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34
334화
“…….”
단검을 쥔 왼손을 가슴 앞에 얹은 루시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공기만 내뱉는 속삭임이었지만, 곁에 선 이안은 일부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번에 들었던 것과는 또 다른 기도문이었다.
솨아아-
반개한 눈에서 은은한 신성이 맺히고, 망토가 나풀댔다. 루시아가 오른손을 내뻗자, 일순간 주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화륵-
장작더미 위에서 주황색 불꽃이 피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불꽃이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장작의 탑이 불길에 휩싸였다. 하지만 탄내는커녕 연기조차 번지지 않았고, 화로에도 전혀 불길이 옮겨붙지 않았다.
“…….”
오른손 손목을 돌려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한 루시아가,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렸다.
화르르-
불길이 화로 중앙으로 모였다. 장작의 탑 안쪽으로 모여드는 형국이었다. 성화가 한층 더 붉게 일렁였다.
하지만 이안이 보기엔 그저 불꽃이 응축되는 것뿐이었다. 그 외의 특별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면 신성을 거둬들인 순간 그냥 꺼져버릴 것 같은데….’
이안이 눈을 설핏 가늘게 뜰 찰나, 루시아의 손아귀에서 붉은 실선이 번졌다. 간신히 아물었던 손아귀의 상처가 다시 터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눈을 반개한 채 기도문만 읊조리고 있었다.
터진 상처에서 번진 핏물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려 화로 속으로 방울져 떨어졌다.
화륵-
불길이 선명하게 꿈틀댔다. 응축되며 다소 작아진 불길이 다시 조금씩 그 덩치를 키워갔다.
루시아가 가슴 앞에 대고 있던 단검을 뻗어 오른손 손아귀에 가져다 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새파랗게 번뜩이는 단검 날이, 손아귀에 또 하나의 붉은 선을 그려냈다. 흥건하게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화르르-
루시아의 피를 삼킨 성화가 타올랐다. 힘을 잔뜩 준 듯, 허공을 움켜쥔 손아귀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균열을 봉인할 때와는 달리, 성화는 푸른 빛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저 불그스름하게 일렁이며 장작과 피를 집어삼킬 뿐이었다.
어느새 루시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낯빛은 창백했고, 피가 흥건한 손아귀는 파르르 떨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점점 더 가라앉을 찰나.
“…….”
문득, 루시아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옅은 갈등이 스쳤다.
물론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이내 뭔가 결심한 듯, 그녀가 단검을 오른손 손목으로 가져갔다.
“……!”
이안이 휙 몸을 젖히며 왼손을 내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손목에 닿으려던 단검 날이 우뚝 멈췄다.
“……!?”
이안의 왼손이 그녀의 팔뚝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번쩍 눈을 뜬 루시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주황색으로 물든 눈동자에 놀람과 당황이 뒤섞였다.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손아귀에서 단검을 빼앗으며, 이안이 내뱉었다.
“집중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네…? …아, 네. 네에.”
그제야 다시 화로를 내려다본 루시아가, 느슨하게 풀어졌던 오른손을 재빨리 다시 움켜쥐었다.
장작의 탑을 벗어나 주위로 스멀스멀 번지던 성화가 다시 이글대며 모여들었다. 애써 당황을 수습한 그녀가 다시 눈을 감으며 기도를 이어 가는 사이.
‘이딴 걸 열정의 증표로 삼다니….’
가라앉은 눈으로 화로를 내려다본 이안이, 왼손을 펼쳐 앞으로 내뻗었다. 피 묻은 단검 날이 손바닥 한복판에 닿았다.
스으윽-
검날이 손바닥을 깊숙이 베고 지나갔다. 터지듯 흘러나온 핏물이 화로 속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붉게 일렁이던 성화의 빛이 푸르게 변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푸화악-!
새파란 불길이 삽시에 치솟았다. 장작의 탑을 전부 집어삼킨 것으로도 모자라, 이안과 루시아의 앞까지 열기가 번질 정도였다.
“……!”
루시아가 놀란 듯 몸을 들썩였다. 이안의 한쪽 눈매가 일그러지기에도 충분한 변화였다.
도움이 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잘 탄다고?’
생각하며, 이안이 왼손을 거둬들일 찰나.
“조, 조금만 더요, 이안 님…!”
가슴 앞에 대고 있던 왼손까지 앞으로 내밀면서, 루시아가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치솟았던 푸른 성화가 가라앉는 가운데, 이안이 선선히 다시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처를 헤집기 위해 주먹까지 꾹 움켜쥔 채였다.
화르르르-
피를 머금을수록 흰색에 가깝게 변한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이를 악문 루시아가 앞으로 내뻗은 양손을 모두 움켜쥐듯 구부렸다.
성화가 억눌리듯 잦아들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기세가 죽지는 않은 채였다.
“……!”
성화를 내려다보던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불꽃 중심부, 올올이 풀려나와 다시 응집되는 신성의 결이 아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물에서나 느껴지던 근원과 비슷한 느낌이 전해졌다.
‘저걸 이런 식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거였나….’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 힘이 다할 불완전한 근원이긴 하겠지만. 어쨌건 한동안은 성화를 유지시키는 구심점이 되어 줄 터였다.
이안은 다시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제 오로지 성화를 통제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 마주 보고 구부러진 양손의 손가락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손끝이 맞닿았다.
화르륵….
응축된 성화가 고요해진 건 거의 동시였다. 그 순간 이안은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온기를 느꼈다.
화로를 중심으로 온기가 번지고 있었다.
“…….”
루시아가 서로 맞닿은 손끝을 천천히 뗐다. 구부러져 있던 손가락이 활짝 펼쳐졌다. 서로 마주 본 손바닥이 조금씩 멀어졌다.
하지만 장작의 탑에 고요하게 맺힌 새하얀 성화는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일렁였다.
“후….”
루시아가 긴 숨을 토해내며 양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나풀대던 망토가 힘을 잃고 차분하게 늘어졌다. 전신에 일렁이던 신성이 잦아들고, 마침내 감고 있던 눈을 뜬 루시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온 얼굴이 땀으로 축축했지만, 주황빛이 아른거리는 눈동자에는 고양감과 성취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성공이에요. 이안 님.”
“…그래. 고생했-”
덤덤하게 대답하던 이안이, 다급하게 들고 있던 단검을 팽개치며 손을 내뻗었다. 루시아의 몸이 화로 속으로 떨어질 것처럼 휘청였기 때문이었다.
“루, 루시!”
단상 아래에서 미구엘의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아슬아슬하게 루시아의 팔을 움켜쥔 이안이 자신의 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몸을 돌리며 주저앉은 이안이 루시아의 어깨를 감싸 쥔 채 안도의 한숨을 삼키는 가운데.
“…감사해요, 이안 님.”
품에서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녀석은 힘없이 눈을 깜빡이며, 다소 얼빠진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 현기증이 일었던 모양이었다.
“이안 님이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됐으니까 입 다물어. 차라리 그냥 기절하던지.”
말을 자른 이안이, 왼팔을 녀석의 오금 아래에 밀어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루시아는 키가 좀 컸어도 여전히 가벼웠다. 녀석은 당황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이안의 양팔에 안겨 있었다. 반항할 기운도 없을 터였다.
“괜찮은 거요? 응?”
미구엘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장이라도 뛰어 올라올 것 같은 얼굴이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전 멀쩡해요.”
“멀쩡은 개뿔….”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데.
코웃음을 흘리며 새하얀 성화를 일별한 이안이 몸을 돌리는 사이.
“십 년 감수했네….”
가슴을 쓸어내린 미구엘이 안도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것 봐라. 응? 형씨가 같이 올라가길 잘했지?”
“그러게요. 역시… 이안 님은 대단하세요.”
루시아가 이안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덕분에, 성화의 심지가 제 예상보다 훨씬 더 크게 만들어졌거든요.”
“그럼 뭐, 더 오래 유지되기라도 한단 거냐?”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안이 물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장작만 꾸준히 넣어준다면, 아마 몇 달은 너끈할 거예요. 놀라운 일이죠. 아마… 원장님도 방금처럼은 못 하실 거예요.”
“뭘 또 그렇게까지야….”
“정말이에요. 아무래도 이안 님의 피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 같아요. 축복이 깃들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빈말 같지는 않았다.
혼돈력 때문인가. 아니면, 이 몸이 고대인의 직계 혈통이라서?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미구엘이 계단 앞까지 다가와 루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턱짓했다.
“데리고 가. 며칠은 쉬어야 할 것 같으니까, 딴짓 못 하게 감시 잘해라.”
“며칠이나 요양이 필요하지는-”
“분부대로 하겠소. 대전사.”
루시아의 말이 끝나기 전에 냉큼 대답한 미구엘이 양팔을 뻗었다. 이안이 루시아를 그의 양팔에 건네줬다.
“어이구. 언제 또 이렇게 무거워졌담.”
“그 말씀은 실례에요. 미구엘.”
루시아의 힘없는 목소리에, 미구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루시아를 고쳐 드는 사이, 녀석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 님은 어쩌시려고요?”
“뒷정리를 하고 식사하러 갈 거다. 넌 딴생각 말고 쉬어. 네가 여기에서 할 일은 끝났으니까.”
말을 마친 이안이 미구엘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미구엘이 몸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
“고생하셨소. 고맙소.”
“그 녀석 손이나 잘 봐줘라. 상처 덧나지 않게.”
“그러겠소. 염려 마시오.”
미구엘이 루시아를 안아 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들었지? 한동안은 침대에만 붙어 있어라. 괜히 형씨 신경 쓰이시게 하지 말고.”
“…그래도 화로를 점검하러는 나와 봐야 돼요.”
“적어도 오늘은 푹 쉬고 나서 해도 돼. 가서 손부터 씻자. 물 끓여 주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위로 돌아갔다.
“북부의 초인이시여….”
“역시… 우리 대전사께선 피도 남다르시구만. 응?”
어느새 주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화로를 구경하고 있었다.
몇몇은 의식을 처음부터 지켜본 듯, 주위 사람들에게 상황을 연신 알려주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다들, 화로에서 번지는 온기를 느꼈으리라.
이안과 눈이 마주친 이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숙였다.
입맛을 다시며 손사래 친 이안이 몸을 돌릴 찰나.
“고생하셨습니다… 대전사….”
단상 옆에서 칼칼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크바사르였다. 그를 돌아본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쉬러 가신 줄 알았소만.”
“다들 그러고 있습니다. 저는, 의식이 무사히 끝나는지 확인하고자 잠시 기다렸을 뿐이지요.”
책임감 있는 양반이군.
내심 생각하며, 이안은 계단과 화로 사이의 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내팽개친 단검이 널브러져 있었다. 주워든 이안이 날에 묻은 피를 망토에 눌러 닦는 사이.
“하얀 불꽃이라니. 성스럽기 그지없군요. 이것을, 이제 어떻게 유지하면 되겠습니까?”
화로를 올려다보던 크바사르가 물었다.
“때때로 장작만 넣으시오. 괜히 나를 따라한다고 피를 뿌릴 생각은 마시고.”
단검을 품에 갈무리한 이안이, 크바사르의 흐린 눈을 마주 보았다.
“타오르는 여신의 이명을 잊으시면 안 될 것이오.”
“…명심하겠습니다. 리그에게 식사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피곤하실테니, 남은 정리는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뭐, 그렇게 합….”
대답하던 이안의 시선이 불현듯 하늘로 향했다.
먹구름 자욱한 하늘이 붉게 물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르릉-!
…또 시작이군.
내심 한숨 쉰 이안이 단상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며 덧붙였다.
“식사는 집으로 가져다주시오.”
그가 그대로 내달렸다. 크바사르가 뒤늦게 그의 뒤통수를 돌아보았다.
“어, 어딜 가십니까?”
“위에.”
대답이 들렸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의 목적지는 눈만 있으면 알 수 있을 터였다.
광장 가장자리까지 달려간 이안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그는 손을 뻗어 지붕 끝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팔을 당겨 몸을 위로 솟구쳤다.
타탓-
착지와 동시에 지붕 위를 가로지른 이안은, 지붕과 지붕 사이를 타 넘으며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저 너머, 2층으로 지은 목조 저택의 지붕이 그의 목적지였다. 어딘가에 벼락이 친다면, 저기서는 적어도 방향 정도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쿠르릉-!
하늘이 또 한 번 번쩍였다.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이안은 벼락을 맞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적어도 화로에 성화가 타고 있는 동안에는, 이 일대에 붉은 벼락이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까.
타탓-
창틀과 벽면을 가볍게 기어오른 이안이, 삽시에 2층 높이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시야가 탁 트이면서 하늘이 조금 더 넓게 보였다. 저 먼 동쪽 하늘에 일렁이는 붉은 빛도.
‘역시….’
번쩍이는 하늘을 차근히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
‘…발작할 때마다 벼락이 치는 건 아니었네.’
이번엔 그저 먹구름을 밝히며 천둥소리만 토해낼 뿐. 벼락이 내리치며 만들어지는 섬광이나 굉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