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07
407화
먹다 남긴 소시지를 집어 들며, 이안이 내뱉었다.
“정확히 어떤 놈들인데.”
“아키하타라. 이나스 커글… 어쩌면 다르마라자도. …시발.”
문득 덧붙인 디아나가 다시 평화를 되찾으려는 듯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셨다.
식어버려 너무 짜진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이안이 읊조렸다.
“권역이 서로 맞닿은 지역인 거군….”
“정말 히케드 전하께서는… 가장 위험한 곳에 앞장서 백성들을 지키고 계시군요….”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나 디아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말 들었던 그대로… 변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야 전하니까 당연히….”
읊조리던 디아나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루시아가 그녀의 입에서 궐련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
눈을 끔뻑인 디아나가, 손을 내밀고 있는 이안을 바라보며 숨을 멈췄다. 연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금고 있으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안은 그녀의 그런 행동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궐련을 받아 들면서, 루시아의 눈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성녀께 따로 들은 이야기라도 있는 거냐?”
신의 사도인 덕에 나이에 비해 훨씬 더 어려 보이긴 했지만. 화로의 성녀가 히케드의 혈육이리라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것이다.
“많지는 않아요. 이복 남매셨고, 그런데도 늘 살갑고 따스하게 대해 주셨다더군요. 주위를 늘 평온하게 하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는. 만인을 아우르는 빛 같은 분이셨다고도 하셨었고요. 그래서 더 아깝고 슬프시다고….”
궐련을 입에 문 이안을 바라보며 말한 루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정도가 전부예요. 나머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책에서 읽은 거고요.”
“만인을 아우르는 빛이라….”
그자의 능력과 관련이 있는 말인가…?
이안이 내심 읊조리며 연기를 내뿜는 사이, 숨을 참고 있던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분명 그런 분이시지. 하지만 다시 뵙고 싶지는 않았어. 가능하다면 평생. 솔 브린의 폐허 요새도… 그런 곳 중 하나였고….”
“…가고 싶지 않은 지역이 더 있나보군.”
이안이 넌지시 내뱉었다. 식탁 옆에 놓아두었던 술병을 다시 앞으로 가져오는 채였다. 디아나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당연히 있지. 고립된 바다 인근이나 죽음의 사막 같은… 끔찍한 이야기만 들리는 장소들….”
낮은 한숨이 이어졌다. 근본적인 회의감이 밀려드는 듯한 얼굴이었다. 반도 남지 않은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너한테 싸움을 강요하진 않을 테니까.”
“…정말?”
“그래. 네 역할만 충실히 한다면. 그리고 용무가 끝나면 돌아 가. 잡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네 말만 조심하면 되겠어. 어차피 그건 내가 보살피는 게 아니니까.”
“그건 네 역할이 맞는데.”
“뭐라고…? 시발….”
눈을 동그랗게 떴던 디아나가 체념의 탄식을 흘렸다. 다시 궐련 한 모금이 간절해진 듯한 얼굴이었다.
“마수 전마를 돌보는 게, 전투에 참여하는 것보단 안전할 것 같은데. 안 그래?”
낮게 코웃음 치며 덧붙인 이안이, 앞으로 궐련을 내밀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디아나가, 이윽고 궐련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해 보도록 하지.”
“좋아.”
미소 지은 이안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푹 쉬도록 해라, 루시. 쓸데없이 힘쓰고 다니지 말고.”
루시아의 녹색 눈을 마주 본 그가, 술병을 집어 들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여길 떠나고 나면, 편안한 휴식과는 꽤 오랜 시간 작별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럴게요.”
루시아가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포크를 들어, 접시에 놓인 햄을 보란 듯이 푹 찍어 드는 채였다.
***
솨아아-
빗소리 같기도 파도 소리 같기도 한 울림이 전신에 번졌다.
이안은 자신이 흑백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세상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끝없이 펼쳐진 그림자의 땅. 흑백이 넘실거리는 하늘이 수많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휘몰아쳤다.
‘내가 어쩌다 여기에 왔지?’
굳어진 채 그 두렵고도 비현실적인 광경을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생각했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 뿐이었다.
솨아아….
그때, 저 멀리에서 빛이 번졌다. 흑백의 세계라서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보랏빛. 그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꿈틀대며 번지는 빛만이 선명했다.
솨아아….
다른 방향에서 빛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자줏빛이었다. 보랏빛과 달리 스멀스멀 번져 나갔다.
공통점은 아주 크고 밝게 보인다는 사실 뿐이었다.
곧 다른 곳에서 붉은 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듯 번졌다.
두근… 두근….
또 다른 곳에서 짙은 남색이 번졌다. 이 네 개의 빛은 동떨어져 있지만, 서로에게 완전히 멀지는 않았다.
적어도 반대편에서 파도치듯 번지는 짙은 녹색의 빛보다는 서로에게 가까웠다.
두근… 두근…
전신을 뒤흔드는 듯한 울림이 조금씩 점점 더 커지는 가운데, 흑백의 세상을 물들이며 또 다른 불길한 색들이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처음에 연달아 피어오른 빛들에 비하면 훨씬 옅고 작았지만. 어쨌거나 별처럼 반짝였다. 불경한 별들이 뜬 밤하늘 같기도 했다.
두근- 두근-
울림이 점점 더 크게 번졌다. 그제야 이안은 자신의 전신에서도 보랏빛이 번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다. 보랏빛 사이로 다른 색들이 흐릿하게 뒤섞여 아른거렸다.
‘그래… 혼돈의 정수가 갑자기 공명하기 시작했었지.’
이안이 비로소 기억하는 그때, 저마다의 색으로 일렁이던 빛들이 연기 같은 빛무리를 토해내며 번지기 시작했다.
먼저 치솟았던 밝은 빛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영역을 퍼뜨리며 서로를 향해 흘러들었다.
동시에 타는 듯한 갈증과 갈망이 느껴졌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삼켜 버리고 싶은.
솨아아-
그 순간 흑백의 세상이 먹물처럼 번지며 모든 빛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두근대는 울림만이 선명하게 이어졌다.
“…….”
그리고 이안은 눈을 깜빡였다.
울림은 어느새 씻은 듯 사라진 뒤였다.
등에 기대앉은 벽면의 감촉이 느껴졌다. 천장의 창문으로 흘러드는, 평소보다 부산스러운 도시의 소음도.
이제 익숙해진 난쟁이 저택의 벽면을 잠시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걸 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네.’
잊은 줄도 모르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아서였다.
그동안은 꿈에서 보았고, 깨어난 순간 잊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방금처럼 혼돈의 정수가 갑자기 공명하며 환영을 보여준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카르미엘을 죽이고, 그 과정에서 정수가 놈의 혼돈을 일부 빨아들여서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일어났거나.
이안은 벌써 흐릿해지고 있는 기억을 억지로 붙잡았다. 별빛 같던 온갖 불경한 색의 빛들.
그게 무엇인지 유추하는 건,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안 님.”
방에서 루시아가 걸어 나온 건 그때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이 녀석을 돌아보았다.
“떠날 채비를 벌써 다 끝냈네.”
루시아는 완전히 무장한 상태였다. 난쟁이 장인들이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수리해준 장비들.
“식당에 들러야 하거든요.”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가 손에 들고 있던 잿빛 두건 망토를 뒤집어썼다. 처음 만났을 때 디아나가 착용하고 있던 것과 비슷한 두건 망토였다.
“음식과 물을 준비해 준댔어요.”
덧붙인 녀석이 바닥에 놓여 있던 금속 보관함 앞에 주저앉았다. 뚜껑을 여는 녀석을 바라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나한테서 뭔가 느껴지지 않았어? 빛이 보인다던가.”
“아니요…? 그런 건 못 전혀 못 봤어요.”
가죽 수통들을 꺼내던 루시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혹시,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아니야. 아무것도.”
고개를 저은 이안이 오른손을 내려다 보았다. 손가락의 검은 반지, 요그는 미동도 없었다.
하필 또 이럴 때 자고 있다니. 입맛을 다신 이안이, 녀석을 빼서 앞으로 내밀었다.
“가지고 가. 나한테 전해야 할 말이 있으면, 이 녀석을 깨워서 시켜.”
“네. 그럴게요.”
가죽 수통을 안아 든 채 일어선 루시아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안이 녀석의 중지에 요그를 끼워 넣었다. 최근 들어 종종 이런 식으로 써먹어서인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다녀올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루시아가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의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탁 위는 환영을 보기 직전의 상태 그대로였다.
빈 술병과 모래시계. 그리고 뚜껑을 열어 둔 소형 보관함과 그 앞의 양피지까지.
드드득-
석문이 열리는 가운데, 이안은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황녀, 세라스에게 받았던 마법 전서였다.
전서 끝에는 그가 쓴 짧은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살아 있음.
드라그 벨가에 도착해 짐을 푼 직후에 써 둔 글귀였다.
시간이 꽤 지났건만, 답장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
역시. 마법 전서끼리도 내부에서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리라.
문이 다시 닫히는 가운데, 이안은 미련 없이 마법 전서를 접어 보관함 안에 넣었다.
이안은 깔끔하게 다시 정리된 내부를 확인하고는 뚜껑을 닫았다.
그대로 휙 보관함을 아공간에 넣은 그가 옆의 모래시계로 손을 뻗었다.
끼릭- 끼릭-
이안은 모래시계 상단의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손잡이 아래의 태엽 장치들이 차례로 돌아갔다. 모래가 거의 다 떨어진 유리관이 천천히 뒤집혔다.
붉게 표시된 태엽의 눈금은, 어느새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몇 칸을 더 이동한 상태였다.
‘떠돌아다닌 시간까지 합치면… 벌써 한 달이 훨씬 넘었네.’
어쩌면 두 달 이상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균열의 가장자리를 걸을 때처럼, 때때로 시간의 흐름이 모호해지는 순간이 있지 않았던가.
만약 그렇다면 벽 바깥의 대륙은 네 달에서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을 터였다.
‘그래도 아직 침식의 여파를 잠재우느라 바쁘겠지.’
물론, 백금룡은 그딴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가 예상보다 빠르게 벽을 무너뜨리리라는 근거 없는 예감이 들었다. 사실, 이제는 거의 확신으로 바뀐 예감이었다.
‘그럼 남은 시간은 아마도….’
생각하며, 이안이 손잡이를 돌리던 손을 멈출 때였다.
쿵… 드드득-
벽면 너머에서 둔탁한 소리가 번지더니, 뒤이어 다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무 가면을 뒤집어쓴 채, 꺼림칙한 눈길로 좌측을 돌아보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반토막들이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이안.”
문이 완전히 열리자, 비로소 이안을 마주 본 디아나가 내뱉었다.
드디어. 내심 읊조린 이안이 턱짓했다.
“그럼 서 있지 말고 들어 와.”
“아니. 난 각하를 뵈러 가야 돼. 부탁하실 일이 있다더군. 분명히 늑대들과 관련된 거겠지.”
“그러던가. 그래서, 늑대들은 어쩌고 있지?”
“준비 중이지. 창고도 신나게 털고 있고. 들릴 텐데.”
도시가 평소보다 소란스러운 건, 푸른 늑대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서였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손에 들고 있던 모래시계를 그녀에게로 던졌다.
“네가 가지고 다녀. 때 되면 잊지 말고 돌리고.”
낚아채듯 받아든 그녀가, 손잡이를 허리춤에 묶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깨뜨리지 않으려면, 절대 싸우지 않아야겠네.”
“길이나 터라, 귀쟁아. 미적거리지 말고.”
“그래. 볼 일 다 봤으면 빨리 꺼지라고.”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휘어지던 디아나의 눈매가 구겨졌다. 짧게 혀를 찬 그녀가 이안을 눈에 담았다.
“이것들이랑 볼일을 다 보고 나면, 아래에서 보자. 이안.”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자, 디아나가 곧바로 휙 몸을 돌렸다.
뒤이어 기다렸다는 듯, 코르보를 필두로 한 난쟁이 장인들이 장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저마다 천으로 꽁꼼 감싼 물건들을 들쳐 메거나 품에 안은 채였다.
그들의 퀭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포장까지 하다니. 정성스럽게도 준비했군.”
“대전사께서 쓰실 물건이잖습니까.”
코르보가 대답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들어온 난쟁이가 문을 닫았다. 난쟁이 일곱이 서 있으니 방 안이 꽉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풀썩 웃은 이안이 덧붙였다.
“또 직접 입혀 주려고?”
난쟁이 장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보가 장비를 감싸고 있던 천을 풀며 덧붙였다.
“이리 오십시오. 그, 거지발싸개 같은 옷은 전부 벗어 버리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