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85
385화
키- 아아아-
등 뒤에서 때때로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산채에서 축제가 벌어지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 종종 느껴지는 기척들도 죄다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
디아나를 선두로 한 일행은 대화 한마디 없이 걸음을 옮겼다.
디아나는 거침없이, 그러나 숲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않고 나아갔다. 흐릿한 안개 너머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 같은 발걸음이었다.
이안은 그녀가 유랑단과 거의 똑같은 경로로 산을 내려 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어쩌면 그 망자들도 균열로 향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디아나의 인도 덕에, 일행은 단 한 순간도 멈춰 서지 않았다. 식사조차 걸으면서 해결했다. 디아나의 육포를 나눠 먹었는데, 너무 딱딱해서 입에 머금고 침으로 녹여가며 먹여야 했다.
‘무슨 개껌도 아니고….’
그렇게 몇 시간쯤 지나고서야, 비로소 경사가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주위의 안개도 짙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 맞춰 조금씩 걸음을 늦추던 디아나가, 이윽고 완전히 멈춰섰다.
이안의 육감이 경고를 보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제 조금만 더 들어가면 경계선이야.”
이안을 돌아본 디아나가 속삭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바로 가도 괜찮겠냐? 피곤해 보이는데.”
디아나의 가뜩이나 탁한 녹색 눈동자가 더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이나 루시아보다 훨씬 더 오래 깨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사이에 크고 작은 고초도 여러 번 겪지 않았던가.
하지만 디아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장자리를 걸을 만큼의 힘은 남아 있어. 여길 지나면 쉼터로 쓰던 장소가 있으니까. 잠은 거기에 도착해서 자도 돼.”
“…길잡이의 뜻이 그렇다면야.”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불안감이 없진 않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요정이었다. 제 목숨을 그 무엇보다 아끼는 종족이 아니던가. 물론,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물건들을 돌려받고 싶어서이기도 할 터였다.
“…가면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주지 않겠지.”
“당연하지. 그런 건 묻지도 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맛을 다신 디아나가, 이안과 루시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제 일렬로 걸어야 해. 그리고 앞사람의 등만 봐라. 자신이 없다면 앞사람의 팔이라도 붙잡아. 절대 멈춰 서지 말고, 가능하면 시선도 돌리지 마라. 물론, 다른 곳으로 향해서도 안 되고.”
하면 안 되는 게 꽤 많네.
내심 생각하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어디가 가장 안전하지?”
“내 바로 뒤.”
디아나의 즉답에,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들었지? 디아나의 팔을 잡고, 등만 보고 걸어라.”
“이안 님이 맨 뒤에 서시게요?”
“난 그래도 이 녀석의 등을 볼 수 있어. 팔은 안 잡을 거니까, 괜히 뒤돌아보지 말고.”
“…네. 잘 부탁해요, 디아나.”
루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디아나가 대답 대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에 선 루시아가, 손을 뻗어 팔뚝을 움켜쥐었다.
이안도 루시아의 몇 걸음 뒤에 섰다. 루시아의 뒤통수는 물론, 그 앞에 선 디아나의 뒤통수도 한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내 호기심을 풀 수 있겠군….
요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위험을 경고하는 말들을 전부 들었으련만. 긴장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재미만 있으면 죽어도 좋단 건가.
이안이 내심 혀를 차는 사이, 디아나가 자세를 살짝 낮췄다.
“출발한다. 눈 돌리지 마.”
그녀가 자욱한 안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 루시아. 마지막으로 이안이 차근차근 나아갔다.
안개는 순식간에 자욱해졌다. 심지어 마력까지 솜처럼 머금은 안개였다.
‘이래서 앞 사람한테서 눈을 떼지 말라고 한 거네….’
잠깐이라도 멈춰 서거나 시선을 돌리면, 일행을 분간조차 할 수 없게 될 게 분명했다.
게다가 감각도 묘하게 어긋나고 왜곡되고 있었다. 안개만큼이나 밀도가 높아지기 시작한 마력의 영향일 터였다. 마법적인 재능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지금 이 안에서는 마력을 느낄 수 있으리라.
-호오….
균열의 중심부를 향해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마력의 흐름이, 이안의 심상에 또렷하게 그려졌다. 중심부에 일렁이는 혼돈도.
‘여기서 방향을 어떻게 잡는 거지…?’
이안은 선두를 걷는 디아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력의 흐름에 발맞춰 나아가면서도,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지는 않을 거리를 차분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마력의 농도가 짙어지면 곧바로 방향을 틀어 밖으로 나갔다. 여기 휩쓸리기 시작하면 결국엔 빠져나올 수 없게 되리란 걸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력의 흐름이 선명해질수록 다른 감각들은 더 심하게 왜곡되거나 뭉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다리가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것 같은. 그저 걷고 있을 뿐인데도 주위가 엄청난 속도로 멀어지는 듯한 모순된 감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저 느낌만 그런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땅이 기울어지고, 물결치듯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고 있었다. 울렁대는 원반 위를 걷는 듯한 느낌.
-재미있군. 뒤틀린 시공간이 이런 식으로 느껴지다니.
재미는 시발, 살 떨리는 구만.
내심 욕설을 토해내면서도, 이안은 한순간도 디아나와 루시아의 뒤통수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루시아가 때때로 비틀대고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어쨌건 녀석은 멈춰 서거나 넘어지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한테만 이렇게 느껴지는 건 아니란 거지.’
시간의 흐름마저 모호해지는 와중에, 이안은 어느 순간부터 등을 떠미는 마력의 흐름이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커다란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다는 건 같았지만.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거꾸로 중심부에서 밖으로 뿜어져 나가는 듯한 흐름이었다.
원하던 상황인 듯, 디아나는 방향을 전혀 바꾸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갔다.
‘얼마나 걸은 거지…?’
떠밀리듯 걸음을 옮기던 이안이 문득 생각했다.
불과 몇 분이 지난 것 같기도, 몇 시간이 지나버린 것 같기도 한 묘한 느낌. 어느새 다시 땅이 평평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등을 떠밀듯 휘몰아치던 마력의 흐름이 옅어지고 있었다. 어긋나있던 감각들이 다시 제자리를 되찾아 갔다.
디아나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아가던 한순간, 이안은 누가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균열의 경계선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 후우… 후우….”
디아나가 비틀대며 멈춰선 건 바로 그때였다. 숨을 고르며 허리를 굽힌 그녀가 내뱉었다.
“빠져나왔다….”
루시아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녀석은 디아나가 멈춰 서기도 전에 손을 놓고는, 허리를 굽힌 채 옆으로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우웩….”
땅에 주저앉은 루시아가 먹은 것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저 안에서의 경험이 어땠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더군. 또 하고 싶은데. 다음번엔, 조금 더 깊숙이.
깊숙이 던져줄까 보다.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은 차근히 숨을 골랐다. 루시아처럼 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현기증과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걸 땅 멀미라고 하던가.
“…대단한데.”
디아나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그녀는 어느새 이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가장자리를 처음 걸어 봤으면서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니.”
“안 좋아. 속이 다 뒤집어지는군.”
“고작 그 정도인 게 대단하다는 거야. 보통은-”
“정말이지, 다시는.”
디아나의 말을 자른 건, 땅에 고개를 박고 있던 루시아였다. 녀석이 숨을 헐떡이며 덧붙였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에요….”
보란 듯 어깨를 으쓱인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저 정도만 해도 잘 견딘 거다. 보통은 오줌을 지리거나, 눈물 콧물을 쏟으면서 한동안 일어서지도 못하지.”
내심 이안도 그러길 바란 듯한 말투였다. 그래서 저 안에서 겪게 될 일에 대해서도 전혀 미리 언급하지 않은 것이리라.
피식한 이안이 내뱉었다.
“너도 처음엔 그랬냐?”
“…나?”
되물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깜빡인 디아나가, 이윽고 슬며시 시선을 돌리며 내뱉었다.
“나는 아주 멀쩡했어. 거의 타고난 수준이었지.”
울고불고했단 말이군.
이안이 코웃음을 치는 사이, 재빨리 헛기침을 한 디아나가 덧붙였다.
“아무튼, 제대로 빠져나왔다. 원하던 곳이야.”
이안은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넘실대는 물결의 색이 전혀 달라져 있었다.
밤하늘 같은 짙은 남색. 장화에 닿는 땅의 질감도. 코로 파고드는 냄새도 아까와는 완전히 달랐다.
적어도 며칠은 걸어야 할 거리를 단번에 이동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휴….”
루시아가 팔로 입술을 훔치며 다가온 건 그때였다. 가뜩이나 흰 녀석의 얼굴은 창백할 지경이었다.
“좀 괜찮아진 거냐?”
“아뇨. 안 좋아요.”
이안의 물음에, 루시아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마력은 어지럽게 밀려들고 땅은 마구 파도치고. 저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더라고요.”
주위를 돌아보던 디아나가 거만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거다. 적어도 대여섯 번은 걸어 봐야, 조금씩 느낌이 오기 시작하지.”
“왜곡된 감각은 신경 쓰지 않고, 마력의 흐름에만 집중하면서 걸으면 되는 건가?”
“그래. 바로 그게 비법….”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던 디아나가 멈칫했다. 이내 미간을 좁힌 그녀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걸, 처음 걸어 보고 바로 느꼈다고?”
“감이 좋은 편이라서.”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자, 디아나의 미간이 조금 더 좋아졌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데….”
“뭐, 실제로 내가 해 보는 건 전혀 다르겠지.”
그러고 싶지도 않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삼켰다.
균열의 가장자리를 걷는 건 너무 위험했다. 이번에는 그렇다 쳐도, 루시아와 둘만 다닐 때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길이나 안내해. 어쨌든, 좀 쉬어야 할 것 같으니까.”
“…처음으로 뜻이 통하는군.”
대답하며 몸을 돌린 디아나가, 안개 너머로 걸음을 내디뎠다.
“조금만 더 걸으면 될 거다.”
***
크고 작은 바위와 풀숲. 다소 깡마른 나무들이 듬성듬성 이어진 황야였다. 흐릿한 안개만 소리 없이 넘실댔다.
디아나는 비교적 넓적하게 솟은 바위 근처로 일행을 안내했다.
땅과 바위 사이에 뿌리내린 듯 비스듬하게 굽어진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둥치와 이어진 바위 아래가 움푹하게 파여 있었다.
그 한복판,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을 내려다보며 루시아가 읊조렸다.
“피곤하네요.”
“푹 자 둬라. 다음번 균열은 오늘보다 더 오래 걸어야 하니까.”
디아나가 타고 남은 장작들을 한곳으로 모으며 말했다. 루시아가 맙소사, 하고 탄식하며 한숨 쉴 찰나.
“그럼 속도 든든하게 채워야겠네.”
그 옆에 보관함을 내려놓으며 말한 이안이, 뚜껑 위에 잘 말린 토끼 가죽을 얹었다. 가죽에 싸여있던 새카만 뒷다리가 드러나자, 눈을 깜빡인 디아나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장작을 조금 더 가져오지.”
그녀가 소나무처럼 구부러진 나무를 타고 오르는 사이,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루시아가 보관함을 열어 모포를 꺼냈다.
“일손이 늘어나니 편하네. 육포라도 간단히 먹고 있어. 금방 구워 줄 테니까.”
적당히 칼집을 낸 뒷다리를 흑검에 꿰며 이안이 말했다.
루시아가 보관함으로 몸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육포도 나눠 먹어요. 이제 아껴 먹을 필요 없잖아요.”
“다 먹진 마라. 맛대가리 없는 것만 먹다 보면 그리워질 수도 있으니까.”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그때, 양손에 잔가지를 잔뜩 든 디아나가 돌아왔다.
그녀가 나무를 모닥불에 얹는 사이. 보관함에서 육포 한 덩어리를 꺼낸 루시아가 이안의 옆에 술병을 놓아줬다.
한 손으로 마개를 여는 이안을 눈에 담던 디아나가 읊조렸다.
“술…?”
“그래.”
대답한 이안이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맞은 편에 주저앉는 디아나의 시선이 홀린 듯 술병을 따라 움직였다.
고기를 불 위에 얹으며, 이안이 내뱉었다.
“한 모금 줄까?”
“그러겠다면… 기꺼이….”
머쓱하게 시선을 슬며시 돌리면서도, 그녀는 이안이 내민 술병을 냉큼 받아 들었다.
곧바로 한 모금 마신 디아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독하군….”
“북부 술이야.”
“…하지만 아주 좋네. 여기서 먹는 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어.”
미간을 좁힌 이안이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에도 술이 있다고?”
“…그래. 감자로 만들었고, 코가 썩을 것 같은 맛이지.”
“애초에 그게 진짜 감자가 맞긴 한 거냐?”
경단의 맛을 떠올린 이안이 물었다. 멈칫한 디아나가 읊조렸다.
“어쩌면 아닐지도. 하지만 그렇게 부른 시간이 너무 길어서, 이젠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졌어.”
“하긴. 뭐든 부르기 나름이긴 하지.”
피식한 이안이, 조금씩 익기 시작한 고기로 시선을 돌리며 루시아가 물려 준 육포를 우물댔다.
그사이 술을 몇 모금 더 마신 디아나는, 옆에 벗어둔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그녀가 꺼낸 건 사선으로 쪼개진 거무튀튀한 조각상이었다. 디아나의 입에 육포 조각을 물려 주며, 루시아가 물었다.
“그게 산채에서 가져온 나무 조각이군요.”
“…그래. 그놈들은 아마, 이걸 통해서 힘을 받고 있었을 거다.”
디아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벌써 취기가 도는지, 혀가 살짝 풀린 채였다.
루시아가 싸늘하게 눈을 빛냈다.
“우상이었던 거군요. 그래서 부숴버린 거고요. …힘을 보내주는 게 어떤 마족인지도, 알고 계세요?”
“물론 알지.”
루시아를 돌아본 디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키하타라.”
“아키하…. ……!”
읊조리던 루시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 칼날을 빙글 돌려 고기를 뒤집으면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뭐, 유명한 이름인가 보지?”
디아나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돌아보았다.
“넌 정말 나를 여러 번 당황 시키는군, 이안 호프….”
“벽 밖에서는 이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예요. 저 역시, 문헌에서 읽은 걸 떠올렸을 뿐이고요.”
차분하게 말 한 루시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세력을 이뤘던 대마족 중 하나에요. 달리 깃털 왕관의 대모나, 피에 젖은 날개라고도 불리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