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77
377화
“아, 예…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땅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제야 퍼뜩 고개를 끄덕인 미구엘이,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체르윈이 깍지낀 양손을 책상 위에 얹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내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북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침공을 온전히 막아낸 건 카링기온 전선뿐이었다. 헬리네제 요새는 반파되었고, 크사니드는 함락됐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전선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만큼의 마물들이 밀려 들어왔다.
물론 그것들 모두가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다.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든 마물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 아래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살아남아 밤마다 야전을 활보했고, 또 다른 일부는 붉은 벼락이 만들어낸 마경 너머로 숨어들었다.
모든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시간과 인력이 필요했다. 붉은 군단이 돌아간 건,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큰 문제였다.
멈칫한 미구엘이,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마 했던 일이 정말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앞다퉈 검은 벽으로 돌진할 정도였죠. 넘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선, 벽을 부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떠올리기 어려운 기억들을 억지로 끄집어 내듯, 미간에도 옅은 골이 패였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사실은,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저 역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으니까요.”
“벽을 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나선, 전선을 떠나지 않으려 했을 텐데요.”
체르윈이 담담하게 덧붙인 말에, 미구엘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빌어먹을 벽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몇 년이라도 전선에 주둔하며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저도 그들의 뜻에 동의했습니다.”
오로지 루시아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리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체르윈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대공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거군요.”
“주둔군이 상황을 보고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곧바로 명령서가 도착하더군요. 군단을 다른 전선으로 이동시키겠다고 말입니다. 그 명령도 문제였지만… 덧붙인 말이 더 큰 반감을 샀습니다.”
체르윈의 시선에, 낮게 혀를 찬 미구엘이 미간을 꿈틀대고는 내뱉었다.
“형씨… 아니, 대전사께서 전사하신 것에 깊은 위로와 유감을 표한다고 말입니다.”
“……!”
“장례와 추모는 북부의 혼란을 모두 잠재운 뒤에 성대하게 치를 것이며, 교단의 성인으로 추대할 것이라고도 써놨더군요.”
“이런….”
눈을 질끈 감은 체르윈이 탄식했다.
“대공께서 악수를 두셨군요. 마음은 알지만… 욕심이 과했어요.”
울라프 대공의 결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엔 검은 벽 너머로 실종된 건 죽은 것과 다름없으리라. 용살자의 군단을 자연스럽게 손에 넣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너무 섣부른 결론이었다.
눈앞의 미구엘 조차, 그가 저 너머에 살아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터였다. 차라리 야인 군단에게 카링기온의 수복과 감시를 일임하고, 남은 주둔군을 전부 다른 전선으로 옮겼으리라. 검은 벽이 안정을 되찾기까진 아직 시간이 몇 년이나 남아 있지 않던가.
“군단은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더 극단적인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대전사를 모욕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은 듯 헛기침을 한 미구엘이, 강철 의수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전선에 더는 남아 있을 수는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설원 지대로 돌아가라 설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명령에 불복하는 합당한 이유는, 설원 지대의 마경과 마물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전선의 지휘관인 루카스 경이 도움을 주었지요.”
자세한 언급은 생략했지만,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 터였다.
체르윈은 더 자세한 내막을 묻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설원 지대로 흘러 들어간 마물들도 적지 않은 숫자라고 들었으니. 그래서… 모두가 장벽을 넘어간 거군요.”
“예. 정착민들까지 모두 데리고 이동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장벽을 넘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 이렇게 돌아온 것이고요.”
“그래요… 적어도 북쪽은 안정을 되찾게 되겠군요.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낼 테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미구엘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때가 되면, 죽음을 제외한 그 무엇도 그들이 벽을 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걱정스러운 말투와 달리, 그의 눈은 결연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군단의 뜻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그들과 함께 벽을 넘기로 결심한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눈치챘으면서도, 체르윈은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대교회로 보낼 보고서는 내가 직접 작성해야겠군요. 대공께 보낼 전서도 말이에요.”
“대공 전하께도요…?”
미구엘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체르윈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유감을 표해야죠. 성자 대행이 죽었다 여긴다는 것은, 교단의 새로운 불씨 역시 그리되었다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
“둘 다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 설원 지대의 통치권과 붉은 군단의 지휘권 역시, 여전히 변경백에게 있겠고요.”
미구엘이 눈을 치켜뜬 채로 순간 굳어졌다. 화로의 성녀가 직접 용살자의 군단을 두둔해 주려는 것임을 곧바로 눈치챈 것이다.
동시에 그건, 화로의 사원 역시 그들과 같은 뜻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미구엘이 뭔가 말하기도 전에, 옆에 놓인 양피지를 집어 들며 체르윈이 덧붙였다.
“혹, 첨언할 말이 남았나요?”
고개를 저으려다 멈칫한 미구엘이, 눈을 몇 차례 깜빡이고는 내뱉었다.
“첨언은 아닙니다만.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들어 보죠.”
“제가 타고 온 말은, 앞으로 제가 직접 보살피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되겠습니까…?”
양피지를 자신의 앞에 내려놓은 체르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만. 의외군요.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그게… 그 녀석은, 북부의 초인이 타던 말입니다.”
“……!?”
멈칫한 체르윈이, 고개를 들어 미구엘을 바라보았다. 미구엘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타오르는 여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명마이기도 합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군요. 그렇게 하세요. 가능하다면 교배도 시키도록 하세요. 신의 은총을 받았다면, 그 자손들도 명마일 테니.”
이윽고 시선을 돌리며 대답한 체르윈이, 옆의 깃털 펜으로 손을 가져가며 덧붙였다.
“밤이 늦었군요. 이만 물러나, 며칠간은 푹 쉬도록 하세요. 사원의 일손이 부족하니, 당분간은 떠나는 일 없이 밀린 일들을 처리해 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철 의수를 자신의 가슴 앞에 얹은 미구엘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탁,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
양피지를 내려다보고 있던 체르윈이 다시 깃털 펜을 내려놓은 건 거의 동시였다.
눈을 감은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아귀 사이로, 꾹꾹 눌러 왔던 깊은 한숨이 번져 나왔다. 손끝을 가늘게 떨면서, 그녀가 한숨 쉬듯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타오르는 여신이여… 부디 불씨를 지켜 주소서… 어둠과 추위 속에서도 꺼지지 않도록… 부디….”
참고 있던 감정을 고스란이 드러낸 건, 어둑어둑한 복도로 나선 미구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사제 대부분이 여전히 북부 곳곳에 파견된 상태이지 않던가.
지금 사원은 거의 텅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기랄….”
걸음을 옮기며, 그는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루시아가 괴물의 손아귀에 붙잡혀 날아오르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놈을 붙잡기 위해 솟구치던, 혼돈과 융합된 이안도. 검은 벽 쪽으로 향하며 눈부시게 빛나던 자줏빛 궤적 역시.
북부의 초인이 혼돈을 품고 있다는 건, 그와 군단병들 외에는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안과 루시아가 살아있으리라 믿는 가장 큰 근거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야인 군단은 대전사가 혼돈마저 다스린 거라며 큰소리쳤지만, 미구엘의 간곡한 부탁으로 결국 입을 다물기로 했다.
물론 소문이 돈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애초에 소문이 돌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형씨가 원하지 않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때가 되면… 나도 따라갈 거요.’
생각하며, 미구엘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작은 책상과 침대만 덩그러니 놓인 작은 방이었다. 벽면 위쪽의 작은 창문이 전부여서, 장내는 아주 어두웠다.
몹시 피곤했지만, 그는 곧바로 침대에 눕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아직 소식을 전해야 할 이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머리의 여기사와 북부의 초인에게 충성을 맹세한 성기사.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려야 했다.
선뜻 초에 불을 붙이지 못하는 건,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그의 편지를 받게 될 이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편지를 전할 방법도 문제였다.
필립은 제도에 있다지만, 메브는 변방 어딘가로 떠나지 않았던가.
‘소문을 듣고 찾아오길 기다리면 너무 오래 걸릴 텐데…. 제기랄, 내가 직접 찾아 다녀야 하나…?’
정말이지 내키지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해야 할 터였다.
그래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죄책감의 또 다른 이름일 터였다.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앙다문 그가 손을 뻗은 그때였다.
솨아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순간 방안이 환하게 빛났다. 천둥은 아니었다. 미구엘의 바로 뒤에서 번진 빛이었다. 그가 손을 뻗던 그대로 굳어진 찰나.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 미안하구나.”
뒤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아주 곱지만, 동시에 묘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
“이, 이런 시부럴…!”
비로소 튕겨 오르듯 일어선 미구엘이, 본능적으로 벽면에 등을 붙이며 몸을 돌렸다.
그의 침대에, 아주 얇고 흰 두건 망토를 눌러 쓴 누군가가 다소곳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었다.
소매 밖으로 나온 손은 망토 만큼이나 희고 길었다. 두건 아래, 코까지 드러난 얼굴 역시 티끌 하나 없이 아름다웠다.
얇고 긴 입술이 달싹였다.
“네게 듣고 싶은 것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다. 미구엘.”
“누구, 누구십니까? 대체-”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하는 물음을 채 끝내기도 전에, 벽면 위쪽의 창문이 한차례 번쩍였다.
이번에는 천둥이었다. 장내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면서, 두건 아래로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미구엘은 그 찰나의 순간 저 아래에서 번쩍인 샛노란 안광을 놓치지 않았다.
“두려워 말렴. 나는 네 친구의 전우란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당대의 많은 이들은, 백금이라 부르기도 하지.”
미구엘을 석상처럼 굳어지게 하기에는 충분한 한마디였다.
“…루 엔테르 맙소사.”
간신히 탄식한 것도 잠시. 그가 허물어지듯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위, 위대한 백금-”
“거추장스러운 인사 치례는 집어치우자꾸나. 친구의 친구는. 친구인 법이잖니?”
백금룡이 나지막이 말을 잘랐다.
미구엘이 입술만 뻐금대는 사이,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네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자 찾아온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믿으마. 그러니 일어나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으니. 긴 대화를 나누기에, 그 자세는 불편하지 않겠니?”
“…어, 어디서부터.”
그제야 엉거주춤 내뱉으며, 미구엘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부터 듣기를 원하십니….”
백금룡의 얼굴을 올려다본 그가 다시 한번 숨을 멈췄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두건 아래로 가려진 백금룡의 샛노란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혼이 얼어붙는 것처럼 차가웠다.
미구엘을 빤히 내려다보며,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아이와 관련된 부분이라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