너무 불어나서, 어쩔 수 없이 나왔거나.”
“…어느 쪽이든 끔찍하군.”
내뱉은 미구엘이 술병을 내밀었다. 받아들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뭐, 바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적응한 놈들이 있을 수도 있겠고.”
“그게 제일 끔찍하군. 그런 놈들이 많아지면, 결국은 마경이나 아닌 곳이나 구별하는 게 무의미해지는 거잖소. 정말이지, 이러다 사원에서만 처박혀 살아야 하게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그런데….”
투덜대던 미구엘이 문득 이안을 돌아보았다.
“왜 안 드시고 그러고 계시오?”
“…….”
미구엘을 돌아본 이안이, 대답 대신 술병을 그냥 옆에 내려놓았다. 뒤이어 몸에 두른 모포까지 벗어 버리자, 비로소 미구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로?”
“확실히, 우리가 하면 안 될 말을 많이 하긴 한 모양이군.”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읊조렸다. 미구엘의 인상이 더 구겨지는 가운데, 그가 몸에 걸친 장비들을 재빨리 조이기 시작하며 덧붙였다.
“너희들은 말을 지켜라.”
“네. 제가 앞에 있을게요. 미구엘이 후방을 지원해 줘요.”
“시부럴….”
미구엘이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대며 자신의 장비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난 루시아는, 허리 뒤편에 장착하고 있던 철퇴를 뽑아 들었다.
끝에 울퉁불퉁한 추가 달린, 그녀에게 딱 맞는 길이의 물건이었다.
“…확실히, 뭔가 있네요.”
그녀의 눈은 이안이 바라보던 어둠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에 흐릿한 주황빛이 아른댔다.
“우리를 발견한 건가요?”
“아마도.”
왼손 손아귀에 보옥을 장착하고, 마지막으로 오른 팔목의 쇠뇌까지 꽉 조여 고쳐 맨 이안이, 새카맣게 물든 눈으로 다시 숲의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몸을 감춘 채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던 놈의 모습이 더 선명해져서, 이안은 이제 완전히 놈의 형태를 구별할 수 있었다.
생긴 건 꼭 늪지 트롤 같았다.
다만 정수리에 갑피가 덮인 기다란 뿔 같은 게 뒤로 늘어져 있고, 조금 힘이 빠진 것처럼 몸을 축 늘어뜨린 채였다. 거기다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걸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잎이 거의 떨어진 풀숲을 지나치면서, 거미나 전갈을 방불케 하는 하반신이 드러난 것이다.
‘또 더럽게 징그럽게도 섞였네.’
생각하며 허리춤의 진은 강철 장검을 뽑아 든 이안이, 다음 순간 예고도 없이 달려나갔다.
그림자 망토가 소리 없이 너울거리며 그의 뒤로 기다란 궤적을 그렸다.
“……!”
망토가 발소리도 삼킨 데다 아직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건만. 변종 트롤은 곧바로 이안의 돌진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다소 늘어져 있던 거대한 상반신이 기지개를 켜듯 뒤로 젖힌 것이다. 텅 빈 눈구멍에 흐릿한 자주색 안광이 피어올랐다. 놈의 아가리가 삐걱대듯 벌어졌다.
“끄- 아아아아-!”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 숲 저 멀리서 울려 퍼지던 비명 중 하나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