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22
422화
“…….”
디아나가 대답 대신 이안을 물끄러미 돌아보는 가운데.
“맞아요.”
그녀를 일별한 루시아가 재빨리 내뱉었다.
“…제가 알기로는요.”
“역시 그랬나….”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하긴. 그저 일부가 마족의 편에 선 거라면, 모든 수인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까지 나빠질 리 없었다.
‘물론 요정들이 수작질을 잔뜩 부린 탓도 있겠지만….’
타락자나 변절자는 인간이나 요정도 많았고, 심지어 난쟁이와 오크 중에도 있었다지 않던가.
일족 전체에 꼬리표가 붙으려면, 대마족이 탄생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터였다.
“전쟁의 시대에 악명을 떨쳤고, 공허로 유폐된 토착신을 숭배하던 광전사라고 해요.”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녀석의 가면 주위로 숨결 같은 마력의 아지랑이가 번졌다.
“이 이상은 저도 잘 모르지만요. 대마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담긴 문서들은, 대부분 대교회에서 관리하며 보관 중이거든요.”
“…크룩시카.”
나지막이 덧붙인 건 디아나였다.
“수인들은 그 고대 정령을 버리고 개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제국의 일원이 되었었지.”
멈칫한 루시아가 놀란 듯 뒤를 돌아보는 가운데.
“전쟁 초기, 제국이 패퇴를 거듭하던 때. 놈은 자신을 따르는 수인 전사들을 이끌고 최전선으로 자원했다더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을 배신했지.”
디아나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나무 가면 너머에서 혀 차는 소리가 번졌다.
“놈들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거야. 자신들의 신을 공허로 유폐한 제국과 교단을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우습게도, 수인들이 개종한 건 그놈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더군.”
“흐음….”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는 눈빛.
“그리고 제국군을 밀어내는 데에 앞장섰다더군. 내가 고향을 떠나 전방으로 왔을 때, 놈은 이미 악명을 떨치는 마족이었지. 광란의 마수. 식인 광전사. 잿빛 도살자….”
이안은 오랜 시간 함께했던. 그에게 꼬리를 맡겨 두고 떠난 주황색 눈의 수인 여전사를 떠올렸다.
수인들은 마족들의 편에 선 동족도, 그저 뜻이 다를 뿐이라 여겼다던 그녀의 말도.
‘…아무리 그래도, 식인 광전사 같은 이름이 붙을 정도면 손절하는 게 맞지 않나.’
내심 읊조리며 입맛을 다신 이안이 내뱉었다.
“놈을 직접 본 적도 있나?”
“…그래. 멀리서 한 번. 크룩시카의 화신 같았지. 나는 놈이 살육을 벌이기 시작한 걸 보고 바로 도망쳤어. 그 덕에 살아남았고.”
“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여차하면 튀고 보는 건, 그때부터 몸에 익은 습관인지도 몰랐다.
디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가 아주 운이 좋았다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됐지. 그놈에게 새로운 별명이 붙었으니까.”
“뭐… 였는 데요?”
루시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디아나가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을 마주 보며 내뱉었다.
“요정 학살자.”
“……!”
“남부의 수인들이 외곽으로 쫓겨난 걸 알게 된 것 같더군.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인 놈들이 처형된 것도. 아마, 놈의 손에 죽은 누군가에게 들었겠지.”
“맙소사…. 그게, 요정들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여긴 거군요.”
루시아가 탄식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 다른 예비 타락자들이 합류하지 못하게 하려면 필요한 과정이었지. 하지만 놈의 생각은 달랐을 거야.”
…그래. 적어도 양쪽 다 서로를 동족이라 여기긴 했나 보네.
내심 읊조리며 쓴웃음을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을 텐데.”
“…원로회의 야심을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놈들이 자초한 결과야. 그 말하는 짐승들은,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공공연하게 그놈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니까. 멍청한 것들….”
혀를 찬 디아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덧붙였다.
“그딴 소리나 지껄이다 결국 어떻게 될지는 생각도 한 적 없는 거겠지. 애초에, 그놈이 제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그럴 일도 없었어. 반대로 남부에서의 입지가 더 공고해졌겠지. 그 망할 짐승들은, 아주 잘 싸우니까.”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그 구실을 제공한 게 이나스 커글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교단과 황실의 최정예들이 투입되고 전황이 역전되자, 놈은 한동안 사라졌었지. 물론 정말 그런 건 아니었어. 빈틈을 노려 기습하는 방식을 택했을 뿐. 그렇게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늘 자신의 흔적을 남겼고.”
“흔적… 이요?”
루시아가 불길함을 느낀 듯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오늘따라 유독 무기질적으로 느껴지는 목조 가면 너머로, 디아나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지를 토막 내 돼지처럼 만들거나 피부를 벗겨 장대에 걸어 놓더군. 풀리지 않게 결박해서. 기습당한 이들 중에 요정이 있다면… 반드시 요정을 대상으로 했지.”
“세상에….”
루시아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녀석의 가면 주위로 아지랑이 같은 한숨이 번졌다.
“…나도 몇 번 봤어. 그런 몰골이 되고도 살아있던 자들도 있었지. 아마, 처음엔 전부 살아있었을 거야.”
가면의 눈구멍 사이, 디아나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우리 손으로 고통을 덜어 줘야 했어. 이렇게 된 게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 안도하면서….”
목소리와 달리, 디아나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만큼은, 이나스 커글을 향한 증오보다 두려움이 더 커 보였다.
“아마 그렇게 죽은 요정만 수백 명은 될 거야. 그리고 곧, 교단이 놈을 대마족으로 규정하더군. 공식적으로 크룩시카의 화신이 된 거야. 성기사와 사제. 마법사를 여럿 죽이고 잡아먹은 결과였겠지.”
그녀의 시선이 칙칙한 어둠에 휩싸인 주위로 돌아갔다.
“그 뒤엔 너희도 알다시피….”
완만한 내리막을 그리며 이어진 인근은 여전히 척박해서, 나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때때로 보이는 나무도, 마경 외곽 지역처럼 앙상했다.
“끝나지 않는 밤이 시작됐지.”
“…….”
디아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일행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저 전마들의 발굽 소리와 그르렁대는 듯한 숨소리. 그리고 루시아가 때때로 목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번질 뿐이었다.
이유 모를 희미한 불쾌감에 이안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시간 죽이기로는 적당한 얘기였군… 재미있었어.
요그가 뒤늦게 키득댔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은, 맥이 풀린 듯 앉아있는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그가 툭 내뱉었다.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나?”
“복수…?”
되물으며 이안을 돌아본 디아나가, 곧 옅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런 생각은 버린 지 오래야. 지금은 살아남을 생각뿐이거든. 살아남아서, 반드시-”
“디아나. 그 말은 안 돼요.”
루시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멈칫한 디아나가 돌아보자, 루시아가 엄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그런 말은 속으로만 간직해요. 부정타니까.”
“…그래. 큰 실수를 할 뻔했네.”
미구엘이 보면 뿌듯해하겠네.
진지한 둘을 보며, 이안은 헛웃음을 삼켰다.
디아나가 방금 한 말이 반만 진심이라는 것도 눈치챈 채였다.
정말 복수에 대한 미련을 전부 털어 버렸다면, 이나스 커글을 언급할 때마다 그런 눈빛을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물론, 그런 사실을 굳이 꼬집을 필요는 없었다.
“그 뒤엔 어떻게 됐지?”
대신 이안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디아나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 뒤…?”
“검은 벽이 솟은 뒤.”
“…아. 한동안은 뭐, 처음과 같았지. 다들 머잖아 이 마경이 무너지리라 여겼으니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한참이 지나서고.”
“마족들의 전쟁도… 그 한참 뒤부터 시작된 건가요?”
루시아가 덧붙였다. 목이 칼칼한 듯 또 한 번 목을 가다듬는 채였다. 디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진 몰라. 그때쯤엔 우리 쪽에도 문제가 잔뜩 생기고 있었으니까. 모두가 한계였지. 전하께서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결국 다 죽었을 거야.”
“그런 용단을… 내리셨었군요.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요.”
루시아가 감탄한 듯 읊조렸다. 자칫하면 명예와 권위를 모두 잃을 수도 있는 결정이 아닌가.
“아무도 전하를 비난하지 않았어. 오히려 감사히 여겼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던 장군들을 죄다 닥치게 만드셨으니까.”
어깨를 으쓱인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한참 뒤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셨어. 그리고 직접 후방을 순회하며 혼란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정리하셨지. 여러 거점이 그때 만들어진 거야. 그 후로도 몇 개가 더 생기고 사라졌지만.”
“너도 그때 전방을 떠난 거군.”
이안이 덧붙였다. 디아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론 그렇다고 희망이 생기진 않았지. 이미 너무 많은 목숨을 잃었으니까.”
디아나가 낮은 코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땐, 모두가 곧 죽게 될 줄 알았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렇게 되지 않더군.”
“마족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한 거군요.”
“그래. 광기 때문인지, 우리가 독 안에 든 쥐 신세라 여겨서 눈을 돌린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깨를 으쓱인 디아나가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우리는 가장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 각자 살아남을 기반을 다질 시간을 벌었지.”
“순교 원정대도 넘어오기 시작했겠고요.”
“맞아. 그들… 그리고 그들이 가져오는 물자가 없었다면 버티기 어려웠을 거야. 그건 지금도 그렇고.”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황실과 교단이 순교 원정대가 정말 이쪽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져서였다.
적어도 기쁨의 미소는 아닐 터였다. 원정은 대의명분일 뿐, 실상은 형벌에 불과했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네요. 덕분에 살아남아서,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됐으니까. 어쩌면 마족들이 공멸할지도 모르고요.”
루시아가 덧붙인 말에, 디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좋겠네. 이번 전쟁은 뭔가 다른 것 같으니까. …하긴. 이나스 커글이 균형을 깨뜨리는 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네. 이미 전적이 있으니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요?”
멈칫한 루시아가 되물었다.
가면 너머, 디아나의 한쪽 눈매가 씰룩였다.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리고 있는 것이리라.
“소문으로 들었지. 놈은 이곳에 요정이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 같더군.”
“……?”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시. 이내 루시아가 눈을 치켜떴다.
“설마, 흑요정들이요?”
“그래. 그 비겁한 변절자들이 모여 사는 숲이 있었어. 거길 쑥대밭으로 만든 것 같더군. 그리고 아예 눌러앉았다지.”
“그럼 남은 흑요정들은?”
북부 전선에서 마주쳤던 놈을 떠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놈들이 전멸하진 않았을 텐데.”
“도망친 놈들은 뿔뿔이 흩어졌어. 아마 저들끼리도 의견이 갈린 거겠지. 놈들은 각기 다른 대마족의 하수인이 되었지. 일부는 떠돌이가 됐고. 아직 살아있을지는 모르지만, 있다 해도 광기에 잡아 먹혔을 거야.”
대답한 그녀가 싸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변절자들에게 어울리는 비루한 최후라고 할 수 있지. 놈들이 그렇게 되기 전엔, 제 발로 제국을 배신하고 떠난 녀석들도 제법 많았거든.”
“그랬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디아나는 그들을 비웃을 자격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도망 다닐지언정, 유혹에 넘어가거나 긍지를 져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지금 국경은 그때 그대로인 거예요?”
루시아가 덧붙였다. 녀석이 뿜어내는 마력의 아지랑이가 가면 주위로 일렁였다.
“아니. 알다시피 마족들이 저들끼리 싸우면서 세력을 줄여 줬으니까. 대마족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됐고.”
디아나가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놈들의 권속들은 세력을 불리다가 광기에 잡아먹혀 사라지거나, 저들끼리 죽이면서 다시 줄어드는 걸 반복했지. 전하께선 그 틈에 조금씩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셨고.”
“되찾았다기엔, 국경의 구멍이 지나치게 크고 많던데.”
이안의 말에, 디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인력도 자원도 부족하니까. 아마 전하도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느끼고 계시겠지. 지금 상태에서 더 전진하지 않으신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안은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들이 살아남은 비결도. 대마족들이 하나도 죽지 않은 이유 역시 확실히 알게 되어서였다.
동시에 발텐이 왜 그렇게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는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마족들 간의 균형만 무너진 게 아닌 것이다. 그 저울에는 이들도 함께 올라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일수록 무너졌을 때의 여파도 큰 법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젠 모르지. 이번 전쟁은 뭔가 다르니까. 거기다 지원 물자도 잔뜩 있고….”
이내 덧붙인 디아나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무엇보다, 북부의 초인까지 합류하셨으니까.”
누가 누굴 이용하는 건진, 두고 봐야 알게 되겠지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도착해도 쉴 틈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그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내리막은 한참 전에 끝이 났고, 지금은 황량한 평지였다. 좌우로는 어둠에 잠긴 민둥산들이 이어졌다.
“변화가 일어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저 휩쓸려 떠내려갈 뿐일 테니까.”
“나는 그 전에…. …아니야. 또 부정 타는 말을 할 뻔했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디아나가 입을 다물었다. 백금발 아래, 자신의 창백한 목덜미를 꾹꾹 어루만지는 채였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번 침묵은 길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뭔가 불쾌해요.”
“……?”
루시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은 것이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녀석이, 슬며시 미간을 좁힌 채로 덧붙였다.
“혼돈의 불순물을 토해낼 때와 비슷한 느낌이에요. …물론, 그때만큼 괴롭지는 않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