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89
389화
“……! 그, 그럴리가.”
순간 눈을 치켜떴던 디아나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절대 아니야.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가능할 거라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어. 광기에 잡아먹힌 상태라면 모를까. 본래 마족이나 마물들은 균열 인근으로는 접근도 하지 않아.”
이안의 눈을 힐긋 돌아본 디아나가 재빨리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가 여전히 빤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을 알 수 없는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동자.
마른 침을 삼킨 그녀가 덧붙였다.
“무, 물론 타락자 중에 가장자리를 타고 다니는 놈들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것들의 목적도 우리와 같아. 너도 겪어 봐서 알겠지만, 저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타락자라고 달라질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그래… 처음 겪는 일이란 거군.”
이안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이미 처음부터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종종 있던 일이라면, 아까 디아나가 그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건 그저 확인 절차일 뿐이었다. 요정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주제에, 막상 자신이 무고하게 의심받는 건 견디지 못하는 족속들이 아니던가.
“물론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
대답하던 디아나가 멈칫했다.
이안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기 때문이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는 진작부터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 좀 쉬었다가 움직이도록 하지….”
다가서는 루시아에게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 보인 이안이, 그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덧붙였다.
눈을 깜빡인 디아나가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래도 괜찮을까? 안에 남은 놈들이 따라 나오기라도 한다면….”
“따라 나올 놈들은 없어. 전부 처리했으니까.”
이안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역시, 가장자리 밖으로 나가서 싸우는 게 정석이었다고 내심 덧붙이는 채였다.
가장자리를 벗어나고 나서야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또, 고인물들이나 할 법한 방식으로 퀘스트를 클리어한 것이다.
물론, 그런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처에 본대가 있어도, 당장 알아채지는 못할 거야. 저 안에서 마력 파장이 밖까지 전해질 리 없으니까.”
나른하게 덧붙인 그가, 오른손만 움직여 허공에서 물건들을 꺼내 내려놓기 시작했다. 철퇴와 강철 장갑. 판금 팔목 보호대를 비롯한 루시아가 떨어뜨리고 간 장비들이었다.
“망가지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워낙 정신이 없었어서.”
이안의 곁에 앉으며 읊조린 루시아가, 장비들을 하나씩 집어 들기 시작했다. 눈만 깜빡이고 있던 디아나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것들을 전부, 처리했다고?”
“그래… 하마터면 균열에 빨려 들어갈 뻔하긴 했지만.”
“도망쳐 나온 게 아니었다니….”
탄식하듯 한숨을 흘린 디아나도, 이윽고 이안의 앞에 주저앉았다.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고정한 채였다.
“직접 보긴 했지만,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저 안에서 대체 어떻게 싸운 거지? 심지어 그 망자들은, 균열의 영향을 거의 받지도 않는 것 같던데.”
“열심히.”
“…….”
“불편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아예 불가능하다고 여길 정도까진 아니던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이안의 심드렁한 대답에, 디아나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내가 오늘 본 걸 얘기해도, 아마 믿지 못할 자들이 태반일 거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게 가능한 건 적어도….”
디아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슬쩍 한쪽 눈을 뜬 이안이 되물었다.
“적어도?”
“…아니야. 실언을 할 뻔했군.”
디아나가 입맛을 다시며 내뱉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이안은 짧게 코웃음을 흘렸다. 굳이 대답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거점에 도착하고 나면 알게 될 부분이었으니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따로 있어요.”
루시아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녀는 한쪽 팔목 보호대를 다시 착용하고, 반대쪽을 팔에 대는 중이었다.
“아까 그 망자들은 왜 거기 있었던 걸까요. 게다가 어떻게 계속 움직인 걸까요. 아무리 사령술로 되살아났다고 해도, 술자가 근처에 있는 게 아닌 이상 한계가 있을 텐데요.”
“혼돈력으로 유지되던 놈들이었어. 영원히 움직이지는 못하겠지만, 저 안에서도 꽤 오래 버틸 수 있겠지.”
이안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내뱉은 말에, 디아나의 미간이 꿈틀댔다.
“혼돈…? 그놈들이 오염된 마력이 아니라 순수한 공허의 힘으로 움직인단 말이냐?”
“그래. 그렇던데.”
“카르미엘이 기어코 마족으로 거듭난 모양이군….”
“카르미엘?”
“그 사령 술사의 이름이다.”
“아하.”
이젠 이름도 알게 됐군.
사실 마족만 혼돈력을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안은 굳이 정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타락자가 그처럼 혼돈의 파편이나 정수를 품고 있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혼돈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도 수상해 보일 터였다.
“어쨌건, 단순하게 낙오되거나 버리고 간 것 같진 않았어.”
대신, 이안은 자신이 알게 된 다른 사실을 내뱉었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내가 보기엔, 우리를 포획하려고 하는 것 같던데.”
“…포획?”
멈칫한 디아나가 되물었다. 루시아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명령을 남겼겠지. 붙잡아서 균열 속으로 같이 끌고 들어가려고 한 건지, 다른 목적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균열을 함정으로 써먹고 있다는 건 확실한 거군.”
이윽고 디아나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움켜쥐며 읊조렸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영원히 유지될 함정은 아니었어. 한 놈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도였겠지. 딱 그만큼 별 볼 일 없는 망자들이었고.”
“그건 너 같은 미친, 아니… 강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야. 이안 호프. 다른 대다수에겐 아주 치명적일 거야.”
궐련이 간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디아나가 덧붙였다.
“그 정신 나간 사령 술사 놈이, 떠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미친 짓을 익힌 게 분명해. 그 산채를 습격한 것도 함정에 써먹을 하수인을 수집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어.”
“고블린 뼈 같이 생긴 것들이 있긴 하더군.”
“느낌이 좋지 않아. 놈이 인근을 떠돌면서 계속 새로운 함정을 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그럴지도.”
그래서 그놈이 뭘 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 덧붙이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게, 그 사령 술사 놈이 인간이나 타락자 출신의 쓸만한 하수인을 손에 넣는 방식인지도 몰랐다.
변이된 마물 하수인 정도는 어렵지 않게 보급할 수 있을 테니까.
뛰어난 사령 술사는, 생전의 능력을 거의 고스란히 간직한 망자를 되살려낼 수 있지 않던가.
디아나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서 이 사실을 알려야겠는데. 움직일 수 있겠어?”
“질문의 대상이 잘 못 됐어.”
시큰둥하게 내뱉으며,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장갑을 착용 중이던 루시아가, 연결 부위를 철컥 고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아요. 멀쩡해요.”
“입가에 피 묻어 있는데.”
“…그냥 조금 토한 거예요.”
“뭐…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땅을 짚으며 일어섰다. 아직 두통과 현기증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이제 이 정도 고통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설마 또 야영을 해야 할 만큼 멀진 않겠지.”
“물론이다. …조금 빨리 걷긴 해야겠지만.”
디아나가 덧붙이며 일어섰다. 뒤따라 일어서는 루시아까지 확인한 이안이, 안내하라는 듯 턱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디아나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
균열의 권역을 벗어나고 나자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완만한 오르막이 한동안 이어지더니, 곧 다소 가파른 산길로 바뀌었다. 어둡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고요한 산이었다.
-지루하군…. 난 좀 자야겠어.
요그가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로 읊조렸다.
거 참 부럽네. 속으로만 대답하며, 이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닐라가 새삼 그리워졌다. 녀석이라면 이런 경사도 평지처럼 걸었을 터였다. 그럼 그 역시 안장 위에서 적당히 졸 수 있었으리라.
‘…명복은 못 빌어줄망정, 부려먹을 생각이나 하다니. 나도 참.’
디아나는 능선을 비스듬하게 타고 나아갔다. 이 인근의 지리를 꿰고 있는 것 같은 거침없는 걸음걸이였다. 심지어 평지를 걸을 때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속도였다.
“얼마나 남았지?”
이안이 불쑥 내뱉은 건, 체감상 몇 시간쯤 더 나아갔을 때였다.
디아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그럼 조금 천천히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디아나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이 뒤편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조금 떨어진 뒤편에, 루시아가 숨을 헐떡이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앓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조금씩 뒤로 쳐지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저럴 리 없건만. 균열의 가장자리를 지나친 후유증일 터였다.
“…인간들이란.”
낮게 혀를 차면서도, 디아나가 선선히 걸음을 늦췄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건 몇 걸음 지나지 않아서였다.
“네 방패를 봤다, 이안 호프. 성유물 같던데. 맞나?”
여유가 좀 생기긴 했나 보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걸 보니.
생각하며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린 이안이 대답했다.
“여기선 성유물도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걸로 아는데.”
“전부 그런 건 아니니까.”
“아, 그래…?”
이안이 되묻자, 디아나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그럼, 그 방패는 성유물이 아니란 거네. 그럼 그냥 유물인 거야? 평범한 마도구 같진 않아 보였는데.”
“뭐. 그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지. 원한다면 알려줄 수도 있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이안이 디아나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귀찮게 더 자세히 캐묻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건 또 무슨…. 아니, 아니야.”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던 디아나가, 이내 진저리 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모르는 게 좋겠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이안 호프.”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이안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이기주의자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 갈수록 이 요정을 다루는 게 쉬워지고 있었다. 물론, 입을 다물게 하는 것에만 국한된 의미는 아니었다.
“어쨌건 아쉽겠군.”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이안이 넌지시 덧붙였다.
“이제 더는 균열의 가장자리를 걸을 수 없을 테니까. 운신의 폭이 확 줄어들겠어.”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쩔 수 없지. 한동안은 견딜 수밖에.”
“역시….”
그녀의 말에서 원하던 단서를 얻은 이안이, 옆으로 따라붙는 루시아를 일별하고는 덧붙였다.
“유랑단을 없애버릴 생각인 거군.”
“그래. 본래는 놈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만 알릴 생각이었지만.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걸 확인한 이상, 전처럼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어.”
…이것까지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는데.
뜻밖의 순순한 대답에 이안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디아나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 미친놈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은 기뻐하겠지….”
“원한을 많이 샀나 보군요.”
물은 건, 숨을 고르며 걸음을 옮기던 루시아였다.
디아나가 낮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놈이 타락하기 전부터 알던 자들은 전부 그렇겠지. 놈이 본색을 드러내자마자 가장 먼저 희생양으로 삼은 게, 놈이 살던 도시의 사람들이었으니까.”
루시아가 낮은 탄식을 흘렸다.
“그렇겠네요. 여기선, 교단과 신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 뭐, 놀라운 일은 아니야. 세상이 이 꼴이 되고 난 뒤엔,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으니까.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였지….”
디아나의 목소리가 문득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었으리라 유추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생존을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된 게 그때부터인지도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겠군요.”
“그래. 타락자 놈들도 대부분 뒈졌지만. 카르미엘처럼 운 좋게 살아서 도망친 놈들도 적진 않지.”
낮게 콧방귀를 뀐 디아나가 루시아를 슬쩍 돌아보며 덧붙였다.
“듣기로 그놈은 타락하기 전부터 늘, 자길 유쾌한 방랑자라고 소개했다더군.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주문 쟁이가 있다는 게, 믿어지나? 처음부터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던 거야.”
“…하지만. 이곳에서 살다 보면, 결국은 모두가 어둠에 물들게 되지 않을까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루시아가 문득 덧붙였다.
“…카르미엘 같은 타락자들과 달리, 원치 않게요. 그들도 모두 죽이나요?”
“네 미래에 대해 묻는 거야, 루시페르?”
디아나가 루시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루시아가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보통은. 하지만 예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네가 네 안의 어둠을 통제한 채 이성을 유지하고. 네 힘을 우리들을 위해 쓴다면. 그걸 증명할 수 있다면.”
“……!”
루시아의 눈이 설핏 커졌다. 녀석은 그게 정말 가능하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곁에서 걷는 이안을 슬쩍 일별했을 뿐이었다.
시선의 의미는 명확했지만, 정작 이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타락을 선택해도, 아예 보급할 방법이 사라지진 않았나 보네.’
뒤이어 어깨를 으쓱인 그가 툭 덧붙였다.
“어쨌든, 유랑단을 토벌할만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거군.”
“당장은 아니… 흠.”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디아나가, 짧게 침음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신나게 떠들어 놓곤, 하여간.
옅은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것들을 토벌할 때, 너도 함께 출전하나?”
“…아니.”
잠시 멈칫한 디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전면전에 참여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야. 그런 싸움에 끼었다간 개죽음만 당하겠지.”
“할 수 있는 일만 하겠단 거군.”
“…그래. 나는 이 빌어먹을 곳에서 죽지 않을 거야. 끝까지 살아남아서,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갈 거다. 명예롭게.”
여기서 명예가 왜 튀어나와?
요정식 명예 타령에 다시 한번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덧붙였다.
“그럼 보고할 때 이 말을 꼭 함께 전해. 놈들을 토벌할 때, 나도 함께하겠다고.”
“…너도?”
디아나는 물론, 옆으로 따라붙은 루시아도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죽을 뻔한 빚은 갚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