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21
421화
“반대편…?”
이안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대답한 건 디아나가 아니라 발텐이었다.
“이나스 커글의 권역은, 솔 브린의 남동쪽에 맞닿아 이어져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상당히 먼 거리죠.”
시체를 훑던 그의 샛노란 안광이 다시 이안에게로 되돌아왔다.
“이 북쪽 인근에 위치한 건 다르마라자의 권역입니다. 아키하타라의 하수인들이 때때로 발을 들인 게 전부였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입니다.”
이안은 이제야 아까, 발텐이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깊이 고뇌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곳에 존재할 리 없는 적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심지어 격렬한 전투의 흔적까지 남아 있었으니, 생각이 많아지는 게 당연할 터였다.
“…이미 대마족들 간의 전쟁이 시작된 거군요.”
이윽고 루시아가 내뱉었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도. 그리고 이번 전쟁은, 놈의 하수인들이 이기고 있는 모양이네.”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한 루시아를 슬쩍 일별한 그가 덧붙였다.
“이 인근까지 밀고 올라올 정도로.”
“이제야 조금씩 보여요…. 죽은 건 대다수가 다르마라자의 권속들이에요.”
루시아가 차근히 주위의 시신들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거예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휩쓸고 다녔다면… 그 과정에서 다르마라자의 통제에서 벗어난 하수인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겠어요.”
“그런 놈들을 마족들이 끌고 온 거겠군….”
말을 받으며, 이안은 드라그 벨가에서 보았던 환영을 또다시 떠올렸다. 역시. 마족들의 전쟁은 그때 이미 시작되었던 게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게임에서는 그보다 늦게 시작되었을 것 같지만.’
그가 벽을 넘은 뒤에 만들어 낸 변화와 혼돈의 파장이, 놈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 언젠가 일어나게 되었을 거대한 흐름을 가속화한 것이다.
“다르마라자의 세력이 밀려나고 있겠군요. 지금 이 순간에도….”
루시아가 덧붙인 말에, 발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시는군요.”
“…결국, 이대로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는 상황 아닌가?”
이윽고 이안이 내뱉었다. 발텐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현상만 놓고 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확신할 순 없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대리전쟁이 반복되었지만, 이런 상황은 일어난 적이 없으니까요.”
“없다고…?”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얼굴의 절반을 가린 가면 위, 루시아의 눈매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죠? 전쟁이라면, 유불리가 반드시 존재했을 텐데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어느 한쪽이 완전히 무너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세력마다 한계점이 명확한가 보군.”
이윽고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읊조렸다. 발텐의 노란 안광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예. 부키키아가 고립된 바다 인근을 떠나지 못하듯. 야나르 타쉬가 죽음의 사막에만 머물고 있듯이 말입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은 슬쩍 디아나를 일별했다.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 인근의 대마족들은 그보다 덜하지만, 제약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발텐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지식을 전부 알려 주리라 작정한 것 같은 태도였다.
내심, 이미 앞으로 함께할 동료로 여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누군가 우세를 점하더라도 상대를 끝까지 몰아붙이는 건 쉽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적 제약을 극복하는 것보다, 또 다른 세력의 공격을 받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심지어….”
다시 이안의 눈을 마주 본 그가 덧붙였다.
“이나스 커글의 권속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겨지던 것들입니다.”
“어째서?”
“놈의 권속은 아주 강하고 빠릅니다만, 숫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권역을 차근히 늘려가며 전진할 정도의 여유도 없을 테니, 기세가 빠른 속도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대는 놈들이 좋아하는 환경이 아닌가 보군.”
이안이 덧붙인 말에, 발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몸을 숨길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이곳까지 진출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혹시.”
잠깐의 침묵 끝에,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은 예전과는 다른 게 아닐까요? 대리전쟁이 아니라든가.”
맥이 탁 풀려 있던 디아나의 눈을 한순간 더 크게 만들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발텐 역시, 일렁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전쟁은 우리들의 최후의….”
“…놈의 하수인들이 약점을 극복할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르지.”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발텐의 안광이 슬며시 가늘어졌다.
“제가 알기로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만….”
“그럼 이 마경 자체가 뭔가 달라졌거나. 뭐.”
이안이 무책임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얘기야. 상황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물론, 이안은 각자의 소굴에 처박혀 있다는 대마족들이 다시 전장에 나오지는 않았으리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게임의 대마족들은 하나하나가 던전 보스급이 분명했으니까.
그런 놈들이 필드로 튀어나온다면 클리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제아무리 고인물이라도, 온갖 마수와 마물. 권속들이 끝없이 달려드는 가운데 그런 초월적인 괴물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설사 히케드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모든 대마족을 죽이는 것보다 사자와 늑대들이 전멸하는 게 빠를 터였다.
“흐음… 하긴. 놈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면, 세상이 이렇게 고요할 리 없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발텐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은 하나하나가 법칙을 비틀어 버릴 정도의 존재들이니까요.”
“대마족은 존재만으로도 권역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루시아가 읊조리는 사이, 이안의 뇌리로 요그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번졌다.
-그래 봐야 실패한 것들일 뿐이지….
또 혼자만 알아듣게 떠드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발텐을 돌아보았다.
“솔 브린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겠소? 이런 상황이라면….”
하지만 발텐은 뜻밖에도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계신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만에 하나 전하께 변고가 생겼다면 제가 바로 알게 되었을 겁니다.”
아, 그래. 믿는 구석이 있어서 여유를 부린 거란 말이지.
이안이 내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발텐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행군을 서두르긴 해야 할 것 같군요. 군단은 선공을 취하는 법이 없으니, 아직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말머리를 돌린 그가, 어느새 저만치에 물러나 있던 늑대에게 손짓했다.
“본대로 복귀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덧붙인 그가 늑대를 향해 말을 몰았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마주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가, 느슨하게 허리를 감싼 디아나의 팔을 조이듯 콱 끌어당겼다.
“출발할게요. 디아나.”
“…그래.”
짧은 대답을 끝으로 디아나는 다시 침묵에 잠겨 들었다.
가면의 눈구멍 너머, 가늘게 뜬 녹색 눈동자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힘이 없었다.
‘이나스 카글이란 놈이랑 뭔가 악연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스러운 눈빛인 루시아와 시선을 교환한 이안이,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삐를 쥐었다.
먼저 털어놓는 거라면 모를까.
좋지 않은 기억일 게 분명한 이야기를, 굳이 꼬치꼬치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 외에도 고민할 거리는 차고 넘치게 많았다.
***
자욱한 안개 속을 서행하며 기다리던 늑대들은, 발텐이 선두로 나서자 곧바로 다시 속도를 높였다.
균열의 가장자리를 걸은 것은 아니었다.
안개를 따라 구릉지 중심부를 선회해, 본래 이동하려던 동남쪽으로 빠져나간 게 전부였다.
‘방위를 어떻게 가늠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길을 잃거나 경로를 이탈하지 않은 건 분명했다.
짐마차에 전마가 여럿 붙은 덕분에, 행군 속도에도 자연스럽게 탄력이 붙었다.
식량을 비롯한 보급 물자와 병장기. 푸른 늑대와 이안의 전리품.
그리고 부상자들까지 가득 실은 마차들을 중심으로, 늑대들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구릉지대를 가로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느낌이 좋지 않아.”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던 디아나는, 모래시계를 뒤집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요정치고는 다소 낮은 목소리에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또 왜.”
그녀를 슬쩍 일별한 이안이 모른 척 내뱉었다. 낮은 한숨을 내쉰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혼자 아무리 멀리까지 나가도, 이렇게까지 두더지 굴이 그립진 않았었거든. 분명 또 뭔가 일이 꼬여서 빨리 돌아갈 수 없게 될-”
“디아나.”
“…응?”
루시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자르자, 멈칫한 디아나가 눈을 깜빡였다.
뒤이어 뒤를 돌아본 루시아가, 디아나의 눈을 마주 보며 내뱉었다.
“침 빨리 뱉어요. 삼키지 말고.”
“침을…? 왜…?”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루시아가 재촉하듯 덧붙였다.
“부정 타는 말만 하고 있잖아요. 잘못하면 이루어진다고요.”
“……!”
눈을 치켜뜬 것도 잠시. 이윽고 재빨리 가면을 얼굴 위로 치켜든 디아나가 옆으로 침을 탁 뱉었다.
그제야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쉰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언제 위험해질지 모르는 상황에선, 방금 같은 말은 특히 위험해요. 반대로 절대 죽지 않겠다거나, 반드시 살아 돌아가겠다거나 하는 식의 말도요.”
“…사원에서 배운 지식이야?”
디아나가 조금은 맹한 말투로 물었다. 잠시 멈칫한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물론 미신이라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대가를 치렀어요.”
“…허.”
“디아나까지 그렇게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친구를 잃는 건 사절이라고요.”
표정조차 변하지 않고 말한 루시아가, 자신의 가면을 살짝 내리며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다.
찰진 소리를 내는 녀석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안이, 결국 입가에 옅은 실소를 머금었다.
‘저게 루시야 미구엘이야….’
한순간 녀석에게서, 수염이 덥수룩하고 험악하게 생긴 용병 출신 사제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고, 붉은 머리의 여기사를 떠올릴 때만큼 그립지도 않았다.
“친구…?”
다른 의미로 루시아를 바라보던 디아나가 이윽고 물었다.
다시 뒤집어쓴 가면의 콧잔등을 꾹꾹 어루만지면서, 루시아가 되물었다.
“왜요? 난 디아나를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는데요. 아닌가요?”
“어…? 아, 아니….”
화들짝 눈을 깜빡인 디아나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내 그녀의 가면 아래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숨소리가 번졌다.
“그래… 친구가 생긴 건 오랜만이어서.”
“드라그 벨가에 잔뜩 있잖아요. 난쟁이들이 디아나를 아주 좋아하던데요.”
“두들겨 패고 싶은 거겠지. 나도 그렇고.”
“다 큰 어른들이 왜 그렇게들 솔직하시지가….”
디아나와 루시아의 대화가 한동안 두런두런 이어졌다. 솔 브린이나 대마족과 관련된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은 채였다. 아마도 루시아의 배려일 터였다.
둘의 대화를 백색 소음 삼아 때때로 쓰고 짠 육포를 우물대던 이안의 앞으로, 이윽고 내리막이 펼쳐졌다. 좌우로는 적당한 높이의 능선이 완만한 계곡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시야가 조금 트이면서, 자연스럽게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
그의 심드렁하던 눈매가 설핏 꿈틀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하늘은 여전히 온갖 색들이 뒤섞인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게 선명한 잿빛에 가까운 회색과 불길한 붉은색이,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주 조금씩 달라져서 이제야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 변화였다.
‘저 회색이, 그냥 먹구름이 아니었다는 건가…?’
생각하던 이안이 멈칫했다. 과거에 저것과 비슷한 색을 본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가 입을 열었다.
“그 이나스 커글이라는 놈 말이야.”
“……!?”
속삭이듯 이어지던 루시아와 디아나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디아나가 멈칫 굳어지고 루시아가 고개를 돌리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혹시, 수인 출신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