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62
362화
“……!”
그 모습이 루시아에게만 놀라운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새 화신체의 가슴 한복판에 생겨난 눈알이, 사방으로 금색 잔상을 흩뿌리며 다가오는 이안을 주시하며 꿈틀댔다.
슈화악-
놈의 전신에 자줏빛이 핏줄처럼 피어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이안을 주시하는 눈알이 삽시에 달아올라 마력의 궤적을 토해냈다.
쩌엉-! 쿠과과광-!
이안의 앞에서 금광이 번뜩인 순간, 직각으로 꺾여 하늘로 솟구친 자주색 궤적이 눈부시게 폭발했다.
루시아의 눈에 왼팔의 백금 방벽을 치켜든 이안이 선명해졌다.
‘저 단거리에서… 쳐내셨다고…?’
그제야 이안이 방벽으로 궤적을 정확히 후려쳐 튕겨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시아의 입이 벌어졌다.
백금 방벽이 마력을 튕겨냈다는 사실보다 이안이 저 궤적에 반응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국, 구구국-
그 사이 화신체의 두 주먹은 기다랗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팔 끝에 기다란 외날 칼날이 돋아난 것처럼 보였다.
암석처럼 단단하게 응축되는 칼날에 자줏빛이 서늘하게 맺히기 시작했다.
쒸아아악-!
이안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재차 땅을 박차 놈에게로 달려들면서 손에 든 광검을 휘둘렀다.
너덜거리는 촉수들을 꿈틀대며, 화신체도 팔 끝의 칼날을 마주 휘둘렀다.
카가각-!
두 색이 뒤섞인 불티가 눈부시게 튀었다. 자주색 칼날을 가르며 빠져나온 건 황금빛 칼날이었다.
토막 난 화신체의 팔이 마저 허공을 가르는 사이. 그대로 마저 풍차처럼 몸을 휘돌린 이안이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콰지지직-!
황금빛 궤적이 화신체의 옆구리를 길게 훑고 지나갔다. 광검이 훑고 간 자리에 자줏빛이 용암처럼 이글댔다.
“……!”
그뿐이었다. 화신체의 몸은 이번에는 토막 나 쓰러지지 않았다.
잠깐 멈칫했다가, 그대로 아직 칼날이 남은 왼팔을 치켜들었다.
검날을 늘어뜨린 이안의 변이된 오른팔에 힘이 들어간 건 거의 동시였다.
콰과과과과-!
광검이 엄청난 속도로 화신체의 전신을 휩쓸었다. 루시아의 눈에는 이안의 움직임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눈 한 번 깜빡일 찰나에, 화신체의 전신에 십여 개의 황금빛 잔상이 아른거렸다. 사람이었다면 수십 개의 고기 조각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화신체의 난도질 된 전신에는 자줏빛 흔적만이 이글댈 따름이었다.
‘토막 나지 않게… 적응한 거야?’
루시아의 눈매가 꿈틀댔다. 하긴. 새삼스럽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화신체는 신체의 경도나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환하는 것 같지 않았던가.
고오오오-
하지만 고통이나 분노까지 느끼지 않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흉터처럼 이글대던 빛이 삽시에 화신체의 전신으로 눈부시게 번졌다.
쿠-과과과과광-!
백금 방벽을 치켜든 이안이 뒤로 몸을 날린 것과, 화신체의 전신에서 빛의 기둥 같은 눈부신 폭발이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땅이 뒤집히고 일대가 뒤흔들릴 정도의 대폭발이었다.
“……!”
다급하게 멈춰 선 루시아가, 그대로 몸을 날려 미구엘을 망토로 감싸 안듯 가리며 주저앉았다.
콰아아아-
흙먼지가 뒤섞인 충격파가 그녀의 등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루시아는 휘청대면서도 고꾸라지지 않고 버텨냈다.
“으… 으으….”
미구엘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번진 건 그때였다. 화들짝 눈을 치켜뜬 루시아가 그의 얼굴에 한쪽 손을 얹었다.
“미구엘…? 정신이 들어요? 네?”
신음만 흘리며 눈꺼풀을 바들대던 미구엘이, 이윽고 눈도 뜨지 못한 채 간신히 입술만 달싹였다.
“루시…?”
“루 엔테르여 감사합니다….”
그대로 무릎 꿇으며 탄식한 루시아가 미구엘의 뒤통수를 자신의 허벅지에 얹었다.
몽롱하기 그지없던 미구엘의 얼굴에, 뒤이어 혼란과 공포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루, 루시…? 내 몸이…. 몸이 안 움직… 이게 무슨….”
미구엘이 횡설수설했다. 축 늘어진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손끝이 꿈틀대는 것을 눈에 담은 루시아가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영혼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잠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뿐이에요. 쉬다 보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겁내지 말아요. 괜찮아….”
“큰 충격…? 무슨… 아… 아아…!”
미구엘의 눈꺼풀이 번쩍 열렸다.
탁 풀린 그의 눈동자에, 하늘에 어지럽게 뒤섞이는 검붉은 먹구름이 가득 맺혔다.
“뭔가, 엄청난 걸 봤다, 루시…! 우주 저 너머… 끝없는 심연에 도사린… 무언가를!”
숨결이 심장이 터질 듯 거칠어지고, 눈동자가 어지럽게 구름 너머 어딘가를 훑었다. 미구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건 너무나도 거대하고 끔찍하지만… 하지만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안돼요, 미구엘…!”
숨을 멈춘 채 그를 내려다보던 루시아가, 버럭 소리치며 미구엘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왈칵 눈물을 쏟아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뭐건 생각하지 말아요…! 떠올리지도 말고요. 아주 나쁜 꿈이었을 뿐이에요. 우리만 생각해요. 우리가 함께한 기억들만. 제발요, 미구엘.”
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루시아가 흐느꼈다.
“제발… 미구엘까지 잃을 수는 없어요….”
터질 듯 들썩이던 미구엘의 가슴이 잦아들었다. 헐떡대던 미구엘의 숨결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눈을 질끈 감은 루시아가 미구엘의 얼굴을 더 힘껏 끌어안았다.
“숨… 막힌다… 요 녀석아….”
“……!”
꾹 억눌린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루시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재빨리 끌어안은 팔을 푼 루시아가 고개를 숙였다.
“미구엘….”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울어서 그런가…?”
맥없지만 한층 안정된 눈으로 돌아온 미구엘이, 간신히 험악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루시아의 입꼬리가 씰룩댔다.
“지금 미구엘이 할 말이에요?”
“그런가…? 흐흐.”
낮게 실소를 머금은 미구엘이, 이윽고 덧붙였다.
“사제님들은, 전부 돌아가신 거냐?”
루시아의 입가에 간신히 맺혀 있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저를 지키다가.”
“부원장도?”
“…….”
아랫입술을 짓씹은 루시아가 고개만 끄덕였다. 미구엘의 미소가 씁쓸해졌다.
“거, 결국 또 그렇게 됐군. 염병할…. 그런데….”
대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끔찍한 포효가 메아리쳤다. 그에 반응하듯 거세게 검붉은 빛으로 출렁이는 하늘을 잠시 바라본 미구엘이, 포효가 잦아들자 이윽고 덧붙였다.
“아직 안 끝난 것 같은데…? 방금 내가 헛걸 들은 게 아니라면.”
“맞아요. 방금 그건 공허의…. 아니.”
말을 멈춘 루시아가 시선을 돌렸다.
“…직접 보시는 게 빠르겠네요.”
머지않은 뒤편에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었다. 미구엘을 데려다 놓으려던 목적지였다.
미구엘의 상반신을 일으킨 루시아가, 그의 뒤편으로 돌아가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밀어 넣고는 일어섰다.
“이것 참, 민망하….”
축 처진 채 그녀에게 기댄 미구엘의 입이, 이내 멍하니 벌어졌다.
거대하게 뒤틀린 변이체들과 혈전을 벌이는 군단병들의 모습이 저 멀리 펼쳐졌기 때문이다.
“형제들에게 안식을-!”
“카르하여!”
어디서 번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함성과 고함들이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자세히 보니 전장 외곽에 부상자들이 여럿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 역시 목청을 높여 군단병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꾸드득, 뿌득- 뿌득-
그리고 전장 곳곳에서 새로운 마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죽은 마물들과 군단병들의 살점과 내장이 뭉쳐 부풀어 오르는 듯한 형상이었다. 완성되기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달려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미구엘을 깨운 그 충격파가 전장에 또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마저 바위 쪽으로 몸을 돌린 루시아가,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그제야 전장을 지나친 미구엘의 시선이 좌전방으로 향했다.
“루 엔테르 맙소사….”
정확히는 불길한 자줏빛으로 번뜩이며 주먹을 내리찍고 있는 거인에게로.
땅에 박힌 주먹을 중심으로 눈부신 자줏빛 균열이 거미줄처럼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콰과과과광-!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폭발. 미구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저게 대체 뭔….”
“고대신이 직접 빚어낸 혼돈의 응집체에요. 세상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 존재해선 안 될 괴물….”
루시아가 바위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미구엘이 더듬대며 덧붙였다.
“아니, 저 괴물 말고, 다른 쪽….”
그의 시선은 폭발을 가르며 튀어나오는 또 다른 존재를 좇고 있었다.
거대하게 변이된 한쪽 팔과 다리.
부풀어 오른 상반신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 새하얀 미늘 갑옷은 낯이 익었다. 인간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왼팔의 금빛 방패와 오른손에 움켜쥔 기다란 광검도.
결정적으로, 전신에 붉고 거대한 신성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루시아가 멈칫하는 사이, 미구엘이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형씨 같은데. 대체 어쩌다 저런 끔찍한 몰골이 된 거냐? 저건 그냥 타락한 게 아니라… 거의 마족이 된 것 같은데…?”
“그건… 저도 몰라요. 이해할 수도 없고요. …어쩌면 저 괴물을 상대하려면 저 방법밖에 없다고 여기신 걸지도요.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해요.”
미구엘을 바위에 끌어당겨 기대 앉힌 루시아가, 그의 옆에 주저앉으며 덧붙였다.
“변한 건 겉모습뿐이에요. 속은 우리가 알던 이안님 그대로라고요. 보세요. 카르하께서도 인정하고 계셔요.”
“그래… 그건 그래 보이긴 한데… 시부럴….”
미구엘이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게 말이 되는 거냐? 형씨가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여준 게 처음은 아니지만. 혼돈에 물들고도, 신의 축복을 받는다고?”
“영혼까지 물들지 않았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요. 혼돈도, 이안 님의 영혼을 타락시키지는 못한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무리하고 계실 거예요.”
미구엘의 장화 사이로 손을 쑤셔 넣으며,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육체는 영혼과 다르니까. 초인적인 육체를 타고 나셨으니 버티고는 계시겠지만. 서로 상반된 두 힘을 받아들이는 건, 적어도 아주 고통스러울 거예요.”
루시아가 이내 장화 틈에서 고대어가 빼곡하게 새겨진 부적을 꺼내 들었다. 미구엘의 눈을 마주 본 그녀가 흐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도와드려야겠어요. 이제, 미구엘도 이렇게 깨어났으니까.”
“뭘 하려는 거냐…?”
미구엘이 불안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힘 빠진 손아귀에 부적을 쥐여 준 루시아가 잠시 저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위로 자욱하게 밀려난 검은 안개 탓에 장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줄어들고 있는 하늘의 어둠은, 이제 여기서도 그 경계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루시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야죠. 기도.”
“아서라. 화로도 없고, 안색도 백지장 같은데.”
“잊으셨어요? 저는 사도예요. 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저 자신이 화로나 다름없다고요.”
“……!”
미구엘의 눈이 순간 커졌다. 숨을 들이켠 그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만둬라. 성녀님 말씀 잊었냐? 네 영혼과 육체를 장작으로 삼는 건, 네 목숨을 갉아먹을 거다. 게, 게다가 형씨의 저 모습을 타오르는 여신께 보이는 건-”
“저는 이안 님과 군단을 위해 기도할 거예요. 판단은 여신께서 해 주시겠죠. 이안 님의 영혼이 타락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신다면, 카르하께서 그러시듯 도움을 주실 거예요.”
루시아가 말을 잘랐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눈으로 미구엘을 마주 본 그녀가 덧붙였다.
“게다가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도 계신걸요. 그분들의 복수를 위하서라면, 수명 몇 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
“걱정말아요. 그래도 미구엘보다 먼저 천상에 오를 일은 없을 테니까.”
조금은 장난스럽게 덧붙인 루시아가 일어섰다.
“미구엘이야말로 여차하면 그냥 그걸 쓰도록 해요. 괜히 나 걱정시키지 말고요. 알았죠? 미구엘이 위험해지는 게 내 수명에 더 안 좋다고요.”
“…자식이, 말을 해도 꼭.”
이윽고 입맛을 다신 미구엘이, 비위에 뒤통수를 기대며 맥없이 한숨 쉬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침부터 뱉어라. 넌 지금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을 몇 개나 했어.”
빙긋 미소 지은 루시아가 냉큼 바닥에 침을 뱉고는 발로 부볐다.
미구엘이 비로소 체념의 미소를 지었다. 어깨를 으쓱인 루시아가 그를 등지며 몸을 돌렸다.
“…….”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시선이 전장을 훑었다. 지친 와중에도 용맹하게 싸우는 군단병들. 폭격의 흔적이 가득한 잿더미 속에서 전투를 벌이는 이안과 화신체.
부상자들을 수습해 가장자리로 옮겨간 덕분에, 이안과 화신체의 전장은 군단과 다소 떨어져 있었다.
콰과과과-
둘의 전투가 계속해서 격렬해지는 지금은, 더더욱 근처로 얼씬도 할 수 없을 터였다.
전신에 자줏빛을 머금은 화신체는 루시아의 기억보다 조금 더 작아진 것 같았다. 대신 그만큼 더 단단하고 빨라진 건 물론이고, 혼돈의 힘을 파괴적으로 흩뿌려 댔다. 저 자주색만 아니었다면 용암 거인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콰과과광-! 쩌엉-!
이안도 광검과 백금 방벽을 휘둘러대는 틈틈이 온갖 종류의 주문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이제는 군단에게 자신이 여러 색의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긴. 이미 혼돈에 물든 모습까지 보인 판국이 아니던가. 게다가 야인 전사들은 마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터였다.
‘무엇보다… 이것저것 따질 여유도 없으신 거겠지.’
이안의 움직임이 조금은 조급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이안이 자신의 패를 전부 내보이는 건, 언제나 그래야 할 때뿐이지 않던가.
“…….”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어느새 전장의 가장자리까지 충분히 다가섰다.
멈춰선 루시아는 왼손을 흉갑에 얹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빛을 잃은 성흔에 다시금 불씨가 피어오르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