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31
331화
“당연하죠. 제가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인걸요.”
루시아가 빙긋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신성이 아른거리는 그녀의 눈을 잠시 내려다본 이안이, 이내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서. 그건 왜 뽑은 건데.”
“필요하면 쓰려고요.”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어떤 상황에 필요할지. 그리고 어떻게 쓰려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를 올려다본 루시아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위험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아요. 당연히 해야 할 제 의무일 뿐이죠. 그러니까… 제게 맡겨 주시면 안 될까요?”
“…….”
그녀의 눈을 잠시 마주 본 이안이, 이윽고 짧게 입맛을 다시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쨌건, 이것도 실전 경험이었다.
“감사해요.”
입꼬리를 조금 더 말아 올린 루시아가, 이윽고 광기가 만들어낸 균열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이내 사라졌다.
“온 세상을 뜨겁게 밝히는 불길이여….”
곧 눈을 반개한 그녀가 나지막한 기도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단검을 쥔 왼손을 가슴 앞에. 그리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펼쳐 균열을 향해 내뻗은 채였다.
화륵-
균열 한복판에 주황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오거를 태울 때와 달리 그리 크지 않은 불꽃이었다.
이안의 눈동자에 흐릿한 광택이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마력 탐지.
불꽃에 담긴 신성과 균열에서 번지는 파장이 시야에 선명해졌다.
불꽃에 닿은 파장은 형태를 잃고 흩어졌다. 하지만 성화 역시, 균열 내부에 응축된 근원을 녹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신성과도 자유롭게 섞이던 혼돈력이, 지금은 물과 만난 기름처럼 성화를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이미 다른 무언가와 섞여 있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화르르….
하지만 어쨌건, 성화는 그 경계를 조금씩 녹여내고 있었다.
시간과 신성력이 충분하다면, 결국은 경계를 뚫고 근원을 태워버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기도문을 읊조리는 루시아의 이마에는 벌써부터 옅은 땀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루시아가 발뒤꿈치에 대고 있던 엉덩이를 뗀 건, 이안이 슬며시 왼손을 치켜들려던 순간이었다.
내뻗은 그녀의 오른손이 일렁이는 성화의 바로 위로 향했다.
동시에 가슴 앞에 대고 있던 단검을 내민 그녀가, 날을 오른손 손아귀에 가져다 댔다.
루시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아귀를 그었다. 삽시에 번져 나온 붉은 핏물이 성화로 뚝뚝 떨어졌다.
“…….”
이안의 미간이 좁아지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광경이었다.
그래. 이럴 것 같더라니.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들었던 왼팔을 다시 늘어뜨렸다.
그녀의 피를 머금은 순간, 불꽃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바뀌면서 더 강하게 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도에 완전히 몰입한 듯, 루시아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바뀌었다.
괜히 도와준답시고 집중력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맡겨두기로 한 이상, 위험하지 않은 범위 안에서는 지켜보는 편이 나을 터였다. 루시아의 성장을 위해서는 특히.
대신, 이안은 창백한 푸른 빛으로 일렁이는 성화를 관찰하듯 눈에 담았다.
‘피가 일종의 증폭제 역할을 하는 건가.’
하긴. 신들이 내리는 기적과 권능은, 관념적 상징이 실질적인 힘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전의가 들끓을 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하는 투쟁의 축복이나, 피 흘릴 수록 강해지는 복수자처럼.
피는 곧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니, 이번 경우에는 목숨을 불사르는 것을 의미할 터였다.
게임에서 화로의 성녀가 성화에 몸을 던진 것도 그래서였으리라.
‘그만큼 큰 열정은 없단 거겠지. 더럽게도 극단적이네….’
그러니까 이명이 그따위지.
내심 혀를 차며, 이안은 루시아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피를 더 짜내려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아귀에서 흐른 핏물이 멈추지 않고 푸른 불꽃 속으로 떨어졌다. 그럴 때마다 불꽃은 점점 더 넓게 번지고 있었다.
화르륵-
게임 속 사제들도 이것과 비슷한 광경을 보았을 터였다. 그러니 인신 공양에 빠져든 것이겠지.
‘그럼, 사도가 아닌 자를 태워도 같은 효과가 있는 건가…?’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균열을 완전히 뒤덮고 타오르던 성화가 한순간 들끓듯이 치솟았다.
퍼슥-
그리고 다음 순간, 불꽃이 증발하듯 흩어졌다. 상대적인 어둠이 내려앉았다. 자줏빛으로 일렁이던 균열 역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진 것이다.
“후….”
팔을 툭 떨군 루시아가 숨을 내쉬었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넘실대던 털 망토가 착 가라앉았다.
곧바로 그녀 곁에 주저앉은 이안이, 비틀거리는 루시아의 한쪽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전 괜찮아요. 이안님.”
루시아가 눈을 뜨며 읊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 흐릿한 신성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안이 어깨를 감싸 쥔 손을 놓는 가운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사원에 이 소식을 알려야겠어요. 벼락이 여기에만 떨어진 게 아니었잖아요. 아마 그곳들에도 광기가 스며들거나 광기에 물든 마물들이 생겨났을 거예요.”
피로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흉갑 안쪽에서 잘 말린 붕대를 꺼냈다. 비상용으로 늘 넣고 다니는 물건이었다.
“불씨를 지핀 사제님들을 파견하거나, 트라벨가 교회의 협조를 요청해야겠어요.”
이안은 말을 이어가는 루시아의 오른손을 붙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루시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전사 두 분만 전령으로 보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한 분 만이라도요.”
“알았으니까, 그만 떠들고 잠깐 쉬어라.”
붕대 끝으로 손아귀에 눌어붙은 피를 닦으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의 미간이 좁아진 건, 손바닥에 남은 흉터가 하나가 전부가 아니어서였다. 아직도 피가 베여나오는 상처주위로도 옅은 흔적들이 몇 개 더 남아 있었다.
“…자주 이러는 건 아니에요.”
이안의 시선을 느낀 듯,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화를 빠르게 지펴야 하거나, 불길을 신성 없이 오래 유지해야 할 경우에만 종종 사용해요. 몇 번은, 연습 삼아 해 본 거기도 하고요.”
이안을 안심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이안의 표정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이 세계의 신들을 욕하고 있었다.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은 주제에 극단적이기까지 한 것들.
“네 피만 효과가 있는 거냐?”
손에 붕대를 감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상징적인 의식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의 피를 사용할 이유는 없잖아요. 사도인 제 피가 더 큰 의미를 지니기도 할 테고요.”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이, 붕대 끝부분을 묶으며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마을에 성화를 지필 때도, 이 짓을 하려던 거겠지?”
“…필요하다면, 아마도요.”
루시아가 잠시 머뭇거리고는 대답했다. 이안의 눈치를 슬쩍 살핀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랬듯이,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별로 아프지도 않고-”
“못하게 하려던 건 아니야. 대신, 내가 보는 앞에서 해. 반드시.”
“…네.”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선선히 대답했다. 붕대가 풀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이안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럼 가자. 빨리 마을에 도착해야, 네가 빨리 쉴 수 있을 테니까.”
덧붙인 그가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아의 입가에, 비로소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안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네.”
뒤늦게 대답하며 단검을 검집으로 되돌린 그녀가, 붕대가 감긴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
다각- 다각-
일행은 야인 전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로 향했다.
이안은 볼베르를 비롯한 전사들에게, 자신의 공식적인 신분과 다시 북부로 돌아온 이유를 밝혔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야인 전사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감격스럽군요. 대전사께서 공식적으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신다니 말입니다. 게다가, 최전선에서 또 함께 싸울 수 있는 영광까지 주어지다니요.”
볼베르가 호탕하게 웃음 지었다.
위아래로 이가 몇 개씩 빠져서, 바람이 잘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말했듯이 아주 위험할 거다. 어쩌면, 벨리움에서보다도 더.”
“아주 명예로운 죽음이 되겠군요. 카르하께서 군단의 자리를 마련해 주실 만큼 말입니다. 아니. 이번엔 어쩌면 새로운 군단을 만드실지도 모르겠군요. 그것도 큰 영광일 겁니다. 안 그러냐?”
볼베르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북부인 전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세가 아닌 듯, 다들 눈빛이 굳은 결의를 머금고 번쩍였다.
씩 미소 지은 그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물론, 살아서 돌아오더라도 영광스럽기는 마찬가지일 테고 말입니다.”
하여간, 정신 나간 놈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풀썩 웃음을 흘렸다.
어쨌건 든든한 건 사실이었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이들은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게다가 이미 함께 싸운 전적이 있는 자들도 여럿이지 않던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야. 그만큼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내뱉은 이안이 눈으로 전사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난 아직 너희를 카르하에게 빼앗길 생각이 없어. 최대한 많이, 그리고 오래 내 군단으로 남아 있게 할 거다.”
“대전사….”
순식간에 감격한 얼굴이 된 볼베르가 읊조렸다. 다른 전사들도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수염이 숭숭 돋은 야만 전사들이 저딴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듣자 하니 마을이 셋으로 나뉘었다던데.”
미간을 슬쩍 찌푸린 이안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사들이 다 집결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길어야 닷새면 가능할 겁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령들을 꾸려서 내보내겠습니다. 대전사께서 돌아오셨다는 걸 알면, 다들 곧바로 달려올 겁니다.”
볼베르가 즉답했다.
전사들이 서로 자기가 가겠다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전부 가라고 대답한 이안이 말을 이었다.
“며칠 더 걸려도 상관없어. 주민들을 전부 데리고 오라고 해. 전사들은 거의 다 나랑 떠날 테니까. 남은 이들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할 거다. 이 두 분의 도움을 받아서.”
이안은 뒤따르는 루시아와 미구엘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이고, 무표정한 얼굴의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그리고 성녀님.”
볼베르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구엘이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거, 나는 잡일이나 돕지, 별로 하는 건 없을 것이오. 나보다는 이, 차기 성녀께서 고생하시겠지.”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성화를 품을 화로를 만들 거거든요.”
“죄송하지만, 우리 마을에는 대장간이 없습니다. 성녀님.”
볼베르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루시아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이안을 대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루시아가 입술만 당겨 미소 지었다.
“상관없어요. 나무로 만들어도 괜찮거든요.”
“나무라도 말입니까…? …어쨌든, 그렇다면 가능할 겁니다. 원로들께선 손재주가 아주 뛰어나시니.”
“그건 나도 보증하지. 마차 만드는 솜씨가 제국 못지않았어. 네가 요구하는 건 거의 다 들어줄 거다.”
이안이 첨언했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화로를 어떤 식으로 만들지, 미구엘과 고민을 좀 해 봐야겠어요.”
“맡겨 주시오. 신경 쓰셔야 할 일은 없게 할 테니까.”
미구엘이 덧붙였다.
거참 믿음직스럽군. 내심 읊조리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볼베르를 돌아보았다.
“마을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모두 수용하려면 확장 공사도 필요할 거다.”
“예. 아마 원로들이 대전사를 마중 나와 있을 겁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당장 내일부터라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대답한 볼베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한동안 떠들썩해지겠군요. 아마 전부 앞다퉈 달려올 겁니다. 어쩌면, 전쟁이 끝난 이래 가장 많은 전사가 한자리에 모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대와 설렘마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긴장감 없는 놈들 같으니.
내심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전부 달려오진 않을 것 같은데.”
“……?”
볼베르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은 그의 눈을 마주 보지 않고, 그저 계속 저 앞을 응시했다.
숲의 어둠 너머로, 마을을 감싼 목책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본 것보다는 다소 낮은 목책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여기 그대로 남아 있던 마을도 여럿이라며. 그들을 합류시키는 것도 너희 목적 중 하나고.”
“그것도 알고 계셨군요. 예. 맞습니다.”
볼베르가 낮은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벌써 두 개의 마을이 저희와 뜻을 함께하고 교류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아마, 기쁜 마음으로 대전사의 부름에 응할 겁니다.”
“아직 뜻을 함께하지 않는 마을들도 있단 거군.”
“그렇습니다. 저희보다 더 전통을 고수하는 이들입니다. 존중받아 마땅한 방식이니, 굳이 합류를 강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건 내가 도와주지.”
“예…?”
“그들에게도 전부 사람을 보내라. 그리고 이 말도 꼭 전해. 부름에 불응하면….”
비로소 볼베르를 돌아본 이안이, 입술을 슬쩍 말아 올렸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힘으로 끌고 나올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