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52
352화
“……!”
이안은 비로소 눈을 깜빡였다.
현실이었다. 동시에 눈앞으로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하나가 아니었다. 침식의 결과. 전선의 생존자들. 심연의 제사장.
연달아 세 개의 퀘스트가 생긴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내용이나 확인할 때가 아니었다.
창을 전부 꺼버리며 고개를 돌리던 이안이 멈칫했다.
“깨, 깨어나셨소?”
깊이 눌러쓴 두건 탓에 좁은 시야에 미구엘의 얼굴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이안의 미간이 순간 좁아지자, 미구엘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부럴…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든 것 같네. 아무한테도 안 들켰소. 뭐, 검은 벽에 홀리기라도 하셨던 거요?”
두건을 깊이 덮은 게 미구엘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닐라도 멈추지 않고 걷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침식이 시작됐다. 그러니 당장 행군을 멈추고-”
내뱉으며 마저 뒤를 돌아본 이안의 눈매가 순간 꿈틀댔다.
뒤따르는 군단의 진영이 어느새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루시아가 탄 화로 마차가 따라오고, 사제단과 사십여 명의 기마병들이 호위하듯 그 주위에 모여 있었다.
저벅- 저벅-
보병들은 그 뒤에 가로로 길게 포진한 상태였다. 말에 탄 백인장들이 저마다의 백인대를 통솔하듯 앞장선 채였다. 그들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비로소 귓가를 울렸다.
짐마차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군단병 전원이 완전히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이안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미구엘의 머쓱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 일단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전부 전투태세를 갖추고 따라오게 했소. 행군 속도도 더 높였고 말이오.”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핀 그가 덧붙였다.
“형씨는 카르하께 계시를 받고 있다고 대충 얼버무렸소. 마음에 안 드신다면-”
“아니. 아주 훌륭해.”
이렇게 기특한 짓을 다 해 놓을 줄이야. 미구엘을 돌아본 이안이 덧붙였다.
“수고했다. 부군단장.”
“아니… 뭐… 내가 한 건… 마음 졸인 것밖에 없긴 한데….”
뜻밖이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던 미구엘이, 이윽고 입가에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두건을 벗으며 다시 군단을 돌아보았다.
“침식이 시작됐다.”
마력이 살짝 실린 그의 목소리가 번져 나갔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군단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됐다.
“우리가 늦는다면 카링기온은 완전히 붕괴될 거다. 진영을 유지한 채로, 가장 빠른 속도로 전진한다. 할 수 있겠나?”
“–!”
숨죽인 채 눈만 빛내며 듣고 있던 군단병들이 일제히 짧은 함성을 내질렀다. 손에 쥔 고삐를 살짝 흔들며, 이안이 덧붙였다.
“전군. 진격.”
닐라가 걷는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적당한 속도가 되자 고삐를 다시 슬쩍 당긴 이안이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전선의 환영을 봤다. 지금 이 순간이었어.”
“어땠소?”
묻자마자 마른 침을 삼킨 미구엘이 목소리를 낮췄다.
“…많이 안 좋았소?”
“아직은.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거야. 아주 위험하고,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라.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루시를 지키고, 죽을 것 같으면 주저하지 말고 튄다. 맞소?”
“그래. 루시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부군단장.”
“알겠소.”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면서, 미구엘이 덧붙였다.
“그런데 말이오.”
“……?”
“아무리 그래도, 죽으면 죽었지 혼자는 못 튀겠소. 이제 이래 봬도 엄연한 사제라서 말이오. 그러니 혹시라도 내가 죽거들랑-”
“거기까지.”
말을 자른 이안이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재수 옴 붙는 소리 하지 마라. 빨리 침 뱉어.”
“…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미구엘이, 이윽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침을 탁 뱉었다.
새끼, 웃긴.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가의 미소는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진 뒤였다.
미구엘에게 한 번 더 언급한 건, 루시아와 그를 아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까지 챙길 자신이 없어서였다.
자신의 목숨을 챙기기에도 버거울 것 같았으니까.
쿠웅… 쿠릉….
은은한 굉음이 번지는 저 너머를 응시하던 이안의 시선이 자신의 왼팔로 향했다.
문신에서 열기가 번지고 있었다. 간지럽기도 했다.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어서 전선으로 가라고. 그래서 만족스러울 만큼의 투쟁을 보여달라고.
‘…너야말로 만족스럽게 신성을 내려주는 게 좋을 거다.’
이번엔 정말, 몸속이 전부 타버려도 괜찮으니까. 속으로 덧붙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치이이이-
왼팔을 타고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르하의 전투 문신이 더 커지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주겠단 거지…?’
아니기만 해봐라. 백정 새끼야.
이를 악문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굉음이 번지는 저 너머의 하늘에, 검붉은 소용돌이가 점점 더 선명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
“쏴라-! 멈추지 말고 쏴!”
퍼엉-! 쒸아악- 콰르르-
“보급병! 화살! 화살통을 더 가져와! 당장!”
“아하핫… 하하핫!”
고함과 욕설. 비명과 폭음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높고 두껍게 쌓인 장벽 위는 지금, 말 그대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쒸에에엑-!
머리 위로 투석기가 쏘아 보낸 돌덩이가 날아오르고, 성곽에 줄지어 놓인 노포에 붙은 병사들은 쉬지 않고 발사와 재장전을 반복했다.
“찔러-!”
검을 치켜든 루카스가 소리쳤다.
장창을 움켜쥔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내뻗었다. 창날이 장벽에 착지한 검은 하피의 날개와 등판으로 틀어박혔다. 창날에서 주황색 불티가 튀었다.
“키에엑-!”
다리로 짓누르고 있던 병사의 머리통을 씹으려던 하피가 비명을 내질렀다. 놈이 발작적으로 날개를 휘저었다. 병사들은 이미 찔렀던 창을 회수해 뒤로 물러난 뒤였다.
쒸에에엑-
활짝 벌어진 날개 사이로 루카스가 달려들었다. 그가 치켜든 검을 휘두르자, 주황색 불티의 궤적이 길게 허공을 갈랐다.
콰직-!
하피의 기다란 목이 불티를 사방으로 튀며 잘려나갔다.
잘린 단면에서는 피도 튀지 않았다. 쉭, 하는 숨소리와 함께 연기만 살짝 피어올랐을 뿐이었다. 불티의 궤적이 놈의 잘린 단면을 그대로 태워버린 덕분이었다.
철퍽 떨어지는 머리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루카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봐. 의식이 있나? 대답해.”
“예, 예…! 지휘관님. 덕분입니….”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이던 병사가 피를 왈칵 토했다. 아마 하피에게 복부를 짓눌린 여파일 터였다.
한쪽 팔뚝도 갑옷째로 움푹 뜯겨나가 피가 철철 흘렀다.
“요새 안으로 옮겨. 빨리.”
창병 하나를 돌아본 루카스가 말했다. 하피의 체액이 묻은 창을 냉큼 내려놓은 병사가 부상병을 부축해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루카스는 또 다른 창병과 함께 하피 시체를 성벽 가장자리로 끌고 갔다. 쇠뇌로 하늘과 땅을 겨누고 있던 병사들이 물러났다.
“멈추지 말고 계속 쏴. 아무도 이 위에 내려앉지 못하게.”
그들에게 내뱉으며, 루카스가 하피 시체를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놈의 형체는 성벽 아래로 우글대는 것들에게 삼켜져 흔적도 알아볼 수 없었다.
“키에엑-! 키엑!”
“크워어억!”
이미 성벽 아래는 해자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마물과 마수 시체가 쌓여 있었다. 밀려드는 놈들은 그 시체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기록과 너무 달라. 대체….’
때마침 노포의 화살에 꿰뚫리는 외눈 거인을 내려다보며, 루카스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첫 침식 때 벽을 넘어온 놈들은, 각 요새의 공식적인 기록을 합쳐도 수천에 불과했다. 누락 된 부분이 많다 하더라도 만 단위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만 이미 수천은 우글대고 있는 것 같았다.
지원군이 도착하지도 않은 지금. 군단 하나 규모의 방어 병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어쩌면 지난 십여 년간, 저 너머에선 마물들이 끝도 없이 증식만을 거듭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하지만 루카스는 물론, 다른 지휘관과 병사들도 아직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다들 흥분과 공포로 뒤덮인 상태인데도 그랬다.
그들이 훈련하고 준비해 온 것들이 합당한 효과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석기도. 장벽과 요새 첨탑 곳곳에 장착된 노포도. 쇠뇌는 물론이고 장벽 위로 올라온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훈련한 창병들까지.
모두가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우선은 침식이 끝날 때까지만 어떻게든….’
생각하던 루카스가, 미간을 와락 구기며 손바닥으로 눈 앞을 가렸다.
콰르르르르-
예고도 없이 터져 나온 눈부신 불길이, 성벽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번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하핫…! 하핫! 이토록 강대한 힘이라니…! 역시 검은 벽은…!”
그가 지휘하는 구역에 배정된. 좀 전부터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알아듣지 못할 말만 떠들어 대는 마법사가 토해낸 불길이었다.
성벽 아래에서 마수와 마물들의 비명과 열기. 매캐한 탄내를 맡으며, 루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저, 저자가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든 게 확실해서만은 아니었다.
‘검은 벽이 마력을 토해내고 있기도 한 건가…?’
벌써 몇 번째 저렇게 대단한 마법들을 펼쳤건만. 마법사는 여전히 탈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저 옆에 드문드문 선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이거나 처음 느껴보는 막대한 마력에 완전히 도취된 것처럼 보였다. 그게 곧 광기의 시발점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지금은 가릴 때가 아니지.’
시야가 어느 정도 되돌아오자, 루카스는 매캐한 연기와 탄내로 뒤덮인 성벽 아래를 눈에 담았다.
본래 타락하거나 광기에 물든 마법사는 즉시 처형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런 귀중한 전투 자원을 그런 식으로 잃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아직 마법사의 주문은 저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던가.
“아하하… 우웩. 후후. 흐하핫…!”
웃음을 터뜨리던 마법사가 피를 한 모금 왈칵 토하고도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이 아주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계속 쏴! 멈추지 마라!”
성벽 아래를 조금 멍하니 내려다보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루카스가 소리쳤다. 그들이 다시금 쇠뇌를 치켜드는 가운데, 루카스는 저 먼 전장을 훑어보았다.
성벽으로 다가오는 것들의 모습을 전부 파악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죽음의 땅 전체에 거뭇한 안개가 뒤덮여 있었으니까.
흙먼지와 마법의 잔재. 마물의 체액. 검은 벽의 광기까지. 모든 게 뒤엉켜 만들어진 전장의 안개였다.
부- 우우우우-
그리고 그 너머의 검은 벽은, 여전히 검붉게 이글대며 침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주 느리지만 꾸준하게.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지금 루카스는, 침식이 시작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적어도 몇 시간은 지났을 터였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영원히 싸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보면 확실했다. 조금만 더 버틴다면 끝이 보이리라.
‘그런데….’
루카스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하늘이 언제 저렇게 됐지?’
전장의 하늘은 검붉고 끈적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소용돌이의 눈을 중심으로 스멀스멀 번져 나오는 자줏빛이 불길하게 꿈틀댔다. 침공과 함께 시작된 변화였다.
분명 훨씬 더 작고 느리게 일렁이고 있었건만. 어느새 전장의 하늘을 거의 뒤덮다시피 거대해진 것이다.
쿠르릉-
그 한복판에서 굉음이 번진 건 그때였다.
“……!?”
뒤이어 소용돌이의 눈 한복판이 더 빠르게 회전하면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자줏빛이 테두리를 따라 일렁였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구멍 너머 역시 자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고- 오오오오-
그 너머로 섬뜩한 바람 소리가 번졌다. 검은 벽의 울음처럼, 듣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루카스를 얼어붙게 만든 상황은 바로 다음 순간 일어났다.
콰아아아-
눈부신 자줏빛 빛무리가 구멍을 뚫고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번쩍이는 불길이 타오르고, 자주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꼬리가 길게 뒤따랐다.
“저게… 뭔…?”
“…루 솔라 맙소사.”
장벽 위의 병사들을 멍하니 멈춰 서게 만들기에도 충분한 광경이었다.
지휘관들조차 그들을 닦달하는 것도 잊은 채, 하늘을 자줏빛으로 물들이며 떨어지는 세 개의 궤적을 올려다보았다.
“유성…?”
루카스가 멍하니 읊조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자줏빛 불덩이들을 표현할 단어는 그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건 생각만큼 커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저렇게 밝은 빛을 토해내는 건, 떨어지면서 맹렬한 속도로 타들어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행스러운 건 그게 전부였다.
콰아아아-
점점 커지는 굉음 속에서, 루카스는 하늘의 저 거대한 소용돌이가 검은 벽이 아닌 마법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준비해야 할 만큼 엄청난.
물론, 그가 깨달은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다들 엎드려.”
루카스가 덜덜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입술의 떨림이 곧바로 멈췄다. 가까워지는 궤적에서 시선을 뗀 루카스가 장벽 위를 돌아보았다.
“엎드려! 전부! 당장-!”
“……!”
그제야 눈을 치켜뜬 몇몇이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눈부신 빛에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루카스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다들 당장-”
콰과과광-!
그 순간 빛무리가 우뚝 솟은 요새와 요새 뒤편의 절벽에 떨어졌다.
콰르르르르- 콰아아아-
눈부신 폭발과 함께 땅이 무너지는 듯한 진동과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요새 반대편에 선 루카스조차 뒤로 튕겨 나갈 정도였다.
콰과과과-
부서진 요새와 절벽의 잔해가 폭죽처럼 튀어 오르고, 자주색 폭발이 치솟았다. 균형을 잃고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자들의 비명은 그 사이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절벽과 가까운 곳의 장벽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사이 바닥을 나뒹군 루카스는, 자신의 몸을 살필 겨를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쿠- 구구구구-
반파되어 불길에 휩싸인 카링기온 요새가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벽을 향해서.
“다, 다들 피해….”
루카스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간신히 읊조릴 찰나, 비스듬하게 무너진 요새의 잔해가 장벽을 집어삼켰다.
콰르르르르-
지진을 방불케 하는 진동이 다시 한번 장벽을 관통했다.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치솟았다.
쿠구구구- 와르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닥을 뒹굴던 루카스가, 이윽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먼지로 자욱했다. 지금만큼은 마물조차 울부짖지 않았다.
떨리는 팔을 움직인 루카스가 머리를 덮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답답한 시야가 조금이나마 트이는 느낌이었다. 숨을 헐떡대다 몇 차례 잔기침을 한 그가 이윽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무너진 장벽 쪽으로 향했다.
“루 솔라여….”
요새는 불길에 휩싸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생존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속에서 살아남는 게 오히려 더 끔찍한 일이리라.
바닥을 더듬댄 루카스는, 이윽고 자신의 검을 움켜쥐어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댔지만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은 채였다.
“…….”
장벽 위의 전경이 펼쳐졌다.
흙먼지에 뒤덮인 채, 양팔로 목을 가리고 바짝 엎드린 병사들과 지휘관들.
하지만 그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장벽은 삼 분의 일이 흔적도 없이 허물어진 상태였으니까.
요새와 함께 무너진 부분은 물론이고, 그 주위도 형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아래로 산산 조각난 건물과 성벽의 잔해가 너저분하게 흩어진 채였다.
“크허어억-!”
“키에엑!”
인간들보다 한발 앞서 움직인 건 마수와 마물들이었다. 놈들은 언제 숨죽이고 있었냐는 듯 성벽을 따라 내달려, 드러난 공간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방에 널브러진 크고 작은 건물의 잔재들 따위는 저 녀석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리라.
“…….”
물론 장벽 위의 인간들은 그 누구도 그걸 막을 수 없었다.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양팔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여전히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
장벽을 지나쳐 달려가는 마수들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던 한순간.
“—!”
희미한 절규가 루카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전혀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포효였다.
루카스의 고개가 멍하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갔다. 현실감 없는 눈으로 느릿느릿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
루카스의 눈매가 유성을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커졌다.
“다, 다들 일어나…! 다들 일어나! 당장 무기를 들어!”
형편없이 떨리던 목소리에 삽시에 힘이 돌아왔다. 먼지투성이가 된 성벽의 병사들과 지휘관을 돌아본 그가, 이윽고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다들 당장 무기 들고 일어나! 지원군! 지원군이다!”
“뭐, 뭐라고…?!”
“지원군…?”
그제야 땅에 얼굴을 박고 있던 지휘관과 병사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왼팔을 장벽 뒤편으로 내뻗은 루카스가 울부짖었다.
“북부의 초인이 온다-!”
그의 외침에 화답하듯, 저 먼 계곡 너머에서 피가 끓는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멍하니 고개를 돌린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눈이 커졌다.
저 너머, 불타는 것처럼 붉게 물든 군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계곡이 뒤흔들리는 듯한 전투 함성을 내지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