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66
366화
암담함과 동시에, 뇌리로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안의 의식은 삽시간에 현실로 되돌아왔다.
“……!”
옆구리에서 꿈틀대는 느낌이 번졌기 때문이다.
이안은 자신의 몸 옆에 고개를 파묻듯 쓰러져 있는 소녀의 존재를 비로소 깨달았다. 볼 것도 없이, 루시아였다.
놀람과 충격. 욱신거리는 전신의 통증과 잔뜩 늘어나 버린 갑옷 탓에, 이곳에 홀로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 것이다.
“윽… 으윽….”
억눌린 신음이 귓가를 파고든 순간, 이안은 튕겨 오르듯 상반신을 일으켰다. 전신의 아찔한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시아의 망토를 양손으로 붙잡아 함께 들어 앉힌 채였다.
푸스스….
너덜너덜해진 와중에도 용케 벗겨지지 않은 두건 망토 사이로, 거뭇한 연기가 가루처럼 번졌다.
검은 벽에서 느껴지던 것과 비슷한 불길함.
‘…설마.’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이안이 반사적으로 혼돈력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루시아의 창백한 얼굴이 두건 아래로 드러났다. 꼭 감긴 채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도 검은 연기가 가루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녀석의 입술이 달싹였다.
“이안, 이안 님…?”
속삭이듯 떨리는 목소리. 이 와중에도 이안의 손길을 느끼기는 한 모양이었다. 녀석의 입술 사이로 번지기 시작한 검은 연기를 눈에 담으며, 이안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나다. 루시.”
“지금 이게… 이게 대체….”
“억지로 말하지 마. 아무래도 너는 지금-”
“읍…!”
혼돈에 오염된 것 같으니까. 하는 뒷말을 끝내기도 전에, 루시아가 눈을 번쩍 치켜떴다. 흰자위 하나 없이 새카맣게 물든 눈동자.
볼을 부풀린 녀석이, 그의 손을 다급하게 떨쳐내며 몸을 돌렸다.
“우웩…!”
그대로 양손으로 땅을 짚은 루시아가 고개를 떨궜다.
녀석이 토해낸 건 새카맣게 죽은 핏덩이였다. 몸에서 번져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거뭇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콜록 콜록… 웩….”
기침과 각혈이 이어졌다. 루시아의 눈과 입에서 피 섞인 검은 연기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런 녀석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은, 오히려 침착을 되찾고 있었다.
‘게임에서 내 캐릭터도 저랬던 것 같은데.’
그녀의 육체가 혼돈과 광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다소 고통스럽겠지만, 저걸 그대로 품고 있는 것보단 훨씬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어차피 이안이 품은 혼돈의 도움을 받았더라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참지 마라. 남김없이 토해.”
루시아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이안이 속삭였다.
물론 녀석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불순물을 전부 토해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따로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쨌건, 이안의 현실감을 완전히 일깨우기엔 충분했다.
더는 게임을 진행할 수 없게 됐던 4챕터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계획대로는커녕, 그때보다 훨씬 더 이른 시점에. 심지어, 루시아와 함께.
게임에서의 기억과 현실이 된 이후의 기억들이 다시금 뒤죽박죽 번져 나갔다. 침식이 끝난 뒤에 시작하려 했던, 이제는 물거품이 되어 버린 여러 계획들도.
‘…이럴 때가 아니지.’
이 와중에도 그의 정신력은 제 역할을 다했다. 애써 생각을 멈춘 이안은, 상념을 떨치듯 시선을 돌렸다.
당장은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둑어둑한 일대가 한눈에 펼쳐졌다. 밤과 아침 사이 어디쯤처럼 느껴지는 흐릿한 어둠. 적어도 이안이 주위를 분간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골짜기…?’
이안과 루시아가 추락한 이곳은, 바위산이 무너져 내리며 만들어진 듯한 계곡 한복판이었다.
좌우로 검은 흙과 바위가 뒤섞인 비탈이 이어지고, 끝에 높고 기다란 절벽이 솟아 있었다.
이런 장소에 추락하고도 무사하다니. 어렴풋한 꿈 속의 목소리가 문득 뇌리를 스쳤다. 그의 목숨을 구했다는 건, 아마도 이걸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골짜기 능선 아래는 희뿌연 어둠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게임에서 보았던 첫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심지어 북부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북부를 벗어날 만큼 멀리 날아가지는 않았으련만.
‘시공간이 뒤틀린 건가.’
이곳이 마경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감각이 어긋나는 듯한 이질감이 계속되는 것도 그래서이리라.
하지만 어쨌든 그런 와중에도, 이안의 육감은 아무런 경고도 보내지 않았다.
은은한 불쾌감은 이 공간 자체가 가진 불길함 때문일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네.
생각하며 뒤를 돌아본 이안은,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날아왔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먼 산봉우리 너머는, 주위와는 다른 질감의 어둠이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짙은 그림자에 뒤덮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적어도 저건, 게임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때도 벽을 넘었을 때, 먼 뒤편에 저렇게 그림자 같은 안개가 자욱했었으니까.
돌아가 발을 들이면, 이 이상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는 경고창이 떴었다.
‘무시하고 계속 들어가면 게임 오버였고.’
현실이 된 지금도 그런지 확인해 볼 생각은, 물론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이안은 저 그림자 같은 어둠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죽는 것보다도 나쁜 상황에 놓이게 될 터였다.
“하아… 하아….”
그사이, 마침내 기침을 멈춘 루시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물론 두건 사이로 드러난 녀석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부릅뜬 두 눈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대신 경악과 충격을 머금고 있었다.
“이건 대체… 어째서…?”
헐떡이듯 중얼대며, 루시아가 한손을 자신의 망토 안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시선이 흙바닥 위를 황망하게 오갔다.
녀석이 토한 피는 이미 전부 스며들어서, 거뭇한 연기만 흐릿하기 번지는 중이었다.
“헛것이 보이거나 환청이 들리는 거냐?”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고 있던 이안이, 이윽고 속삭였다.
“알 수 없는 갈망이나 충동같은 게 느껴진다거나.”
“그런 게… 그런 게 아니에요.”
루시아가 더듬더듬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안을 올려다 본 녀석이, 피 묻은 입술을 달싹였다.
“타오르는 여신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요, 이안 님. 전혀… 조금도요….”
“…아.”
짧게 탄식한 이안의 입가에 옅은 쓴웃음이 번졌다. 눈치채지 못한 듯,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성흔이 완전히 식어 버렸어요. 사실, 거의 느껴지지도 않아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루시.”
“네…?”
“우리는 지금, 신들의 시선이 전혀 닿지 않는 곳에 있으니까.”
“그게 무슨. 여긴 북부….”
어리둥절하게 되묻던 루시아가 멈칫했다. 이제야 환경의 변화를 느낀 것이리라. 어쩌면 계속해서 느껴지던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을 뿐인지도 몰랐다.
손을 뻗어 녀석의 눈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며, 이안이 덧붙였다.
“우린 검은 벽을 넘었다. 루시.”
“……! 말도 안….”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 본 루시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기름이 뒤덮인 해수면 같은 하늘과 오로라처럼 번들대는 불길한 빛들. 그리고 그 아래 행성의 파편같이 부유하는 바위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
입을 설핏 벌린 루시아가 굳어졌다. 두건이 벗겨지면서 망토가 땅에 흘러내렸지만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놀랍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기도에 들어가기 직전이 녀석의 마지막 기억일 테니까. 한순간에 다른 세상에 떨어진 느낌일 터였다.
‘그게 얼마나 충격적인지는, 나도 잘 알지.’
이안은 굳이 녀석의 정신을 억지로 일깨우려 하지 않았다.
대신 슬쩍 옆으로 물러앉고는, 곧바로 백린 갑옷의 고정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변이된 육체가 본모습을 되찾으면서, 그는 지금 어른의 옷을 걸친 아이 같은 몰골이었다.
철그럭….
삽시에 백린 갑옷을 분리해 벗은 이안이, 옆에 펼쳐 내려놓았다.
축 늘어진 갑옷 표면에는 지난 전투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미늘은 반 이상 떨어져 나가 판금 안감을 훤히 드러낸 데다, 특유의 광택도 완전히 잃었다.
흙먼지와 말라붙은 체액투성이라는 건 말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보기와 달리, 정보창 상의 내구도는 여전히 제법 남아 있었다. 능력치도 전체적으로 조금 떨어졌을 뿐, 여전히 아주 준수했다.
‘썩어도 준치라 이거지.’
축 늘어진 각반으로도 손을 뻗은 이안은, 각반을 벗는 대신 판금 안감을 하나씩 다시 밀어 넣어 겹치기 시작했다.
알몸이 되어서 루시아에게 또다른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안 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판금 안감은 그가 밀어 넣은 그대로 다시 잘 고정됐다.
이안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나갔다. 그러면서도 의식은 내면에 축적된 마력을 살피고, 눈으로는 상태창을 일별한 뒤에 본모습으로 되돌아온 상반신을 훑었다.
역시나 레벨은 하나가 더 오른 상태였고, 마력은 평소보다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육체에도 영구적인 결손은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아직 완벽하게 재생이 끝나지는 않은 듯, 몸 곳곳이 얼룩덜룩했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고통의 원인이기도 하리라.
물론 융합체가 되었을 때 느껴지던 고통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양손, 늪지의 원한과 성 다미엘의 반지도 무사했다. 빛을 잃은 성물 반지와 달리, 늪지의 원한에서는 이질감과 존재감이 선명했다.
융합체가 되었던 여파이거나, 이곳이 마경이기 때문일 터였다.
물론 이안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왼팔을 거의 뒤덮은 형상인 전투 문신과, 손등의 육각형 진언 회로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다행히 회로에는 마력이 중첩되고 있었다. 아직 채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마력도 그렇고. 역시, 잠깐 기절해 있었던 거네.’
동시에 이안은, 흑요정 장로의 흑관 역시 여전히 머리에 씌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격렬한 전투 중에도 부서지거나 벗겨지지 않은 것이다.
물론, 멀쩡한 건 거기까지였다.
군단장의 대검이나 진작 부서진 장갑과 견갑 따위의 방어구들. 심지어 늘 목에 걸고 다니던 델라 루의 은총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발 쇠뇌나 보옥처럼, 언제 사라진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제와서 제작 스킬을 찍을 수도 없고….’
약초학 같은 걸 찍을 포인트로 차라리 그걸 올렸어야 했는데.
내심 혀를 차며 허리 뒤편까지 재정비를 끝낸 이안이 손을 뗐다.
볼품없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각반은 다시 그의 하반신에 딱 맞는 형태로 되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옆에 놓인 갑옷을 앞으로 끌고올 찰나.
“여긴 정말… 벽 너머였군요…. 대륙 최대의 마경….”
비로소 루시아의 목소리가 번졌다.
“그 불가해의 영역에… 들어온 거예요….”
주위를 한차례 돌아본 녀석이 탄식하듯 말을 맺었다.
맥이 탁 풀린 듯한 얼굴. 갑옷의 판금 안감을 손바닥으로 밀어 넣으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내 계획에는 없던 일이지. 너까지 말려들게 하는 건, 더더욱.”
“…그 괴물.”
불현듯 내뱉은 루시아가, 고개만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 고대신이 만들어낸 화신체는, 죽었나요?”
이 와중에도 그걸 제일 먼저 떠올리다니.
내심 웃음 지은 이안이 대답했다.
“그래. 내 손으로 확실하게 끝장냈다.”
덕분에 레벨도 하나 더 올랐고.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루시아를 일별한 그가 덧붙였다.
“사제단의 복수는 이뤄졌어. 전선도, 지켜졌고.”
“그랬군요…. 다행… 감사해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루시아의 눈이 다시 멍하니 풀어졌다. 또다시 온갖 상념들의 해일에 휩쓸린 모양이었다. 이안은 녀석을 탓하지 않았다.
또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경험을 쌓은 데다 신의 선택을 받은 사도라 해도, 루시아는 아직 청소년이었다. 이 세계의 기준으로도 아직 채 성년이 되지 않은.
게다가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 그가 했던 행동들에 비하면, 오히려 아주 어른스럽다고도 할 수 있었다.
-너희가 허둥대는 걸 조금 더 구경하고 싶지만….
이안의 뇌리로 속삭임 같은 사념이 파고든 건 그때였다.
-아쉽게도 여기까지 해야겠군.
다소 거만한 것 같기도, 여유로운 것 같기도 한 익숙한 말투.
멈칫한 이안의 미간에 절로 깊은 골이 파이는 가운데,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속삭임이 이어졌다.
-싸울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 친구. 잡아먹히고 싶지 않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