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42
342화
“우리가 앞이라니 운이 좋군. 대전사의 연설을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겠어.”
“지금은 그렇지. 행군할 땐 맨 뒤다. 그때는 저 뒤의 놈들을 부러워하게 될 거라고.”
“그건 그때 생각하자고.”
이미 백 명도 넘는 전사들이 광장에 줄지어 늘어선 채였다.
그 뒤로도 창이나 도끼를 움켜쥔 전사들이 광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들 동물이나 마물의 가죽으로 만든 두툼한 망토를 걸치고, 그 아래로 각자가 가진 최고의 장비로 무장한 상태였다.
“오와 열 맞춰! 뛰지 말고!”
말에 탄 채 광장 후미를 오가는 이들이 전사들에게 연신 소리쳤다. 백인장을 비롯한 최정예들로, 고작해야 스물 남짓한 숫자였다. 보급품을 실은 짐 마차를 끌어야 해서, 남은 말의 숫자는 저게 전부였다.
보급품을 실은 짐 마차는 저 멀리, 대문 인근으로 이어진 길가에 줄지어 정차되고 있었다.
‘오합지졸이 따로 없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체계적인 모습들이었다.
원로들이 큰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대부분 전쟁의 시대에 북부군에 징집된 경험이 있지 않던가.
그들에게 남은 영구적인 장애 대부분은 그 시대에 얻게 된 것들이었다.
“…대전사께서 지켜보시는군.”
“대전사는 난잡한 걸 싫어하시니까. 헛짓하는 놈들은 다가가서 뒤통수를 날려 버리자고.”
백인장들이 형형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그 와중에 이안과 눈이 마주친 몇몇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백인장은 모든 마을의 대전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팔씨름을 통해 결정했다. 물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결투 의식을 치렀다. 그 끝에 최종적으로 남은 여섯은, 모두 이안이 직접 백인장으로 임명했다.
“위풍당당하시군… 카르하께서 저런 모습이셨겠지.”
“대전사는 전투가 시작되어야 진면목이 드러나시지. 또 함께 싸울 수 있다니. 이번 전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
그 와중에도 광장은 반 이상이 채워지고 있었다.
장기 말처럼 도열한 전사들 대부분은, 화로를 등지고 선 이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정만으로도 벅찼는데….’
그 모습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쩔 수 없이 책임감이 선명해졌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부단히도 가지지 않으려 노력했던 세 가지 감정 중 하나였다.
“지나가겠소. 자자, 눈 부라리지 마시오. 나도 내 자리 찾아가는 거니까.”
그때, 모여드는 주민들 사이를 헤치고 두건 망토를 눌러쓴 미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 두 마리의 고삐를 한 손에 쥐고 끌고 오는 채였다.
또 다른 말에 탄 칸토는, 수선을 떠는 미구엘의 뒤통수를 못마땅한 듯 내려다보며 따라오고 있었다.
“어이구, 벌써부터 장관이 따로 없구만.”
하지만 미구엘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가슴 벅찬 얼굴로 모여드는 전사들을 두리번댈 뿐이었다.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가게 되리라는 사실은, 적어도 지금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집결 중인 모든 이들이 그래 보였다.
‘역시 투쟁의 민족인가.’
하긴. 이들에게 격렬한 전투 끝에 맞이하는 죽음은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사후에 카르하가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차라리 제대로 싸울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천천히 말라 죽는 것을 훨씬 더 두려워하리라.
미구엘과 칸토는 단상의 좌측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칸토가 고개를 숙이는 가운데, 그에게 들고 있던 고삐를 건네준 미구엘이 단상으로 다가왔다.
“생각보다 일찍 나오셨소. 형씨.”
“목소리는 왜 낮춰?”
“거, 괜히 눈치 보여서 말이오. 잠시 올라가겠소.”
미구엘이 주섬주섬 단상 위로 기어 올라왔다. 루시아처럼 망토 아래로 새로운 방어구들을 장착하고 있었는데, 왼팔의 의수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안의 뒤를 지나친 미구엘이, 루시아가 기도 중인 제단 옆에 멈춰 섰다. 기도를 끝낸 루시아가 탈진할 것을 대비한 것이리라.
“여기서 보니 더 대단하군.”
광장으로 모여드는 전사들을 눈에 담으며, 미구엘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이내 그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형씨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신 거요.”
“결과가 좋아야 업적으로 남게 되겠지.”
“글쎄. 죽으면 전설이 되고, 살아남으면 역사가 되지 않겠소?”
이놈이 이런 말을 다 한다고?
이안은 저도 모르게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 담긴 놀람을 읽었는지, 미구엘이 머쓱한 웃음을 머금었다.
“한동안 노인네들이랑 놀아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사제 같은 말이 다 나오는군.”
칸토는 도시에 뜻밖의 도움을 주었다. 도시의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문서화해 정리해 준 것이다.
자치령과 제국, 교단에 정식으로 보내질 문서였고, 덕분에 칸토를 보조하는 미구엘은 정확한 정보를 위해 원로들을 따라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어쨌건, 원로회의 만장일치로 채택된 공식적인 도시의 이름은 호프 시였다. 이안이 만들어 낸 결과이니 그의 성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안은 물론 거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벌써 거의 다 모였군…. 이제 조용히 있겠수.”
덧붙인 미구엘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어느덧 집결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도열한 야인 병단은 광장을 가득 채우고, 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이외의 길가에는 마을의 주민들이 나와 지켜보는 중이었다. 건물의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가 걸터앉은 녀석들도 많았다.
“저기가 내 자리였어야 했는데.”
“네가 기침만 참았어도 안 걸렸을 거라고.”
대부분이 어린 전사들이었다. 다들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도열한 전사들과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다소 불퉁한 얼굴인 아스켈도 있었다. 녀석은 상황을 받아들인 듯 지붕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이안이 아니라 기도 중인 루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놈 봐라?’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꿈틀대는 사이, 단상으로 익숙한 말발굽 소리가 번졌다.
다각- 다각-
한층 더 두껍고 풍성한 검은 털로 덮인 새로운 방한 장구를 전신에 착용한 닐라였다. 푹 쉰 듯 기운이 넘쳐 보였다. 장구 아래로 새롭게 갈아 끼운 마석들이 잔뜩 박힌 은빛 마갑이 방한 장구 아래로 설핏 드러났다.
녀석 곁에 걷는 리그도, 이안의 말대로 고삐를 쥐지는 않은 채였다. 녀석은 친구들로 보이는 다른 꼬마 녀석들과 함께, 눈을 빛내며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의 뒤편으로 원로들이 다가섰다. 다들 오늘만큼은 전사다운 복장을 갖춰 입은 채였다. 이렇게라도 출진하는 전사들에게 예를 갖추고 싶은 것이리라.
솨아아-
이안의 등 뒤가 문득 밝아진 건 그때였다. 웅성대던 이들이 다들 입을 다물었다. 화로에서 더 밝은 빛이 번지고 있었다. 이안의 등 뒤로 후광이 비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후….”
긴 한숨을 내쉰 루시아가 비틀대며 일어섰다. 재빨리 달려 올라간 미구엘이 녀석을 부축했다.
“준비 다 됐어요. 이안 님.”
미구엘과 함께 제단을 내려온 루시아가, 이안의 뒤를 지나치며 속삭였다.
“잠시 옆에 누워라도 있어라.”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는 화로 내부에 응집된 신성력과, 그 사이의 흐릿한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검에 맺힌 신성력이 일종의 마개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
단상을 내려간 루시아와 미구엘이 칸토 쪽으로 다가가는 것까지 눈에 담은 이안이, 비로소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광장은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도열한 수백의 전사들과 주민들이 눈만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왼팔의 문신에서 뜨끈한 열기가 번졌다.
‘신이라는 놈이 보채긴.’
내심 콧방귀를 뀐 이안이 비로소 몸을 돌렸다. 그는 그대로 손을 뻗어, 화로 위에 놓인 대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자루를 타고 번진 온기가 몸속으로 밀려 들어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동시에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루 엔테르의 사도. 아마도 수행 사제의 계시 퀘스트일 터였다.
‘하여간, 이놈의 신들은 틈만 나면.’
이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퀘스트를 거절했다.
그는 불씨의 운반자이기도 하니, 계시를 거절했다고 축복을 거둬들이지는 않을 터였다.
문신의 열기가 조금 더 뜨거워지는 가운데, 이안이 힘차게 대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솨아아-
동시에 화로 내부에서 번진 온기가 열풍처럼 사방으로 번졌다. 차가운 북부의 공기마저 삽시에 따스하게 만들 정도였다.
동시에 이안은 몸속 어딘가에 자리 잡는 열기를 느꼈다. 심상을 들여다보면 불씨가 일렁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신성. 전에도 경험한 적 있는 감각이었다.
몇 가지 원소 저항력과 생명력 회복 수치를 높여 주는, 루 엔테르의 축복.
“오오….”
“이, 이건…?”
전사들과 주민들 사이에서도 낮은 탄성이 파도처럼 번졌다.
모든 이들에게 같은 축복이 내린 것이리라.
‘통이 크시군.’
이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급속 행군을 앞둔 시점에서 이보다 더 좋은 축복은 없었다.
물론, 저들이 탄성을 터뜨리는 건 그저 축복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부의 초인이여….”
“대전사….”
이안이 치켜든 대검의 검날에, 새하얀 불길이 맺혀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색 겁화. 활성화형 신성 스킬이었다. 정보창 옆에는 남은 신성력의 잔량을 표기하는 숫자까지 적혀있었다. 대검 내부에 자리한 신성의 근원을 불사르는 것이리라.
남김없이 태우고 나면 스킬 자체가 사라질 터였다.
‘겁화라니. 피를 먹여서 그런가?’
당장 중요한 의문은 아니었다. 루시아가 말한 것처럼 냉기 칼날을 사용할 수 없게 됐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푸스스-
이안이 대검을 옆으로 늘어뜨리자, 검날에 맺힌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일대가 다시 고요해지는 가운데, 이안이 다시 정면을 돌아보았다.
고요한 열기가 맺힌 시선들. 그 모든 눈빛을 차근히 눈에 담은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 순간부터 너희가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철칙은, 두 가지뿐이다.”
그다지 크게 내뱉지도 않았건만.
그의 목소리는 웅웅 울리며 멀리까지 번졌다. 왼팔의 문신에서 번진 카르하의 신성이, 그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전사들은 지금 귀가 아니라 온 몸으로 소리를 듣는 것처럼 느껴질 터였다.
“북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워라. 그리고, 살아남아라.”
이안이 늘어뜨리고 있던 대검을 한 손으로 치켜들었다.
상반된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묻겠다. 따르겠는가?”
대답은 곧바로 터져 나왔다.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대전사!”
도시에 감도는 온기를 밀어내는 것 같은 우렁찬 외침이었다.
쿵, 쿵, 저마다 손에 든 창대나 발로 땅을 구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박자를 맞추듯 이어지던 외침은, 이안이 치켜든 대검을 다시 늘어뜨린 순간 칼로 자른 듯 멈췄다.
전사들을 돌아본 이안이, 입술 끝을 슬쩍 말아 올리며 덧붙였다.
“그럼 힘들 그만 빼고 움직여.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다.”
동시에 백인장 중 하나가 손에 든 뿔피리를 길게 불었다. 후미의 전사들이 짐 마차를 향해 우르르 달려가는 가운데, 광장에 선 모든 전사가 일제히 뒤로 돌아 걸어나갔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백인장들이 저마다 전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다각- 다각-
홀로 걸어 나온 닐라가 단상 앞에서 멈춰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을 돌아보는 녀석의 눈동자에도 흐릿한 열기가 아른거렸다.
‘말들한테도 축복을 내려줬다고?’
진짜 통이 크시군.
헛웃음을 삼킨 이안이, 대검을 단상 아래의 땅에 지지대 삼아 찌르며 훌쩍 안장에 올라탔다. 대검을 뽑아 들었는데도, 닐라는 비틀대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그저 콧김 한 번을 뿜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오오오-!”
“북부의- 초인이여-!”
지붕에 걸터앉아 있던 어린 전사들이 하나둘씩 벌떡벌떡 일어서 소리친 건 그때였다.
그들의 포효는 삽시에 주민들과 원로들에게까지 번졌다. 모든 이들의 전투 함성이 대전사와 그의 군단을 배웅하고 있었다.
그들을 잠시 돌아본 이안이, 이내 고삐를 후려쳤다.
다그닥- 다그닥-
닐라가 기다렸다는 듯 내달렸다.
“허이구… 피가 끓고 좋긴 한데. 이 나이에 급속 행군이라니, 벌써 꼬리뼈가 다 시큰하네.”
“축복을 믿으세요, 미구엘. 심지가 다 타기 전까지는 쉬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요.”
“타오르는 여신의 종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군요. 미구엘 사제. 열정을 가지세요.”
말에 탄 세 전투 사제가 대화를 주고받으며 느긋하게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칸토의 미간이 설핏 좁아진 건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성자 대행께선 대검을 어디에 두신 겁니까?”
그의 시선은 행렬을 앞질러 달려가는 이안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대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칸토를 제외하면, 아직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
“…….”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를 돌아본 루시아와 미구엘이,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삐를 후려치며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