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35
335화
‘예상대로네.’
이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수록 주기가 짧아지니, 검은 벽의 발작은 앞으로 네다섯 번은 더 예정되어 있었다. 침식이 일어난 뒤에도 다시 안정을 되찾기 전까지는 몇 차례 더 발작할 테고.
아무리 3 챕터라 해도, 그때마다 매번 붉은 광기를 토해낸다면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아마 게임에서도 랜덤하게 발생하는 이벤트였으리라.
‘어쨌건, 몇 번 정도는 더 벼락이 쏟아지긴 하겠지만….’
당장은, 설원지대에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잦아들기 시작한 하늘 너머의 붉은 빛을 올려다본 것도 잠시.
“……?”
이안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눈앞에 퀘스트 완료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설원의 안식처.
받은 적도 없는 퀘스트였다. 적당한 양의 경험치와 힘 능력치 하나가 보상으로 들어왔다.
이내 그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또 퀘스트를 받기도 전에 완료 조건부터 채워 버린 거군.’
조금씩 이런 일이 잦아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건, 게임 시스템에 기록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해결해 버릴 때 나타나는 현상일 터였다.
본래 정확히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었던 퀘스트인지는, 물론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간이 화로의 성화가 완전히 안정됐고, 이 일대가 안전지대가 되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안의 시선이 비로소 아래로 향했다.
“…….”
확장 공사 중인 마을의 전경이 훤히 펼쳐졌다.
잠시 손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주민들이, 하나둘씩 다시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새롭게 확보한 공간이 본래의 마을이 차지하던 공간보다 훨씬 더 넓었다.
건물을 채워 넣고 목책 대신 성벽을 두르기만 한다면, 도시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터였다.
심지어 자세히 보니, 땅에 덮인 눈도 조금씩 녹고 있었다. 거뭇한 흙이 드러나고 있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생각보다 범위가 넓네.’
새로 두른 목책 바깥까지 그랬다.
마물들은 인근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을 느낄, 타오르는 여신의 축복이 내린 땅. 설원의 안식처라는 이름에 딱 맞는 지역이 된 것이리라.
그 너머. 다소 황량하게 느껴지는 숲까지 훑어보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한 지점에서 멈췄다.
꾸물대며 가까워지고 있는 작고 흐릿한 실루엣을 발견한 것이다.
전령이 돌아오는 것이리라.
“…역시.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네.”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읊조렸다.
일이 잘 풀렸다면 이주 행렬과 함께 오지, 벌써 홀로 돌아올 리 없었다. 물론, 장벽 안쪽으로 향했던 이들이 돌아오기에도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심지어 저쪽은 북동쪽이었다. 정착지로 대피하지도 않았던, 전통을 고수하는 야인들의 부락이 포진한 노르 린도르 지역.
“그럼 일단….”
밥부터 먹으면서 기다려야겠네.
이내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좀 전부터 위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피도 흘린 데다, 오늘 눈을 뜬 이래 먹은 건 술이 전부가 아니던가.
“…….”
음식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리그의 모습까지 눈에 담은 이안이, 이내 훌쩍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
문 두드리는 소리가 번진 건, 이안이 식사를 반쯤 끝냈을 무렵이었다.
“전사들이 방문했습니다.”
리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암염으로 짭짤하게 염장된 고기를 우물대던 이안이, 독주로 입을 헹구고는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곧바로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볼베르와 이름 모를 전사였다. 털이 수북하게 덮인 망토 표면이 축축했다. 덮여 있던 서리가 녹은 것이리라. 아까 본, 돌아오던 전령이 분명했다.
“대전사를 뵙습니다.”
나란히 선 볼베르와 전사가 고개를 숙였다. 이안은 식탁의 빈자리를 턱짓했다.
“앉아서 얘기해. 먼 길 달려오느라 아직 몸이 찰 텐데, 술도 한 잔 마시고.”
“감사합니다. 대전사.”
고개를 끄덕인 볼베르가 다가오는 가운데, 이름 모를 전사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대단한 은혜라도 입은 듯한 표정이었다. 익숙해져야 할 반응이기도 했다.
이안은 멈추지 않고 식사를 이어가면서, 빈자리를 한 번 더 턱짓했다.
“이 녀석은 비욘입니다. 대전사.”
나무 술잔을 자신과 전사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한 볼베르가, 이안을 마주 보며 술병을 들었다.
“대전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북동쪽으로 보낸 이들 중 하나입니다.”
“그래. 벌써 돌아온 걸 보면, 얘기가 잘 안 됐나 보군.”
이안의 대답에, 술잔을 들던 비욘이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전사.”
“탓하려고 한 말이 아니야. 어떻게 된 건지나 말해 봐.”
덧붙인 이안이 딱딱한 빵을 손으로 찢어 입에 넣었다.
낮게 한숨 쉰 비욘이, 험상궂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풀죽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검은 언덕 마을로 갔습니다. 그 마을에 사는 자들은, 저를 안으로 들이지도 않더군요. 해서, 문 앞에서 대전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안 오면 줘 터질 각오하라고?”
“비슷합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더군요. 그리고 덩치 큰 놈이 걸어 나왔습니다. 마을의 대전사인 가르손이라고 하더군요.”
“대전사께 말씀을 전해 달라고 했답니다.”
술을 한 모금 홀짝인 볼베르가 끼어들었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수염에 반쯤 덮인 입술을 말아 올렸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고요. 한 판 붙어 보자는 뜻이겠죠.”
“결국 그딴 식으로 나오는군…. 시발….”
실실 웃는 볼베르와 달리, 씹던 고기를 삼킨 이안은 이를 갈며 읊조렸다. 하여간 이 정신 나간 야만인 새끼들.
그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볼베르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순순히 부름에 응하는 것보다, 결투 의식 끝에 따르는 것이 더 명예로울 테니까요.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또 언제 대전사와 싸워 보겠습니까?”
대체 왜들 그렇게 나한테 처맞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건지.
고개를 가로젓던 이안이 멈칫했다.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북부의 방식.
소집령에 응하지 않는 마을을 북부의 방식으로 설득하라는. 최소치만 완수한 뒤에 귀환해도 완료되는 선택형 연계 퀘스트였다.
보상은 경험치와 물음표 하나. 아마도 물음표는 전체 조건을 완수해야 받을 수 있는 보상일 터였다.
퀘스트를 훑어보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노르 린도르에 독립된 마을이 몇 개라고?”
“저희가 파악하고 있는 건 세 개입니다.”
볼베르의 대답에, 이안은 별말 없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퀘스트는 다섯 개라고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둘은 그를 따르는 전사들과는 접점이 없는 것이리라.
정보는 현지에서 조달해야겠군.
내심 읊조린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른 마을에 간 녀석들도, 내일쯤엔 전부 돌아오겠군.”
“아마 늦어도 정오쯤엔 도착할 겁니다. 거절당한 놈들만 말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녀석은, 함께 돌아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겁니다.”
“다 돌아올 거야. 내일 정오쯤 출발하도록 준비를 시작하지.”
이안의 단언에, 볼베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미소 지었다.
잘 저민, 밥도둑이 따로 없는 염장 고기를 입에 넣은 이안이 덧붙였다.
“시간이 많지 않아. 소수 인원으로 빠르게 돌 거니까, 달래고 길 잘 찾는 인원으로 다섯만 추려.”
“저도 동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대전사.”
비욘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안의 시선에,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비록 실패했지만, 검은 언덕 마을까지 가는 길을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해. 그럼.”
이안의 대답에, 눈썹을 들썩이던 볼베르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럼 셋만 더 뽑으면 되겠군요. 저도 당연히 같이 갈 테니까요.”
죽어도 못 놓칠 구경거리란 거지.
코웃음 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가. 어련히 알아서 잘 준비하겠지만. 절대로 도중에 말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일은 없게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대전사.”
둘씩 짝을 지어 북동쪽으로 떠났던 전령들은, 그날 밤과 다음 날 오전에 차례로 돌아왔다.
물론, 그들이 가져온 결과 역시 비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장비 대부분을 아공간에 넣고 두툼한 털옷과 곰 가죽 망토만 걸친 이안은, 정오가 되기도 전에 전사 다섯을 이끌고 마을을 떠났다.
따라가고 싶다는 루시아와 미구엘은, 마을에 남겨둔 채였다.
***
다그닥- 다그닥-
앞서 달리던 말이 빠르게 속도를 줄였다. 그 뒤를 따르던 닐라가 자연스럽게 보폭을 맞췄다.
말들이 내쉬는 숨결이 거칠었다.
이틀하고 몇 시간을,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이동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힘이 남은 건 닐라 뿐이었다. 녀석은 더 달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듯, 오히려 연신 콧김을 뿜어댔다.
“저기 보입니다. 대전사.”
앞장서 안내하던 비욘이 말을 옆으로 몰며 내뱉었다.
이안은 눈 덮인 언덕 위, 빼곡하게 솟은 목책을 눈에 담았다.
예전에 본 야인 부락처럼 제법 높게 솟은, 성벽에 가까워 보이는 높은 담장이었다.
물론, 이안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빨리 끝내야겠네.’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고삐를 흔들 뿐이었다. 닐라가 기다렸다는 듯 선두로 나섰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목책 위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듬성듬성 솟은 망루에서, 장궁을 손에 든 야인 전사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리의 선두에서 백마까지 타고 있으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래. 정말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릴 순 없었겠지.’
굳게 닫힌 대문이 가까워지자, 망루의 전사 몇몇이 화살을 겨눴다. 하지만 닐라는 오히려 쏠 테면 쏴 보라는 듯 고개를 치켜든 채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물론, 화살은 단 한 발도 날아들지 않았다.
이안은 녀석을 멈춰 세우고 나서야 목책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나한테 처맞고 싶은 놈이 있다던데.”
“……!”
그가 내뱉은 말에, 전사 몇몇이 눈을 치켜떴다. 예상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인 모양이었다.
활을 내리며 서로를 돌아본 그들이, 손가락을 입에 물고 휘파람 소리를 내며 망루 뒤편으로 사라졌다. 대문 너머에서 나지막한 소란이 번진 것도 잠시.
끼이이이-
이안의 앞을 막고 있던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 너머에 선 전사들은, 뜻밖에도 대여섯에 불과했다.
이안을 따르는 전사들과 달리 털가죽으로 만든 옷만 걸치고 장창을 움켜쥔 채였다.
“…따라오시오.”
이안과 일당들을 돌아보며 내뱉은 그들이, 몸을 돌려 마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닐라가 기다렸다는 듯 뒤를 따랐다.
“…….”
“…….”
본래도 그리 생기 넘치지는 않았을 마을은 지금, 기묘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청설모 꼬리를 들고 놀던 아이들과 가죽을 다듬던 여인들. 대낮부터 취해 있는 전사와 노인들까지.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백마 탄 이방인과 그를 따르는 야인 전사들을 눈에 담았다. 그들은 일행이 지나치고 나자 주춤주춤 뒤를 따라왔다.
어쨌건 그리 큰 마을은 아니었다. 전투 가능 인원이라고 해봐야, 많아야 서른 남짓에 불과할 터였다.
물론, 그게 이들이 별 볼 일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이 정도 규모로 자족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나약할 리 없었으니까.
‘딱히 적대적이지도 않고.’
이안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중 나온 전사들은 물론, 주민들의 눈빛 역시 대부분 두려움과 호기심만 머금고 있었다.
다각- 다각-
곧 대충 눈을 쓸어낸 언덕 꼭대기가 가까워졌다. 그나마 평지에 가까웠고, 카르하가 분명한 투박한 조각상이 장승처럼 서 있는 공터였다.
보이지 않던 전사들은 이 주위에 모여 있었다. 스물 남짓. 그리고 공터 한복판에 홀로 선 놈이, 아마도 이안의 상대일 터였다.
설표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걸치고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우뚝 선 놈은, 북부 야인 중에서도 덩치가 큰 축에 속했다.
“호오….”
낮은 탄성을 흘리며, 이안을 발견한 순간부터 활짝 미소 짓고 있기까지 했다.
수염이 멋대로 자란 험상궂은 얼굴에선 뜻밖에도 적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을 뚫어질 듯 응시하는 눈에는 기대감과 호기심, 그리고 호승심이 뒤섞여 반짝일 뿐이었다.
‘진짜 그냥 한 판 붙어보고 싶었던 건가.’
한숨을 삼킨 이안이 고삐를 당겼다. 곧바로 멈춰선 닐라가 치켜들고 있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안을 바라보던 녀석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나는 헤가르의 아들. 검은 언덕의 대전사, 가르손이다.”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가르손의 눈이 묘한 기대감을 머금고 반짝이는 가운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말이 짧군. 몇 살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