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83
383화
루시아는 산채 밖의 숲에 있었다.
이안이 디아나를 쫓아 달려 올라간 오르막 능선 한구석. 나무 둥치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였다.
기척을 잘 감추고 있었지만, 이안은 어렵지 않게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길이라도 잃은 줄 알았다고. 친구.
요그의 나른한 속삭임이 다시 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의식을 집중한 것만으로도 그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그가 새긴 피의 단말 덕분이었다. 언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긴 했지만, 어쨌건 지금까지는 아주 유용한 흑마법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루시.”
“별로 늦지 않으셨어요. 우리도 조금 전에 온 걸요. 그보다….”
특유의 담담한 얼굴로 대답한 루시아가 덧붙였다.
“어떻게 되셨어요? 정말 사람이었나요?”
“직접 확인해.”
비스듬하게 옆으로 물러난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루시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뒤편으로 향했다. 숲의 어둠 너머,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오는 호리호리한 실루엣이 선명해졌다.
-호오… 요정이군.
루시아의 눈이 이내 설핏 커졌다.
정말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요정의 분위기 자체에도 시선이 사로잡힌 것 같았다.
턱선을 드러낸 짧은 백금발과 흰 피부. 그리고 그와 대조를 이루며 전신을 날렵하게 감싼 검회색 가죽갑옷.
요정을 거의 볼 일 없던 루시아에게는 특히 인상적일 터였다. 소문을 알면서도, 많은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요정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
물론 디아나 역시, 루시아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다른 점이라면, 그녀의 눈은 커지는 게 아니라 가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를 일별한 이안이 덧붙였다.
“우리를 생존자들의 거점까지 인도해줄 길잡이다.”
“거점…!”
루시아의 눈이 더 커졌다. 녀석의 앞에 멈춰서는 디아나의 표정은 더 떨떠름해졌다. 또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리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디아나 에레노스. 깊은 숲의 파수꾼이며-”
“루시페르 애쉬 리우렐입니다. 루 엔테르의 사도이자-”
어쨌거나 예의 바른, 하지만 이안이 보기에는 늘 연극처럼 보이는 통성명이 끝난 뒤. 디아나가 곧바로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는데.”
“이제 알게 됐네.”
“아니… 하….”
짧게 탄식한 디아나가, 지금 말장난이나 할 때냐는 듯 이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어리다는 것말고도, 말하지 않은 특이 사항이 더 남아 있나?”
“궁금하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라. 애 취급하지 말고. 내 동료라고 했을 텐데.”
“…….”
미간을 좁힌 디아나가 시선을 돌렸다. 루시아의 에메랄드빛 눈과 마주친 그녀가 잠시 멈칫하고는,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하지 않은 게, 있나?”
왜 저렇게 불편해하지. 내심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자신을 돌아보는 루시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알려줘도 되냐는 눈빛. 이안은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로 어깨만 으쓱였다.
어차피 디아나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본인이 내뱉은 말을 지킬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건 그저 요식적인 절차였다. 혹은 디아나의 마지막 자존심이거나.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가 손바닥을 펼쳤다. 뒤이어 화륵, 작은 불꽃이 손바닥 한복판에서 피어올랐다. 디아나의 미간이 일그러진 건 거의 동시였다.
“…마법? 루 엔테르의 사도라고 하지 않았었나?”
루시아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다만 저는, 그분의 은총도 타고났을 뿐이죠.”
“…혈통의 힘이란 거군. 어떻게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계시를 받은 건가 했더니… 시발….”
탄식한 디아나가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안은 요정들의 민간요법도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윽고 디아나가 내뱉었다.
“마법사들이 결국 전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어요.”
대답한 루시아가 주먹을 쥐어 불꽃을 흩어 버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마법은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단순한 문제가 맞을걸.”
이안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신의 손길은 닿지 않지만, 루시아의 몸은 신의 축복을 받은 그대로니까.”
미간을 찌푸린 디아나가, 직접 물으래 놓고 왜 끼어드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덧붙였다.
“그래서 사악한 불순물을 거부하고 도로 뱉어내지. 다소 고통받긴 하지만, 어쨌든. 그러니까, 마법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다.”
-거짓말이 아주 자연스럽군. 친구.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
요그가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피로가 몰려오는 목소리인 주제에, 조용히 상황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답 대신 짧게 콧방귀를 뀐 이안이 손을 까딱였다.
루시아의 어깨에 축 늘어져 있던 요그가 검은 연기가 되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손바닥에서 다시 본모습을 갖춘 검은 뱀이, 그대로 손가락으로 기어 올라가 반지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던 디아나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건 또 뭐야…?”
“내 사역마.”
“사역…. …온갖 괴상한 마도구에 마검으로도 모자라서, 주문 쟁이들이나 키우는 사역마까지 거느리고 있다고…?”
“어쩌다 보니.”
디아나의 표정은 이제 황망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안이 타락하지 않았다던 자신의 결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 녀석은 고대 늪지 요정의 원념이 뭉쳐서 만들어졌지. 이를테면, 네 조상의 한이 맺힌 유물이란 거야.”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아니, 하… 시발….”
장탄식과 함께 디아나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루시아가 그런 그녀를 조금은 딱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 이 녀석인지도 몰랐다.
슬며시 이안을 일별한 루시아가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아직 안 끝났어요. 디아나.”
“아직도…?”
“네. 제일 중요한-”
“아니. 아니야. 그만.”
눈을 치켜떴던 디아나가 손사래까지 치며 말을 잘랐다. 루시아가 입을 다물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쥔 그녀가 이윽고 읊조렸다.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아.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군. 제기랄… 그냥 그 빌어먹을 망자 새끼들을 끝까지 따라가는 거였는데…. 된통 걸렸군….”
이안을 돌아본 루시아가 그렇다면야, 하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이 피식 웃는 사이, 마저 얼굴을 쓸어내린 디아나가 기운이 쭉 빠진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너희가 타락자나 마족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건 알아. 하지만 너희들의 비밀은, 가능하면 계속 비밀로 남겨두면 좋겠군. 적어도, 내 책임 아래 있는 동안만이라도.”
“노력은 해 보지. 장담은 못 하지만.”
이안의 대답에도, 디아나는 더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러시겠지, 하고 짧게 내뱉고는 입술만 달싹여 욕설을 중얼댔다. 그녀를 잠시 바라본 이안이 덧붙였다.
“그럼 이제, 확인은 다 끝난 건가?”
“…그래. 다 끝났다.”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거점 도시로. 길잡이를 따라 무사히 거점까지 도착하면 완료되는 퀘스트였다. 보상도 경험치 조금이 전부였다.
이제야 퀘스트가 뜬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제야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인 거군.’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디아나가 아까는 여차하면 튈 생각이었다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제는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흐름이었다. 디아나가 길잡이는 아니지만, 상태창은 너그럽게 용인해준 모양이었다.
퀘스트 창을 닫으며, 이안이 덧붙였다.
“그럼 바로 움직이지. 남은 이야기는, 가면서 나누도록 하고.”
“…아니.”
디아나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돌아보자, 그녀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돌아온 김에, 그건 마무리 짓고 떠나야 할 것 같은데.”
“해야 할 일…?”
이안이 되묻자, 디아나가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저 안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 거냐?”
“글쎄…. 빈집털이?”
“…그래. 관심이 전혀 없었군.”
눈을 가늘게 뜬 디아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뱉었다.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저는 궁금했어요.”
루시아가 불쑥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디아나가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녀석이 말을 이었다.
“여기서 혼자 뭘 하고 계셨던 건지. 어떻게 우리보다 빨리 들어가 계셨던 건지도요. 우리도, 그렇게 늦게 움직인 건 아니었거든요.”
“…너도 이안 호프 못지않게 특이하구나. 루시페르. 거점에 대해선 별 말도 없더니. 이런 걸 궁금해하더니.”
“그건 물어도 알려 주실 것 같지 않았거든요. 이건, 아니고요.”
“…….”
눈을 깜빡인 디아나가 다소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이 녀석, 그냥 청소년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어색한 건가. 내심 생각하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서, 창고나 털러 들어간 게 아니었다고?”
“…그럴 생각이 아예 없진 않았지. 마물들은 어디서 주워온 건지 모를 쇠붙이들을 잘도 가지고 다니니까. 하지만 그건 그냥, 부가적인 목적일 뿐이야.”
못 이긴 척 운을 뗀 디아나가 시선을 돌렸다. 내리막 너머. 어스름한 어둠에 잠긴 산채의 윤곽을 눈에 담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원래 여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다. 경계가 그리 멀지 않았고, 전략적인 요충지도 아니지. 주인 없는 땅인 셈이야. 하지만 얼마 전, 권역의 확장이 일어났지. 경계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고.”
“확장… 그러네요.”
루시아가 읊조렸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관점의 차이였다. 밖에서는 침식이지만, 이 안에서는 그만큼 공간이 더 넓어지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뛰어난 수색병들은 평소보다 정찰을 멀리, 크게 돌았다. 물론, 나도. 그리고 저것들을 찾아낸 거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못 보던 놈들이었지.”
이어진 디아나의 말에, 루시아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저 큰 산채가, 고작 열흘 남짓 만에 만들어진 거라고요…?”
“열흘?”
디아나가 되묻자, 루시아가 재빨리 덧붙였다.
“한번 잘 때마다 하루씩으로 계산했어요. 오늘이, 우리가 벽을 넘은 지 열한 번째 되는 날이에요.”
“그걸 세고 있다니…. 무의미한 짓을 하는군.”
디아나가 낮게 웃음 지었다. 그저 비웃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뜻이 담긴 듯한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 시선을 돌린 그녀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덧붙였다.
“어쨌든 일단 보고부터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던 길에, 유랑단을 마주친 거지.”
“유랑단…?”
루시아가 눈을 끔뻑였다. 이번에 대답한 건 이안이었다.
“아까 그 승전 행렬. 그래서, 그것들을 따라 다시 돌아온 거군.”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돌아온 거였거든. 사실, 이미 다 뒈졌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세력이 더 커졌더군….”
짧게 혀를 찬 디아나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너도 알다시피, 저길 신나게 쓸어버리고 영혼들을 죄다 긁어 갔다. 놈들을 계속 추적할까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고.”
그녀가 산채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대신 확인해 보기로 했지. 저것들이 마족의 하수인인지. 아니면 우연히 굴러온 바퀴벌레들인지. 하지만 알다시피, 다 끝내지 못했지. 마검을 든 미친놈을 마주쳤거든.”
이안이 풀썩 웃음을 흘렸다. 보자마자 냅다 튀던 그녀의 뒷모습이 뇌리를 스쳐서였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으리라.
“이 근방에… 마족의 권역이 존재하는 건가요?”
루시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은 건 그때였다. 디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알기로, 근방이라고 할 만한 거리에는 없어. 하지만 언제 어떤 놈이 나타나 자리를 잡아도 이상하지 않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새로운 마족이 탄생하고, 또 어딘가에선 죽어가고 있을 테니까.”
“맙소사….”
“어쨌든, 뒤져 봐야 확실해 진단 거군.”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한 이안이, 디아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정도는 기꺼이 협조해 주지. 얼른 끝내자.”
“그 전에 알아두셔야 할 게 있어요.”
디아나가 입술을 달싹이려는 찰나, 루시아가 덧붙였다. 이안의 시선이 녀석 쪽으로 돌아갔다.
“뭔데.”
“지금 저 아래에는 마수들이 있거든요.”
“…괜히 밖에서 기다린 게 아니었네.”
이안이 읊조리자,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리가 올라오더라고요. 바깥의 마물 시체에 눈이 돌아가서, 안까지 들어오진 않았지만요. 그래서 일단 조용히 빠져나온 거예요.”
“…늑대들이겠군. 산에서 가장 빨리 냄새를 맡는 건 그놈들이지.”
싸늘하게 읊조린 디아나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내 검과 가면을 돌려줘. 싸울 때도, 수색할 때도 필요하니까. 어딘가에 저주라도 서려 있다면, 가면 없이는 막아낼 수 없어.”
“싫은데.”
“…응?”
디아나가 한 박자 늦게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마검을 아공간에서 꺼내 든 이안이, 루시아에게 눈짓을 보내며 덧붙였다.
“말했잖아. 네가 싸울 일은 없을 거라고. 저주가 겁나면, 수색도 뒤로 빠져 있어라.”
어딜 은근슬쩍 또 탈주각을 재려고.
입을 설핏 벌리는 디아나를 일별한 이안이, 루시아와 함께 산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가서 숨겨놨다던 배낭이나 찾아서 들고 와. 우리가 깔끔하게 정리해둘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