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33
333화
추레한 몰골의 미구엘을 바라본 이안이 이내 덧붙였다.
“또 새벽부터 일어나서 일하고 있었군. 적어도 잠은 제때제때 자라고 했을 텐데.”
“나도 그렇게 말은 했소. 아시겠지만, 루시가 또 한 고집 하잖소. 거기다 주민들도 영 잠이 없소.”
“…그래. 그랬겠지.”
이안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읊조렸다. 지난 며칠간, 마을 주민들은 동이 트자마자 일어나 쉴 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화로도 며칠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새벽부터 죄다 달려들어서 뚝딱대더니 완성해 버리더군. 좀 어설프긴 해도, 루시가 원한 조건은 전부 맞춰줬소. 작업 시간을 생각하면 훌륭하지. 하긴. 그건 형씨 조각상만 봐도…. 흠흠. 아무튼.”
이안의 눈빛에 황급히 헛기침을 한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루시가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소. 슬슬 준비해서 가보면, 아마 얼추 완성되어 있을 거요.”
“…그래.”
그럼 안 가볼 수 없지.
작게 한숨 쉰 이안이, 양피지를 아공간에 던져 넣으며 일어섰다.
몸에서 김을 뿜으며 걸어 나오는 그를 아래위로 훑어본 미구엘이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못 보던 상처가 많아지셨소. 전보다 몸도 더 좋아지셨고.”
“오늘따라 헛소리가 많네.”
이안이 마른 천으로 몸의 물기를 닦으며 말하자, 미구엘이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사실만 말한 거요. 사실만.”
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안의 몸은 예전에 그와 함께하던 때보다 더 크고 단단해져 있었으니까. 힘 수치의 영향일 터였다.
물론 얇은 골격 덕분에, 여전히 우락부락한 것보다는 탄력적이고 미끈한 느낌에 가까웠다.
여기에는 아마도, 민첩 수치의 영향도 있을 터였다.
‘어쨌건 마법사의 몸은 아니지….’
내심 코웃음을 흘리며, 이안은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두툼한 털옷을 집어 들었다.
잘 닦아서 진열해 둔 방어구들은, 여기서는 굳이 착용할 필요가 없었다.
“듣자 하니 오늘 오후쯤엔 슬슬, 허탕을 친 전령들이 돌아올 것 같다고들 하던데 말이오.”
슬며시 집안으로 완전히 들어선 미구엘이, 문 옆의 벽면에 기대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부름에 응하지 않는 이들은, 정말 직접 찾아가서 다 두들겨 패서 데려오실 거요?”
“그럴 생각인데. 왜. 문제 있냐?”
이안이 가죽 장화에 발을 쑤셔 넣으며 물었다. 안감과 윗부분에 정체 모를 검은 털이 잔뜩 덮인 물건이었다.
미구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문제는 없지. 어차피 싸우러 가는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잖소. 우리 쪽 피해도 더 적어질 테고 말이오.”
“잘 아네.”
“그냥, 이러다 정말 대도시가 하나 만들어지겠구나 싶어서 한 말이었소. 정착지가 아니라, 진짜 북부 전통주의자들의 대도시 말이오.”
곰 가죽 망토를 집어 들면서,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뭐, 그렇게 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아마 형씨는 위대한 대전사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오.”
새삼스럽게 이안을 바라본 미구엘이 덧붙였다.
“내가 알기로 그 어떤 대전사도, 모든 북부인을 하나로 만들지는 못했소.”
“그건 북부의 대전사란 것들이 죄다 싸움에만 미친 놈들이라 그랬던 거고.”
망토를 두른 이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려고만 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었을 거야.”
어쨌건, 북부의 군벌이 되려면 야인 통합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일단 확실히 터전을 닦아 두면, 다른 북부인들이 알아서 더 모여들 테니까.
야인이 아닌 자치령의 북부인들도 더 진심으로 이안을 따를 터였다.
물론 울라프 대공은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길지도 몰랐지만. 전선을 무사히 지켜 내고 나면 그의 행동을 꼬투리 잡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랬다가 오히려 군단이 이안의 편을 들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정말 심각해질 테니까.
물론, 이안도 그와 충돌할 생각은 없었다.
‘난 지지만 얻으면 그만이니까.’
울라프 대공이 지금 자리를 잘 지키고 있어야, 그가 발목이 잡힐 일이 없었으니까.
물론, 황실과 교단 양쪽을 다 견제할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글쎄….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소만. 형씨나 되니까 가능한 걸 거요. 무려 조각상까지 세워진 위인이시잖소.”
“…….”
미간을 슬며시 좁힌 이안이 미구엘을 바라보았다. 재빨리 눈동자를 피한 미구엘이 주절댔다.
“노, 놀린 게 아니오. 못 들으셨나 본데, 형씨는 하나라도 카르하 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유일한 대전사요. 용을 죽이셨잖소. 아시다시피, 그건 카르하도 끝내 실패했던 업적이고 말이오. 그래서 조각상까지 만들어진-”
“안내나 해. 수습하겠답시고 더 무덤 파지 말고.”
“그, 그럴까…?”
이마에 슬슬 식은땀이 번지고 있던 미구엘이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거, 새끼. 하여간.
시큰둥하게 콧방귀를 뀐 이안이 그 뒤를 따라 거리로 나섰다.
칙칙한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생기 넘치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간인데도, 온 마을이 분주했다. 지금 마을에 게으름을 피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터였다.
“대전사.”
“…대전사.”
주민들이 고개를 까딱이며 이안의 곁을 지나갔다.
첫날만 해도 마주칠 때마다 멈춰서 고개를 숙이더니. 지금은 저마다의 준비에 바빠 고개만 까딱댔다.
물론, 이안은 지금이 훨씬 더 편했다.
“마을에 남을 사람들이 걱정이오. 먹을 걸 죄다 우리한테 주려는 것 같던데.”
미구엘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여인들은 병단이 먹을 보존 식량과, 모포나 내의를 비롯한 각종 물품들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아이들조차 잔심부름이나 말들을 보살피는 일을 전담하고 있었다.
이안이 읊조리듯 대답했다.
“트라벨가에 도착하면, 마을 쪽으로 물자를 조금 보내면 돼.”
“그럴 여유가 있겠소…? 물건도 물건이지만, 분명 돈도 엄청 부족할 텐데.”
“안 부족하니까 걱정마라.”
“……?”
미구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봤지만, 이안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길피! 당장 망치 들고 이리 튀어 와!”
“줄 똑바로 당겨! 누구 납작해지는 꼴 보고 싶어?”
또 다른 분주한 광경이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목책을 해체하고, 그 건너편에는 더 넓게 두른 목책을 세우는 이들이 바글댔다.
그 사이의 공터에는 통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거나, 지지대로 쓸 부분들을 조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둥치만 남은 나무의 뿌리를 잘라내는 이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작업 속도 한번 더럽게 빠르지 않소?”
내뱉던 미구엘이, 이안을 일별하고는 풀썩 웃음 지었다.
“하긴. 형씨께서 크게 일조하셨지.”
오늘따라 말이 참 많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지난 며칠간 그가 벌목 작업을 적극적으로 도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사들이 반 이상 마을을 떠나서, 그만큼 일손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종일 도끼질만 한 건 아니었다. 이안은 그보다 더 쉽고 간단한 방식을 선택했다.
“살다 살다, 용의 무구를 그런 식으로 쓰는 사람은 처음 봤소.”
백금의 발톱을 활성화한 진은 강철 장검으로 나무를 죄다 난도질해 베어 버리고 다닌 것이다.
샛노란 마력 칼날은 아름드리나무 둥치도 어렵지 않게 베어냈다.
물론 진언 회로의 마력이 빠른 속도로 소모되었을 뿐, 진은 강철 검의 내구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용의 무구라는 걸 실제로 본 게 처음이긴 하지만 말이오.”
이어진 미구엘의 너스레에, 이안도 결국 풀썩 웃음을 흘렸다.
“뭐, 쓰라고 있는 거니까. 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써야지.”
작업 속도를 높일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진언 강철 검을 빌려줄 수도 있었다. 물론,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검신에 새겨진 진언 회로는 이안에게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그 외에는 아무도 백금의 발톱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정말 텅 비워 뒀군.”
해체 중인 목책 너머를 눈에 담으며, 이안이 덧붙였다.
주민들은 목책을 넓히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새로 확보한 공간은 나무 둥치만 제거한 채로 방치했다.
“집은 이주해 오는 자들이 알아서 지어야지. 어쨌건 뭐….”
중앙 공터로 이어진 길로 접어들며, 미구엘이 싱긋 미소 지었다.
“보기는 좋잖소. 생기도 넘치고.”
“뭐, 전쟁 준비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무슨 말씀을. 그래서 다들 더 열심인 거요. 잊으셨소? 북부인은 투쟁의 민족이오.”
이안은 옅은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들을 사지로 끌고 가는 게 다름 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새삼스럽게 죄책감이 드는 건 아니었다. 전선이 무너진다면 더 많은 희생자를 낳게 될 테니까.
게다가 이들은 차라리 최선을 다해 준비한 뒤에, 적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을 더 원할 터였다.
“저기 보이는군.”
곧 미구엘이 내뱉었다. 오가는 인파들이 줄어들면서, 중앙 광장의 전경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광장으로 진입하자마자 보이던 카르하와 이안의 조각상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제단이 그 앞을 가로막고 솟아 있었다.
“생각보다 꽤 크군.”
나무를 평평하게 깎아 쌓아 올린 단상 위. 마찬가지로 나무를 깎아 이어 붙여 만든 듯한 목조 화로의 모습이 보였다.
화로라기보단, 정사각형의 커다란 나무 상자 같은 모습이었다.
조금 작은 크기의 네모난 받침대 위에 놓인.
‘거의 내 키만한 것 같은데….’
화로 옆에는 기역 자를 그리며 이어진 나무 계단이 솟아 있었다.
그 위에 선 주민은, 화로 한복판에 솟은 땔감의 탑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소. 제법이라니까. 어쨌건 만드는 데 힘이 들긴 했을 것이오. 노인네들은 저게 완성되자마자 죄다 자러 가더라니까. 다들 지금쯤 기절해 있을 거요.”
“저 녀석은, 뭘 하고 있는 거냐?”
이안이 루시아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를 등지고 선 녀석은, 나무로 만든 받침대를 딛고 선 채였다. 곁에는 양동이를 머리에 짊어진 소년이 있었다. 루시아가 그 안으로 손을 넣자, 안에 담긴 검은 물이 찰랑댔다.
루시아가 검은 물을 찍은 손가락으로 화로 표면에 뭔가를 슥슥 써댔다.
“아, 저거? 잿가루를 잔뜩 탄 물이오. 그걸로 기도문을 새기는 거지. 저렇게 해야, 성화를 붙여도 화로가 타지는 않는다네.”
미구엘이 곧바로 대답했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슬며시 걸음을 늦춘 미구엘이 그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 작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소?”
“뭔데.”
“…내가 무식한 놈이긴 하지만 말이오. 저게 쉬운 의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아마 성녀님이나 순조롭게 성공시킬 수 있으시겠지.”
이안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춘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루시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걱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그보단, 잘 안 되는 것 같으면 저 녀석이 무리하기 전에 말려주셨으면 좋겠소. 분명히 아득바득 해내려고 할 텐데. 무리하다 탈이라도 나면 안 되잖소.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슬쩍 이안과 눈을 마주친 미구엘이 덧붙였다.
“저 녀석이 내 말은 잘 안 들어도, 형씨 말이라면 껌뻑 죽잖소.”
…그렇다기엔 갈수록 하는 짓이 널 닮아가는 것 같던데.
피식한 이안이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오늘만 날일 수도 있어.”
“엥…?”
“언제 마을을 떠나야 할지 모르는데. 저 녀석 혼자 의식을 치르게 하고 싶진 않거든.”
미구엘이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이 됐다.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하, 하지만….”
“걱정마.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게 도와 볼 테니까.”
“형씨가 뭘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전사를 뵙습니다.”
미구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을 발견한 단상 위의 북부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루시아가 뒤를 돌아보자, 미구엘도 재빨리 입을 다물고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둘을 번갈아 눈에 담은 루시아가 빙긋 미소 지었다.
“딱 맞게 오셨네요. 이제 막 마무리를 끝낸 참이거든요.”
“그래. 새벽부터 고생 좀 했겠네.”
이안이 대답하며 단상 앞에 멈춰 섰다.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분들이 고생하셨죠. 전 별로 한 것도 없어요.”
“한 게 없긴.”
이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루시아의 눈빛에는 이미 피로가 맺혀 있었다.
“조금 쉬고 시작하는 게 어떠냐. 피곤해 보이는데.”
미구엘이 덧붙였다. 단상을 내려가는 주민들을 돌아본 루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바로 시작해도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러자, 그럼.”
이안이 단상 위로 훌쩍 올라섰다. 루시아가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정말 옆에서 지켜보실 건가요?”
“그래. 내가 도울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도울 게 있다니요…?”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계단 위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눈을 깜빡인 루시아가, 더는 묻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이안이 대답해 주지 않으리라 생각한 게 분명했다.
‘…딱히 대단한 비밀도 아니지만.’
뒤따라 계단을 오르면서, 이안은 화로를 눈에 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다들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가 와닿았다.
물론 커다란 상자 같아 보이긴 했지만. 겉면을 매끈하게 다듬었고, 판자 사이에는 빈틈이 없었다. 끝부분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옆면에 흐릿하게 새겨진 기도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루시아가 아침 내내 새긴 글귀들이리라.
이내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저것도 안에 쑤셔 넣고 같이 태워버리고 싶은데.’
꺾인 부분을 돌자, 자연스럽게 제단 뒤편에 나란히 선 조각상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카르하는 그렇다 쳐도, 자신의 조각상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저런 게 몇 개나 더 있다니….’
한숨을 삼키는 그때, 계단 끝에 멈춰 선 루시아가 옆으로 반걸음 물러났다. 이안은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섰다.
계단은 좌우로 제법 널찍해서, 충분히 둘이 나란히 설 수 있었다.
화로 안쪽이 보였다.
겉면과 마찬가지로 판자를 평평하게 깔아 뒀지만, 곳곳에 규칙적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한복판에 놓인 장작의 탑 역시, 가운데를 비운 채로 쌓은 형태였다.
“…시작할게요.”
숨을 고르고 있던 루시아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어느새 왼손에 단검을 움켜쥔 채였다.
슬며시 미간을 좁히면서도, 이안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