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02
402화
광검의 길이는 본래의 검날보다 아주 조금 더 긴 정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어쨌건 백금의 발톱이 완전히 꺼진 상태는 아니었다.
미련 없이 몸을 돌린 이안이, 최하층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단숨에 달리기 시작했다.
“…….”
넘실대는 망령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저 너머로 카르미엘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꾸득- 꾸드득-
놈은 이제야 변신을 거의 끝마친 상태였다.
두개골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몸통이, 놈의 하반신을 대신하며 기둥처럼 솟아 있었다.
덕분에 지팡이를 움켜쥔 놈의 상반신은, 여전히 이안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솟아 있었다.
절그럭- 절걱-
수많은 두개골로 이루어진 놈의 하반신이 뱀이라도 된 것처럼 꿈틀댔다. 그 아래의 마차에 똬리까지 틀고 있는 것을 보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빨리 내게 도달할 줄이야….”
이안을 내려다보던 놈이 탄식을 흘렸다. 지금까지 그의 움직임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놈이 마법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지금 놈은 이안에게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것이다.
절그럭- 절걱-
대답 대신 최하층으로 달려 내려간 이안을 맞이한 건, 마주 달려오는 수십 마리의 망자들이었다.
그 사이에는 심지어 마차를 끌던 뿔 달린 유령마 두 마리도 섞여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골격만으로도 평범한 말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저건 못 타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의 금빛 눈동자가 다시 놈들 너머의 카르미엘에게로 향했다.
고- 오오오-
놈의 하반신을 구성하는 두개골들이 일제히 암녹색 마력을 머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혼돈이 섞인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응집됐다.
마력이 일렁이는 지팡이를 치켜들며, 카르미엘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제 너는 더이상-”
“망령이나 더 내보내는 게 좋을걸.”
이안이 말을 자른 건 그때였다.
저 위, 카르미엘의 안광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매가 설핏 휘어졌다.
“너만 필살기를 쓰고 있던 게 아니거든.”
“…그게 무슨.”
콰르릉-!
카르미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오는 망자들의 한복판으로 샛노란 뇌전이 내리꽂혔다.
콰치치치칫-!
뒤이어 벼락이 집중 호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망자들이 산산이 터져 나가고, 달려오던 유령마들이 바들대며 땅에 처박혔다.
“아, 아니…?!”
뇌전에 휩쓸린 카르미엘의 주문이 흩어졌다. 놈이 내뱉는 경악성이 굉음 사이로도 메아리쳤다.
어느새 마차 인근의 망령들이 전부 터져버린 것이다.
콰과과과-
샛노랗게 과열된 주문 회로가, 도시 구역의 몇 배는 더 빼곡하게 뇌전을 토해내고 있었다.
완전히 과부하 상태가 된 듯 스파크만 번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역시. 전혀 몰랐던 모양이네.’
목적을 제대로 달성했으니까.
누가 정신 나간 주문쟁이 아니랄까 봐. 그에게 정신이 팔려 머리 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끼아아아아아-!
망자들을 호위하듯 넘실대던 망령들이 소스라치게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카르미엘의 근처에 도착한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의 전신에는 흐릿한 금빛이 아른거리는 바람까지 휘몰아치고 있었다.
콰치치치칫-
어느새 피뢰침처럼 뇌전을 다 빨아들이는 카르미엘을 올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망령이 다 떨어졌나 보군.”
“……!”
뼈만 남은 얼굴에도 경악과 두려움이 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으며, 이안은 힘껏 땅을 박찼다.
쿠- 확-!
용의 마력으로 늘어난 근력과 민첩성. 거기다 증폭된 바람 칼날이 힘껏 등을 떠밀면서, 이안은 포탄처럼 카르미엘의 몸통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백금의 진노가 활성화 중인 지금, 다른 공격 주문을 사용하는 건 무의미했다.
심지어 카르미엘에게는 상태 이상만 유발할 뿐, 실질적인 타격은 전혀 입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안은 지금까지처럼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그러나 마법사답지는 않은 방법을 선택했다.
육탄 돌격.
쩌저적-!
왼손 손등이 타는 듯이 뜨거워 지면서, 백금 방벽의 주위로 여섯 장의 새로운 방벽이 눈부시게 피어났다.
그 너머로 몸을 웅크리며, 이안이 카르미엘의 굵은 몸통에 충돌했다.
콰- 지직-!
증폭된 백금 방벽이 놈의 하반신을 구성한 두개골들을 으깨버리며 깊숙이 틀어박혔다.
“……!”
카르미엘의 몸이 크게 휘청댔다.
이안이 충돌한 순간 뇌전의 소나기가 더는 떨어지지 않게 됐지만, 곧바로 여파를 떨쳐내지는 못했을 터였다.
‘…역시. 물리 방어력은 딱 보이는 그대로네.’
생각하며 몸통과 함께 기울어지던 이안이, 오른팔을 아래로 떨치듯 힘껏 휘둘렀다.
카가가가각-
황금빛 마력이 맺힌 칼날이 온갖 형태의 두개골들이 빼곡하게 이어 붙은 몸통을 가르며 지나쳤다.
칼날을 타고 치솟은 바람 칼날도 절삭력을 더했다.
콰드드득-!
검날이 반대편 끝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휘청대던 카르미엘의 몸이 완전히 쓰러지고, 두개골로 이루어진 몸통이 결속력을 잃고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안이 왼팔을 떨치듯 휘두르며 일어선 건 거의 동시였다. 그가 놈의 몸통 위를 내달렸다.
와르르르-
그의 발이 닿을 때마다 두개골 더미가 위태롭게 허물어졌다.
하지만 요정이나 수인에 가까운 균형 감각과 육감을 가진 이안은,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빠지는 일 없이 계속해서 나아갔다.
두개골 무더기 사이로 널브러진 리치의 모습을 발견할 때까지.
“놈…!”
이안을 발견한 카르미엘이, 놀란 듯 안광을 휘청대며 지팡이를 쥔 왼팔을 내뻗었다. 반사적인 반응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놈이 뭔가 주문을 완성하는 것보다, 이안이 검을 휘두르는 게 몇 배는 더 빨랐다.
콰직-!
카르미엘의 뼈만 남은 팔뚝이 맥없이 잘려나갔다. 동시에 이안이 백금 방벽을 내리찍었다.
콰드드득-!
방패 날이 푸른 두건 망토 아래, 카르미엘의 척추 한복판을 그대로 부숴버렸다.
그 반동으로 카르미엘의 상반신이 살짝 튀어 올랐다. 그대로 오른손의 검을 놔버린 이안이, 놈의 안면을 움켜쥐었다.
터억-
놈의 두개골에서 안개처럼 번진 마력이, 이안의 손등을 뚫고 흐릿한 얼굴의 형상을 이뤘다.
지금 놈의 얼굴에 새겨진 감정은 간단했다. 공포.
“진정… 진정 네가 나의 죽음이군….”
쩌적, 놈의 두개골에 균열이 번졌다.
공포는 빠른 속도로 체념으로 바뀌었다.
카르미엘의 흐릿한 시선이 공동의 천장으로 향했다. 스파크가 곳곳에서 튀는 진언 회로의 빛이 잦아들고, 도시를 뒤덮던 뇌전의 소나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간발의 차인가… 그래… 흐흐….”
이안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리치를 잠시 내려다 보았다.
게임에서는 아주 어려운 보스에 속하는 놈이었을 터였다.
본래라면 수천의 망령과 불사의 망자 군단. 까다로운 부단장들과 놈의 주문 지원까지 받으며 싸워야 했을 테니까.
아마도 게임에선 늑대들과 함께 싸우고도 여러 번 도전해야 겨우 물리칠 수 있었으리라.
“그래. 내가 네 죽음이지.”
물론, 그런 감흥은 찰나에 불과했다.
백금 방벽이 빛무리와 함께 증발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이안이 처음부터 내내 쥐고 있던, 손날 방향으로 움켜쥔 단검이 드러났다.
이안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느낀 듯, 카르미엘이 읊조렸다.
“이곳이 내 유랑의-”
이안은 놈의 유언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단검을 힘껏 내리찍었을 뿐이었다.
콰직-!
놈이 목에 건 펜던트의 암녹색 보석 한복판으로.
***
“위! 머리 숙여요!”
소리친 루시아가 왼손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던 샛노란 불꽃을 내던졌다.
콰르르르- 퍼엉-!
지붕 위의 올빼미에게 날아들던 망령이 날아든 불길에 휩쓸려 터져 나갔다.
머리 둘 달린 언데드가 손을 내뻗은 루시아를 향해 달려든 건 거의 동시였다.
콰직-! 빠각!
하지만 옆의 오크가 휘두른 도끼 창이 놈의 두개골을 부숴버리는 게 더 빨랐다.
휘청대는 망자의 몸을, 반대편의 난쟁이가 휘두른 망치가 산산조각으로 날려 버렸다. 망치가 지나간 궤적을 따라 금빛이 아른거렸다.
“뒈져라! 이 역겨운 망자들아!”
“북부의 초인에게 영광을-!”
수비대는 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성공적으로 망자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사상자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부상자의 숫자도 그 정도에 불과했다.
빠직-! 콰드득-!
물론 그들의 힘만으로 만들어낸 기적은 아니었다.
최상층을 둘러싼, 깨질 때마다 계속해서 다시 피어오르는 역장의 장벽과 쏟아지는 금빛 벼락. 그리고 그들의 몸에 서린 용의 가호가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였다.
상황이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루시아였다.
“어…?”
더는 몸속으로 용의 마력이 흘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퍼석-!
최상층을 감싸고 있던 역장들이 일제히 부서져 흩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런 미친…?”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챈 몇몇 요정들이 경악성을 터뜨리는 가운데.
절걱- 절그럭- 절걱-
망자들이 일제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시발…! 물러나지 마!”
“덤벼라-! 이 더러운-”
놀란 와중에도 수비대가 저마다 무기를 치켜들며 소리치던 그때.
끼아아아아-
모든 망자의 두개골에서 청록색 망령들이 치솟았다. 망자들이 달려오던 그대로 와르르 허물어지고, 도시 상공으로 흩어지는 망령들의 귀곡성이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수비대를 덮친 건 그저 형태를 잃은 뼛조각들 뿐이었다.
“…….”
“……?”
그리고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수비대가 긴장과 당황이 뒤섞인 눈빛을 교환하는 사이.
“이안 님…!”
이번에도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루시아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안 님이 이기신 거예요!”
“……!”
이어진 외침에 눈을 치켜뜬 수비대가, 그제야 우르르 루시아를 따라 달려나갔다. 문 옆에 기대 있던 부상자들조차도 낑낑대며 그들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루 엔테르 맙소사….”
광장 너머의 계단 앞에 멈춰선 루시아가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지하 도시는 말 그대로 지하 무덤처럼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어둑어둑한 도시를 차근히 훑어가던 그녀의 시선이, 이윽고 최하층의 뼈 무덤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리치가 걸치고 있던 두건 망토를 노획 중인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안이었다.
“미친… 정말 혼자서… 저 마족을….”
“이것이… 북부의 초인….”
뒤따라 온 이들의 크고 작은 탄성이 번지는 가운데, 루시아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비대가 탄식과 경탄을 멈추지 않은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런 미친… 내가 대체… 저런 괴물한테 무슨 배포로….”
그중에는 물론, 디아나도 있었다.
그녀가 탄식하는 건,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른 부분 같긴 했지만.
“…….”
수비대를 발견한 듯, 이안이 도시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오른손에 쥔 검을 허리춤으로 되돌린 그가 한쪽 어깨에 망토를 휙 걸치며 걸음을 옮겼다.
‘무사하신 것 같네.’
엉망이 된 계단을 휙 뛰어오르는 그를 내려다보며 내심 읊조린 루시아가 걸음을 재촉했다.
우르릉…!
공동 전체에 번지는 울림과 함께 지축이 한차례 흔들린 건, 이안과 수비대가 한 개 층만을 사이에 두었을 때였다.
“아, 아니…?”
“이게 무슨?!”
멈춰선 루시아가 간신히 자세를 다잡는 가운데,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한순간 완전히 어두워졌던 장내에 다시 흐릿한 빛이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대체 왜…?”
루시아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과 벽면을 뒤덮은 진언 회로의 빛이 위태롭게 잦아들고 있었다.
쿠르릉… 쿠릉…!
또 한 번, 이번에는 훨씬 더 큰 울림과 진동이 도시를 뒤덮었다. 쩍, 하는 어디서 번진 건지 알 수 없는 섬뜩한 소리도 뒤를 이었다.
“이런 미친….”
그제야 몇몇 이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특히 난쟁이들이 그랬다. 루시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뭔데요. 왜 이러는 건데요?”
“마력을 너무 많이 소진한 거요.”
난쟁이 하나가 내뱉었다. 붉은 수염, 코르보였다.
두 칸 뒤에 선 그가 루시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 지하 도시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
비로소 루시아의 눈도 찢어질 듯 커졌다. 곧 이 지하 공동이 무너질 것이며, 그들 모두가 매장되리라는 뜻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피, 피해야 돼.”
“나는 여기서 안 죽어… 나는…!”
“성…! 성으로 가야 해! 거기 가족들이-!”
수비대 사이에 삽시에 혼란이 번졌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생사가 오가는 전투 중이면 모를까.
지금은 안도하고 긴장이 풀려있지 않았던가.
“저기, 다들 우선 진정을….”
그들을 돌아보던 루시아가 더듬대던 그때.
솨아아아….
뒤편에서 문득 빛이 번졌다.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장내가 어두운 지금은 충분히 선명하게 느껴지는 변화였다.
멈칫한 루시아가, 다시 계단 아래 쪽을 돌아보았다.
“이안… 님…?”
그녀의 눈동자에, 마찬가지로 멈춰선 채 왼손을 위로 치켜든 이안의 모습이 가득 맺혔다.
주위를 밝히는 빛은, 그가 치켜든 손에서 번지고 있었다.
“저, 저게 무슨….”
“대전사…?”
뒤늦게 변화를 깨달은 이들이 하나 둘씩 다시 이안을 돌아보는 가운데.
슈아아아-
이안의 손아귀에서 터져 나온 금빛 파장이, 원을 그리며 동굴 전체로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