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84
384화
미리 표시해 둔 나무를 소리 없이 타고 올라간 디아나는, 이내 가죽 가방을 등에 멘 채 아래로 내려왔다. 자세를 낮춘 그녀가 천천히 비탈길을 걸어 내려갔다.
기척은 물론 발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긴장이 맺혀 있었다.
‘빌어먹을….’
그녀는 지금 무장 해제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안 호프. 그 종잡을 수 없는 미친 놈이 어찌나 살뜰하게 털어갔는지,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정말 그녀의 모든 무기를 털어간 것은 아니었다. 은밀한 곳에 숨겨둔 비수 한 자루 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디아나에게 조금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늑대들은 네다섯 마리 이상의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들이었으니까. 만약 한 마리라도 그녀를 발견해 달려온다면, 고작 비수 한 자루로는 목숨 건 사투를 치러야 할 터였다.
그리고 나면 그 망할 인간에게 최후의 한 자루조차 빼앗기게 되리란 사실 역시, 명확했다.
“……?”
디아나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진 건, 반쯤 허물어진 목책이 가까워졌을 때쯤이었다.
늑대 울음소리 정도는 진작 들렸어야 하건만. 주위가 여전히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안개가 소리를 잡아먹는 데다 전투가 산채 반대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해도 의아한 일이었다.
‘설마….’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산채 안으로 진입했다.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 찢기고 토막 난 회백색 시체들이 움막 사이 사이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디아나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가면도 쓰지 않고 이 사이를 누비게 되다니.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곧, 울음소리나 고함 대신 찰박대는 흐릿한 발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반사적으로 움막 옆에 몸을 숨긴 디아나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설마 했는데.’
이내 그녀의 눈매가 꿈틀댔다.
시체가 즐비하게 널브러진 산채 입구에서, 두 인간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카맣고 기다란 검을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의 기사와 묵직한 철퇴를 든 붉은 머리 전투 사제.
둘 다 몸 곳곳 검은 체액이 흩뿌린 것처럼 묻어 있었다. 숨결은 다소 거칠었지만 걸음은 평온했다.
“…정리는, 다 끝났나?”
내심 놀라면서도 태연한 척 밖으로 나선 디아나가, 그들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마수들이 오더라도 바로 안으로 들어오진 않을 거예요. 밖에 먹을 게 잔뜩 있으니까.”
루시아가 체액을 털 듯 철퇴를 휘두르며 덧붙였다. 그녀의 희고 작은 얼굴 역시, 이안 만큼이나 태연했다.
“잘 됐군….”
대답하며,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빠르고 조용하게 늑대들을 처리하다니. 무기를 돌려받을 명분이 없었다.
인간답지 않은 힘과 움직임을 보여주던 이안뿐만 아니라 저 귀여운 계집애도 전투에 아주 능숙한 게 분명했다.
루시아가 전신에 걸친 장비들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곳곳이 찌그러지고 더러워지긴 했지만, 중무장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물론, 그보다 더 시선을 잡아끄는 건 이안이 쥔 마검이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거무스름한 칼날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마검이 휙 허공 너머로 사라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튼튼해 보이는데. 마수 가죽으로 만든 건가?”
멈춰선 이안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그녀가 어깨에 두른 가죽 가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안에 무기가 들어있는지 확인하려는 게 분명했다.
떨떠름하게 가방을 넘기면서, 디아나가 웅얼댔다.
“그래… 뿔소 가죽으로 만들었지.”
“백팩이라… 실용적이네.”
신경도 쓰지 않고 읊조리며, 이안이 가방을 열었다. 그는 장비를 정비할 때 쓰는 잡다한 물건들과 가죽 수통을 확인하고는, 마지막으로 입구를 꽉 막아둔 가죽 주머니를 집어 들어 입구를 열었다.
능숙한 도적 같은 손놀림이었다.
“육포… 이 경단 같은 건 뭐지?”
“…그건, 감자와 약초를 으깨서 뭉친 거야.”
“여기서, 농사를 짓는다고?”
이안이 놀란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미간이 조금 더 좁아졌다.
“어떻게? 여기선 작물을 기를 수가….”
말을 멈춘 그가, 이내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변이된 걸 그대로 키우는 거군. 아니면 뭐, 먹을 수 있는 걸 찾아서 키우고 있거나.”
“그래. 맞아. 알려주자면, 여기선 마수나 변이 같은 말은 쓰지 않아. 그건 너무 당연한 거니까.”
눈치 빠른 인간 같으니.
속으로 읊조리며, 디아나는 경단의 냄새를 맡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먹어 보려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에게 한 알을 받아든 루시아도 냄새를 맡아보고는 입에 쏙 밀어 넣었다.
저런 모습 역시, 디아나가 들었던 외부인들에 대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보통 그들은 처음엔, 굶어 죽기 직전까진 이곳의 음식에 손도 대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떡밥을 씹어 먹는 느낌이군.”
식량 주머니를 다시 가방에 넣은 이안이, 입을 우물대며 내뱉었다.
디아나가 눈을 깜빡였다.
“떡밥?”
“낚시할 때 쓰는… 아니. 알 것 없어.”
이안이 다시 가방을 앞으로 내밀며 덧붙였다.
“산채나 얼른 뒤져 보자고.”
“…그래.”
디아나가 가방을 받아들 찰나,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사실, 혼자 있을 때 이 안도 조금 돌아봤거든요.”
디아나와 이안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루시아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뭔가 있을 만한 건 저 두 곳밖에 없었어요. 둘 다 냄새가 너무 심해서, 자세히 살펴 보진 않았지만요.”
루시아가 디아나의 뒤쪽에 이어, 그리 멀지 않은 옆을 가리켰다.
처음 가리킨 건 그녀가 이미 살펴본 족장의 집. 그리고 또 하나는 그나마 족장의 거처와 비슷한 크기의 오두막이었다.
“…혼자 시간을 알차게 보냈구나.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이안이 핀잔하듯 말했지만, 루시아는 태연하게 어깨만 으쓱였다.
“달리 할 것도 없었으니까요.”
“…여기서 기다려. 저주 같은 거라도 깃들어 있을지 모르니까. 넌 따라오고.”
입맛을 다신 이안이 디아나에게 턱짓하고는 몸을 돌렸다. 동시에 이안의 손에서 연기가 번지더니, 루시아의 어깨에 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안 돼요. 요그. 더 돌아다니면, 정말 혼날 거예요.”
루시아가 혼잣말을 중얼대기 시작한 가운데, 이안의 뒤를 따르며 디아나가 미간을 좁혔다.
“난 가면 없이는 아무것도 안 만질 거야. 이안 호프.”
“알았으니까, 구경이나 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뱉으며, 이안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삐딱하게 뚫린 문으로 다가가던 디아나가 인상을 구겼다.
밖에서부터 이미 냄새가 나고 있긴 했지만, 시체 썩는 냄새가 코가 떨어질 것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시발….”
돼지우리를 방불케 하는 장내에는 온갖 두개골들이 주렁주렁 장식되어 있었다.
나무를 듬성듬성 이어 붙인 벽면 곳곳에도 체액으로 그린 듯한 괴상한 문양들이 가득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주술사라도 살았나 본데. 시체는 안 보이지만.”
장내를 돌아보며 이안이 말했다. 덤덤한 말투와 달리, 지금은 그도 인상을 설핏 구기고 있었다.
“족장의 시체도 없더군. 아마, 꼭두각시로 만들어서 가지고 나갔을 거다. 이 산채에서 그나마 쓸 만한 것들이었을 테니까.”
디아나가 손가락으로 코를 막은 채 대답했다.
그사이 이안은, 한구석의 뼈 무더기 사이를 뒤적이고 있었다.
지금은 다 부숴버린 것처럼 엉망진창이었지만, 아마도 본래는 제단으로 사용했었을 터였다.
이윽고 그 사이에서 뭔가를 집어 든 그가 몸을 돌렸다.
“이런 거면 되나?”
그가 손에 든 걸 휙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디아나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거뭇한 나무 조각상이었다. 사선으로 조각나 있었는데, 한쪽 만으로도 두 장의 날개를 드리운 새 같은 형상이라는 건 충분히 구별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걸 바로 찾았지…?”
“감으로.”
무심하게 대답하며 뼈 무더기 사이를 뒤적이던 이안이, 이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손에 든 나머지 반쪽을 앞으로 내민 채였다.
“다른 걸 더 찾아볼까?”
“…아니. 이거면 충분해.”
디아나가 두 조각을 하나로 합쳤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본래 모습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날개가 넷 달린 무언가를 극도로 단순하게 만든 듯한 형태였다.
“이것들이 어떤 놈의 하수인인지 알 것 같으니까.”
한쪽 어깨에 멘 가방을 연 그녀가, 조각상을 그 안에 넣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너무 간단하군.”
디아나도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코가 썩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악취 섞인 바깥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빨리 나오셨네요. 뭔가 있었나요?”
기다리고 있던 루시아가 물었다.
녀석을 향해 다가가면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웬 기분 나쁜 나무 조각이 있던데.”
“나무 조각이요?”
루시아의 시선이 디아나 쪽으로 돌아왔다. 그 아름다운 녹색 눈과 마주치자 잠시 멈칫한 그녀가, 이내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필요한 건 찾았어. 이제 떠나면 돼.”
“여기서 얼마나 이동해야 하지?”
이안이 곧바로 덧붙였다. 가방을 제대로 양쪽 어깨에 멘 디아나가, 등에 딱 맞게 끈을 조이며 대답했다.
“균열의 가장자리를 두 번 걷는다면, 중간에 한 번만 자도 될 거야.”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균열…? 그게 뭐죠?”
“너희도 봤을 텐데.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고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공간들을.”
“아하… 그걸 균열이라고 부르는군요. 우린, 회색 지대라고 했었어요.”
“왜 균열이라고 부르지?”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정말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하는군. 디아나는 내심 혀를 차면서도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이 뒤틀리고 엉킨 채로 이어 붙은 흔적이니까. 한때 그걸 연구하던 주문쟁이들이 있었다더군. 그자들은 그게 이쪽과 저쪽의 틈새로 이어진다고 여겼어.”
“세상의 틈새….”
루시아가 읊조렸다. 그녀를 일별한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그걸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지. 그리고 결국, 몇몇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걸로 끝이었겠지. 뻔한 얘기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디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까지 그 안으로 들어간 게 밖으로 나온 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하지만 어쨌든, 광기에 잡아먹힌 것들이 그 안으로 홀린 듯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야. 경계의 그림자로 향하는 것들처럼.”
“…어쩌면, 그 마법사들의 이론이 옳을지도 몰라요.”
루시아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디아나가 돌아보는 가운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우린 벽을 넘어온 마물들과 싸웠어요. 엄청나게 많았죠. 그중엔 마족도 있었고요. 아마, 다른 전선의 상황도 다르진 않았을 거예요.”
루시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저는, 벽 너머에는 마물들이 끝도 없이 증식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게 아니었다는 건… 여기로 오고서야 알게 됐지만요.”
“그래. 그것들은 이쪽과 저쪽의 틈에 있었던 거다. 벽이 통로 역할을 한 거고.”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하는 가운데,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설핏 입을 벌렸다.
이건 그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안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이기까지 했다.
그를 돌아본 디아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럼… 정말 균열로 들어가면… 언젠가는 밖으로…?”
“들어갈 때는 제정신이어도, 나갈 때까지 그렇지는 않을 거야.”
코웃음을 흘리며 말을 자른 이안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내가 본 것들은 죄다 정신이 나가 있었으니까. 틈새는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아니야.”
“…….”
세상의 틈새를 직접 보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정처 없이 안개 속을 떠도는 자신의 모습이 뇌리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언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 채, 서서히 미쳐 가면서.
“어쨌든 균열의 가장자리를 걷는다는 건, 그 균열로 들어간다는 거겠군.”
이안이 덧붙인 건 그때였다.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디아나가 대답했다.
“아예 깊이 들어가는 건 아니야. 그 영역에 닿은 외곽,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거지. 그럼 짧은 시간 만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어.”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주 위험하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물론이지. 가장자리를 걷다가 사라진 이들이 적지 않아.”
그의 반응에 묘한 즐거움을 느끼며, 디아나가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게다가 가끔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나가게 되기도 하고.”
“…가장자리를 걷지 않으면 얼마나 걸리지?”
“야영을 적어도 열 번은 해야 할 거야.”
“…….”
이안이 혀를 찼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조금 더 말아 올리면서, 디아나가 덧붙였다.
“균열을 걷는 건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부분 중 하나지. 나는 절대 실수하지 않아. 내 뒤만 잘 따라온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해 보는 게 어때요, 이안 님?”
루시아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언젠가 우리도 균열의 가장자리를 걸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길잡이가 있을 때 미리 경험해 두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예쁘장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디아나가 제법 귀엽다고 생각할 찰나,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입을 열었다.
“두 번 걷는다는 건, 서로 다른 균열을 이용한다는 거냐?”
“그래. 야영은 그 사이에 할 거다. 나 같은 숙련자라면 모를까, 너희는 연달아 걷지 못할 거야.”
“…첫 균열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반나절쯤.”
잠시 턱을 어루만진 이안이, 이윽고 입맛을 다시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균열로 안내해. 길잡이.”
고개를 끄덕인 디아나가 몸을 돌렸다. 걸음을 내디디려다 멈칫한 그녀가, 이내 덧붙였다.
“가면을 쓰고 있다면 조금 더 안전해질 텐데.”
이안이 코웃음을 흘렸다.
“꿈도 꾸지 마라.”
“이건 거짓말이-”
“아닌 거 알고 한 말이야.”
“…….”
망할 인간 같으니.
체념의 한숨을 내쉰 디아나가, 산채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