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393
393화
…냅다 이것부터 물을 줄이야.
어지간히도 궁금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루시아를 슬쩍 일별한 이안이, 다시 그레이엄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묘하게 서늘해진 푸른 눈으로 루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소. 우리는 저 숭고하고 용맹하신 히케드 전하를 섬기지.”
“역시….”
루시아가 낮은 탄식을 흘렸다.
“정말 전하께서 살아 계셨던 거군요. 그 긴 시간을… 제국의 백성들을 지키시면서….”
“전하께서 얼마나 고결한 분이신지는, 차차 몸소 느끼게 될 것이오. 두 분도 이제는 이곳의 주민이니까.”
백작이 덧붙였다.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어쨌건 서늘하던 눈빛은 다시 생기 없는 본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놀람은커녕 표정 변화조차 없는 이안을 일별한 그가 말을 이었다.
“전하에 대한 질문은 더이상 받지 않겠소. 경솔하게 입에 담을 분이 아니시니.”
백작이 그에게 깊이 충성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심지어 디아나도 그런 것 같았다.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건가.’
하긴. 이 마경에서 살아남은 게 그의 지휘 덕분이라면, 없던 충성심도 생겨날 터였다.
이안이 늑대들은 황태자의 친위대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루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질문을 하나 더 해도 될까요?”
백작이 고개를 까딱였다.
“기꺼이.”
“이 도시는 용의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어떻게 통제하고 계신 겁니까?”
이안을 묘한 눈으로 돌아본 그녀가 덧붙였다.
“용의 마법은 합당한 자격 없이는 다룰 수 없다고 알고 있어서요.”
이안도 다시 백작을 바라보았다. 새로 얻은, 아직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스킬이 뇌리를 스쳐서였다.
“다방면에 지식이 해박하시군…. 도시에 새겨진 위대한 마법은, 아주 치밀하게 설계되어있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백작의 시선이 이내 천장으로 향했다. 석식 내부에는 아무런 주문 회로도 새겨져 있지 않았지만. 그 너머, 내성을 감싸고 있는 주문들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도시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스스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지. 이런 위대한 유산을 남긴 고대 난쟁이들과 이름 모를 용께 무한한 감사를 표할 따름이오.”
…정말 아르케아스인 건가.
이안은 내심 읊조렸다.
다른 종족을 위해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수많은 진언을 새길만 한 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본래 둥지에 새겨져 있던 주문들을 살짝 손보기만 한 걸 수도 있긴 했지만.
“물론,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문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오.”
다시 고개를 숙여 루시아를 바라본 백작이 말을 이었다.
“난쟁이 장인들의 말에 따르면 본래는 가능했을 거라더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로선 그 방법을 알 수 없소. 도시 어딘가에, 고대 난쟁이들이 감춰 둔 통제실이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오.”
“찾아내지 못하셨나 보군요.”
루시아의 말에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시도는 해 봤소만, 지금은 포기했소. 의심 가는 구역을 부숴야 하는데, 진언 회로가 공격으로 판단할지도 모르잖소. 지금 이대로도 검은 땅에서 가장 안전한 거점 중 하나인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백작의 입가에 피곤함과 자부심이 섞인 옅은 미소가 스쳤다.
“이렇게 외곽이 아니었다면, 드라그 벨가는 모든 거점의 중심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오.”
“각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만하면, 궁금증은 해소되셨소?”
“충분히요.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다행이군…. 더 묻고 싶은 게 있으시오?”
백작의 시선이 넌지시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짧게 침음한 이안이 말했다.
“세 개 정도로 요약할 수 있소.”
“…많으시군.”
손으로 눈가를 어루만진 백작이 덧붙였다.
“답변이 짧더라도 이해해 주시오.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체력을 아껴야 해서 말이오.”
“정확히 답변만 해주신다면야. 그럼, 묻겠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곧바로 검지를 들었다.
“목욕은 원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소?”
손을 뗀 백작이, 조금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게… 첫 번째 질문이오?”
“아주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니까.”
이안의 즉답에, 풀썩 웃음을 터뜨린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원하신다면 이곳을 나감과 동시에 이 친구가 목욕물을 준비해줄 것이오.”
체념한 듯 심드렁하게 서 있던 디아나가, 번쩍 눈을 치켜뜨며 백작을 돌아보았다.
“지금 나보고, 시중까지 들라는 말씀입니까…?”
“이분들은 이곳 생활이 처음이잖나.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 번만 도와주게. 일손이 부족한 건 자네도 알잖나.”
“아니… 하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대던 디아나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감싸 쥐었다.
이안이 신경도 쓰지 않고 중지를 치켜든 건 그때였다.
“전투 장비들을 정비하거나 구매할 수 있겠소? 보시다시피, 상황이 여의찮아서 말이오.”
“흠… 기본적인 물품들은 보급받으실 수 있을 것이오.”
부랑자 같은 몰골인 이안의 몸을 훑어보며, 백작이 말을 이었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직접 난쟁이 장인들을 설득하셔도 상관없소만. 예상하다시피, 이곳은 물자가 그리 충분하지 않소. 병장기는 특히.”
주는 대로 받거나, 알아서 거래를 해서 손에 넣으라는 뜻이리라.
하긴. 그런 권한들은 난쟁이 장인들에게 위임한 상태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소.”
어쨌든, 이안에게는 충분히 희소식이었다. 아공간을 뒤져보면, 난쟁이들을 혹하게 할 만한 물건이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드디어 마지막이군….”
이안이 약지까지 펼치자, 백작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 이 안에서는 천천히 나이를 먹소?”
“……?!”
“……!”
백작은 물론, 디아나와 루시아까지 동시에 돌아보는 가운데,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혹은, 바깥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다거나.”
“…어쩌다 그렇게 생각하셨소?”
눈을 끔뻑인 백작이 되물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요정이나 난쟁이 같은 이종족들은 그렇다 쳐도, 인간 거주민들이 생각보다 너무 젊어서 말이오. 검은 벽이 솟은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었고, 삼십 년에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인데. 이상하잖소.”
물론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걸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기엔 오는 동안 마주친 아이들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았다.
“심지어 각하께서도 그러시더군. 아주 어릴 때 이곳에 고립되신 걸수도 있지만…. 그럼 지금처럼 제국식 예법이나 지식에 정통하진 않으셨겠지.”
“관찰력이 대단하시군…. 우리들도 한참이 지나고서야 깨달은 사실을, 벌써 깨달으시다니….”
백작이 진심으로 감탄한 듯 읊조렸다. 순간적으로 피로조차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소. 이 검은 땅의 시간은, 바깥보다 훨씬 더 느리게 흘러가지.”
“맙소사… 루 엔테르여….”
이어진 백작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루시아가 비로소 경악성을 흘렸다. 그녀를 일별한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순교 원정대의 모든 이들이 무사히 거점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오. 많은 숫자가 경계를 지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또 광기에 물들고 말지.”
이안의 뇌리로 게임에서의 기억이 절로 스쳐 지나갔다. 순교 원정대와 함께 벽을 넘은 이후부터, 한계를 느꼈던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백작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강인한 영혼과 생존력을 가진 이들만이, 끝내 살아남아 길잡이들과 마주칠 수 있소.”
이안은 그 말에 담긴 속뜻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쭉정이들을 솎아내는 과정을 거친다는 거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응이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원정대를 기다리며 위험한 경계 지역을 오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모자란 자들을 보살피며 함께할 만큼 상황이 여유롭지도 않으리라.
길잡이들과 무사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일차적인 자격은 검증했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바깥의 소식을 듣고, 그중에서도 중요한 정보들은 공유해 왔지. 우리는 그것을 몇 번쯤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확실히 알게 됐소.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바깥의 세월이 훨씬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래서 이 얘길 꺼낸 거네.
옅게 미소 지은 이안이, 백작의 푸른 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도 알고 계시오?”
“정확하지는 않소. 알다시피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기 어려워서 말이오. 하지만 우리가 느끼기에는 기껏해야….”
“…십 년쯤.”
백작의 시선을 받은 디아나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백작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길어야 십여 년 정도가 지났다고 느낄 뿐이오. 여기에는 개인차가 있소. 누구는 십 년이라 하고 누군가는 십오 년은 지났다고 하지. 어쨌든…”
이안의 눈을 빤히 마주 본 백작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삼십 년은 물론, 이십 년이 지났다고 말하는 이도 본 적이 없소. 실제로도 그렇고. 정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다면, 나는 이미 육십 살이 넘었을 것이오. 경이 보시기에도, 그 정도는 아니잖소?”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깡마르고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백작의 겉모습은 육십은커녕 오십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길어야 십오 년인가….”
“그렇소.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말이오.”
그렇겠지. 아직 제대로 정립도 되지 않은 개념일 테니까.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서 대충 주워들은 수준에 불과하긴 했지만. 현대인인 그는, 이미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간이 뒤틀렸다는 것은 결국, 시간도 그렇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달리 시공간이라 부르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럼 결국….”
멍하니 이안과 백작을 번갈아 바라보던 루시아가 비로소 입술을 달싹였다.
“바깥의 시간이 이곳의 두 배… 어쩌면 그 이상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에겐 그렇게 느껴지지.”
“세상에…. 대체 어떻게…. ……!”
탄식하던 루시아가 불현듯 눈을 치켜떴다. 녀석의 고개가 홱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번뜩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을 터였다. 그게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한 이안은, 나가서 이야기 하자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알아들은 듯 루시아가 낮은 탄식만 흘리는 가운데.
“왜 이안 경을 초인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군.”
마찬가지로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백작이 입을 열었다.
“드라그 벨가는 외부인들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도시지만. 이안 경만큼 이 사실을 빨리 눈치챈 이는 없으리라 확신할 수 있소. 심지어….”
그의 목소리가 순간 낮아졌다.
“표정조차 변하지 않는 이는, 더더욱.”
“…나도 눈치챈 순간에는 놀랐소. 지금은 그저 확인받았을 뿐이고.”
“그때도 그다지 표정의 변화가 있으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한 백작이, 비로소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어쨌든, 이걸로 세 번의 질문은 다 끝난 것 같군. 미흡한 답변이 있었더라도 양해해 주시오.”
“충분했소.”
이안의 대답에, 백작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나 역시, 두 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소. 그런 의미에서, 귀빈들이 묵으시는 집을 내어 드리겠소. 이곳과 같은 층에 있으니, 디아나가 바로 안내해줄 것이오.”
백작이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디아나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안이 선선히. 그리고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루시아가 뒤따라 일어섰다.
쿠구구구….
문 옆에 서 있던 오크가 곧바로 벽면의 손잡이를 당겼다. 백작이 열리고 있는 문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그럼, 편히 쉬시길 바라겠소. 혹여 추가적인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 있다면, 다시 모시도록 하겠소.”
“그러겠소.”
“융숭한 대접에… 감사드려요. 각하. 또 뵙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에 이어, 루시아가 다소 멍한 와중에도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소리 없이 입맛을 다시던 디아나가 앞으로 나섰다.
“…이쪽으로.”
루시아가 삐걱대며 몸을 돌렸다.
녀석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이안은 그레이엄 백작을 일별했다. 눈을 반쯤 감은 그가, 피곤한 손길로 펜을 집어 들고 있었다.
‘아직 묻고 싶은 게 남았지만….’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또 기회가 있으리라.
미련 없이 집무실을 나선 이안은, 디아나와 오크 경비병의 뒤를 따라 복도를 되돌아갔다.
“이안 님…!”
목각 인형처럼 걷던 루시아가 홱 고개를 돌린 건 중앙 통로를 반쯤 지나치던 때였다. 낮은 목소리와 달리 눈을 잔뜩 치켜뜬 채였다.
“방금 들은 얘기대로면, 우리 계획에-”
“나중에.”
나지막이 말을 자른 이안이, 보는 눈이 많다는 뜻으로 주위를 한차례 돌아보고는 루시아와 눈을 맞췄다.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나누자, 루시. 눈도 잠깐 붙이고, 배도 채우고. 무엇보다….”
그의 시선이 앞서 걷는 디아나의 뒤통수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목욕부터 하고 나서.”
“…뜨거운 물? 그게 얼마나 번거로운지 알고나 하는-”
홱 뒤를 돌아보며 내뱉던 디아나가 멈칫했다. 이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고 있어서일 터였다.
“가능은 하단 말이군.”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