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9
039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걸음을 옮기던 필립이 문득 내뱉었다.
후작의 밀실에서 가져온 기록물을 세 권째 읽고 있던 이안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뭐가.”
“오른델이요. 제가 볼 땐 불안한 게 한둘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나리와 영주님의 대화가 아니더라도요.”
“드디어 너도 사고라는 걸 할 줄 알게 됐군. 축하할 일이야.”
“나리가 보시기에도 그렇단 거죠?”
이안은 어깨를 까딱였다.
필립의 말대로, 오른델의 불안 요소는 여전히 많았다.
데클란 본인까지 포함해서.
하지만 그게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멸망을 향해가는 이 세계에서, 결국 개인이 만들어 내는 변화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른델이 타락자의 손에 남겨지는 것은 막았으니, 이만하면 차선의 결말 정도는 될 터였다.
“신경 꺼라. 지금 네가 오른델을 걱정할 때냐?”
덧붙인 말에 필립이 퍼뜩 정신이 든 얼굴이 됐다.
“하긴. 옳은 말씀이십니다. 아겔 란의 문제가 가장 크고 시급하죠. 그런 의미에서…….”
그가 턱을 까딱였다.
“뭔가 나온 게 있습니까?”
“아직은. 뭔가 있길 바라는 게 좋을 거다. 별 게 없다면… 아겔 란으로 돌아가는 날이 늦어질지도 모르니까.”
“……!”
필립은 긴장한 얼굴이 됐지만.
사실, 이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타락자란 것들은 마법사와 비슷해서, 제 놈들이 한 짓을 기록으로 남기는 걸 좋아했으니까.
그 내용은 배신을 염려한 증거 기록이냐, 정신 승리나 자의식 과잉에 의한 자기 과시냐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지지만.
후작은 전자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게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온갖 잡지식과 정보들을 계속해서 눈에 담던 한순간.
“있군.”
이안이 툭 내뱉었다.
슬슬 초조한 눈빛이던 필립이 홱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뭐가 있습니까?”
이안이 보고 있던 책자를 필립 쪽으로 내밀었다.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제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래?”
씩 미소 지은 이안이 표지에 그려진 문양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종이에 글자들이 홀연히 나타났다.
“지금은?”
“…마법이 걸린 책이었군요.”
“그래. 남한테 보이면 안 될 내용을 기록하기에 딱 좋지.”
이 많은 기록물 사이에 깨끗한 공책이 섞여 있으면 오히려 수상하다는 생각까진 못한 것 같지만.
“그래서, 뭐가 적혀 있습니까?”
“명단이야. 후작은 정말 아무도 믿지 않는 성격이었군. 언급된 자들의 명단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조사한 신상까지 다 적어 뒀어.”
이 작자, 정말 왕이 되고 싶었군.
이안의 입가에 조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도 늙은 사슴, 레지스 브란트의 진짜 목적이 뭔지까지는 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와의 밀회나 대화를 요약해 둔 부분 어디에도, 아겔 란 전체를 마경화시키리란 내용은 없었으니까.
타락자들을 주축으로 한 연합 국가를 설립하고, 심연에서 얻은 금단의 지식으로 불사의 군단을 만들어 세력을 넓히리란 계획만이 상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변방 국가들을 집어삼켜, 끝내는 제국마저 위협할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 후작과 다른 타락자들의 원대한 야망이었다.
‘결국, 전부 레지스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거네.’
레지스 브란트라는 작자의 방식이 어떤지도 알 것 같았다.
권력자와 지식인들이 가진 은밀한 야망과 욕망을 부채질해, 끝내 선을 넘게 만들었으리라.
물론 그들이 원하는 바가 이뤄지리란 약속도 수없이 했겠지만.
이안이 볼 땐, 아겔 란이 마경화되면 다 없던 일이 될 것들이었다.
그때가 되면 타락자들은 원치 않아도 복종해야 할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들조차 제물에 불과할지도.
‘이런 미친놈들이 전 대륙에 암약하고 있으니, 이 세상이 안 망하고 배길 리가 있나.’
이 와중에도 인간들은 서로 전쟁할 궁리나 하고 있으니.
혀를 차는 이안을 조바심 나는 얼굴로 바라보던 필립이 내뱉었다.
“어떤 이름들이 있습니까? 아는 이름도 있나요?”
“레지스 브란트는 확실히 있고.”
페이지를 넘기던 이안의 손길이 멈췄다.
“프레드릭 헨슨….”
“…그건 누굽니까?”
“발크시의 사제다. 영주와 가까운 사이였지. 오, 한나 버튼. 이것도 아는 이름이군.”
“그건 또 누구죠?”
“발크시의 귀족 부인이지. 정식 귀족은 아니지만.”
“…정말 왕국 전역에 숨어 있었던 거군요. 토벌대를 파견하시라 건의해야겠습니다. 정 안되면 제국에라도 제보를-”
“그럴 필요 없어.”
“……?”
“방금 말한 자들, 다 죽었으니까.”
“예……?”
필립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죽이다뇨. 누가…….”
이안의 시선에, 필립의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나리가요?”
“의도한 건 아니었어. 의뢰비를 떼먹으려 하거나 뒤통수 치거나 해서 어쩔 수 없었지. 타락자라는 건 죽이기 직전에나 알았고.”
“…발크 성의 영주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좋아하던데.”
“예?”
“본인밖에 모르는 자였거든. 권력을 나눠 먹고 훈수질하던 것들이 죽으니 나쁠 게 없었겠지. 거기다 타락자라는 증거까지 명확했어. 오히려 비밀로 하자고 돈도 주더군. 일이 커지는 건 싫었던 거야. 그 후에 추방당하긴 했지만, 아무튼. 여기 있는 이름의 절반은…….”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내가 죽인 것 같은데.”
“…….”
오랜만에 얼빠진 종자의 표정을 지었던 필립이 이윽고 내뱉었다.
“나리는 정말이지… 대단한 분이십니다. 이만하면, 아겔 란의 수호자라 불리셔도 손색이 없겠군요.”
“아겔 란을 위해서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어. 그러니까 내 이름 앞에 이상한 수식어 추가할 생각 하지 마라.”
이안의 싸늘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립이 덧붙였다.
“그렇다면 타락자들을 물리칠 운명을 타고나신 것일 지도요.”
“…….”
그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육체인 이안 호프는 엄밀히 말해, 게임의 주인공이었으니까.
가는 곳마다 타락자와 마물, 마족들과 얽히게 되는 건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들과 관련된 퀘스트가 보상이 가장 좋으니,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론 잘됐군요. 타락의 뿌리를 확실히 제거하면, 남은 타락자들에겐 기반이 거의 사라지는 셈이 될 테니까요.”
필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아겔 란으로 가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요.”
“흠.”
책을 아공간에 안전하게 넣은 이안이, 대답 대신 침음했다.
미간을 좁힌 필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곳을 들르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닥쳐 봐. 고민 중이니까.”
“…….”
이안은 필립의 시선을 무시한 채 갈등에 잠겼다.
이대로 아겔 란에 간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지가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끝내면 아마도, 아겔 란을 떠나야 하리라.
한동안은 다시 발을 들일 수도 없을 테고. 게임에서도 그랬듯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을 퀘스트들과도 이별하게 되리란 뜻이었다.
아겔 란을 떠나는 것엔 조금의 미련도 없었지만, 그 부분엔 아니었다.
‘굵직한 도시를 다 거치긴 했지만… 분명 몇 개쯤은 더 있을 텐데.’
메브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안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이질적일 정도로 차분하던 모습.
아마도 격렬한 감정의 표출 끝에 찾아온, 잠깐의 평온이었으리라.
혼자가 된 지금도 그럴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내면의 저울이 오가는 가운데.
문득, 필립이 멈춰 섰다.
“뭐냐?”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필립이 앞을 턱짓했다.
“갈림길입니다, 나리. 한쪽은 선회해서 발크시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한쪽은… 아겔 란으로 직행하는 길이고요.”
“…….”
이안은 앞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는 가운데, 좌우로 길게 나뉜 관도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저는 나리의 종자이니, 어떤 선택을 하시더라도 따르겠습니다.”
필립이 덧붙였다.
잠시 턱을 긁적인 이안은, 이윽고 말머리를 틀었다.
“이쪽으로 가지.”
아겔 란으로 이어지는 길목.
굳어 있던 필립의 표정이 극적으로 밝아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
“이렇게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다니. 드디어 모든 게 잘 풀리리란 예감이 드는군요. 저희는 환대를 받으며 왕성에 들어가게 될 테고, 왕성에 드리운 어둠을 뿌리 뽑아 명예도 손에 넣게 될 겁니다.”
“네 말을 듣고 있으니까 내 선택이 잘못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데.”
“그럴 리가요. 닥치겠습니다.”
혹시나 마음을 바꿀까, 필립이 재빨리 말고삐를 끌었다.
이안은 피식대며 시선을 돌렸다.
아겔 란에서 순탄한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가는 길이라도 순탄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드디어….”
비탈길을 내려오던 필립이 감격의 탄식을 흘렸다.
저 멀리, 아겔 란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촌구석치곤 제법이군.”
이안이 읊조렸다.
완만한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된 아겔 란은, 왕국의 다른 도시들보다 최소 수십 년은 앞서 있었다.
게임에서도 작은 도시는 아니었건만. 현실이 되고 보니, 그때는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언덕 꼭대기에 솟은 내성. 그 아래로 건물들이 이어지고, 언덕 중턱을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언덕 아래로도 건물이 많았고, 또 다른 성벽이 한 겹 더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주위로도 건물이 많았는데, 가장자리로 또 다른 성벽을 두르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 옆으로는 적당한 넓이의 강이, 반대편 평야에는 밭이 가득했다.
도시의 이름이기도 한 아겔 란이 왕국을 이룬 비결 중에는, 이런 입지 조건 훌륭한 곳에 터를 잡은 것도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아마 전 버차드 후작은 오른델을 이렇게 만들고 싶었으리라.
‘아직 피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이안은 멀쩡한 성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메브가 그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뜻이었으니까.
“오늘 밤은 드디어, 따듯한 방에서 잘 수 있겠군요.”
필립의 걸음이 빨라졌다.
오른델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말끔하던 그의 몰골은 지금, 부랑자가 따로 없었다.
거기다 날씨도 조금씩 추워지는 중이었다.
계절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동네지만, 노숙하는 이들에겐 작은 변화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은 아겔 란의 외곽 시가지로 들어섰다.
제법 많은 인파. 그들 대부분은 이안과 필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외지인의 왕래가 잦고 치안이 좋다는 의미였다.
그때 필립이 말을 멈췄다.
첫 번째 성벽의 관문 앞이었다.
“외지인 같은데. 신분과 목적을 밝히시오.”
경비병이 말했다.
같은 일을 수없이 반복할 텐데도, 꽤 군기가 잡힌 모습이었다.
“저는 아겔 란의 보검, 메브 리우렐 경의 종자입니다. 여기 이분은 리우렐 경의 손님인 이안 호프 나리이시고요.”
“리우렐가의 손님이라고…?”
둘의 행색을 보며 불신의 눈빛을 보낸 병사가 턱짓했다.
“사람을 보내 확인하겠소. 기다리시오.”
“예.”
필립이 성벽으로 말을 몰았다.
이안도 군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이렇게나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절차라니.
“도시가 체계적으로 돌아가는군.”
“당연하죠. 여긴 왕국의 중심이니까요. 법도부터 거주지까지, 모든 게 체계적입니다.”
아마 제국을 따라 한 거겠지만.
이안은 생각하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이 세계에선, 이만하면 아주 살 만한 동네였다.
게임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화마에 휩싸인 채 아수라장이 되어 있던 도시가.
지금으로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번에도 삐끗하면 그렇게 되겠지.’
그때, 관문 밖으로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귀족의 가신들이 걸치는 로브와 후드를 뒤집어쓴 체격 좋은 사내.
주위를 두리번댄 그가 이안과 필립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드디어 오셨군! 기다리다 목 빠질 뻔했소!”
후드를 벗으며 미소 짓는 건 그들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미구엘! 살다 보니 댁이 반가운 날이 다 있군요!”
필립이 그를 와락 껴안았다.
왜 이래?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준 미구엘이, 말에서 내리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내뱉었다.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군. 살만했던 모양이지?”
미구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잘 다듬은 턱수염과 흉터가 흔들렸다.
“댁들 몰골을 보니 아니란 말은 못 하겠소. 자, 들어갑시다.”
몸을 돌린 그가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경비병과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까딱여 보이기까지 했다.
필립이 피식댔다.
“현지인이 다 되셨군요.”
“아시다시피 내가 적응력이 좋잖소. 여기서 지낸 기간을 생각하면 뭐, 그럴 만하지. 그러는 댁도, 이제 제법 용병 느낌이 나는군.”
“원하진 않았지만 말이죠.”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요.”
껄껄 웃은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우린 성벽을 하나 더 넘을 거요. 필립은 알겠지만, 리우렐가의 저택은 제일 안쪽에 있거든.”
“그런데 왜 당신이 나오셨습니까? 전 나리께서 직접 나오실 줄 알았는데요. 사안이 사안이니까.”
“물론 그러셨지. 나보다 더 댁들을 기다리셨는데. 다만, 그러실 수가 없었을 뿐이오.”
볼의 흉터를 긁적인 미구엘이, 주위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나리께선, 가택에 연금 중이셔서 말이오.”
“……?”
필립은 물론, 이안의 미간도 설핏 좁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