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27
427화
“아마도.”
이안이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정말 그런지는, 만나봐야 알겠지만.”
루시아가 그와 같은 결론을 도출한 건,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본래도 영특한 녀석인 데다, 발텐을 만난 이후론 비교적 노골적인 상황들도 여럿 펼쳐지지 않았던가.
생존자들을 만난 이후로 느껴온 의문들이 전부 해결되는 해답으로 귀결되었을 터였다.
“…제가 알기로 그런 게 가능하려면, 최소한 필멸의 굴레는 벗어나야 해요. 빛의 아들이, 끝내 어둠의 존재로 거듭나고 만 거예요.”
루시아가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이고는 허리를 숙였다.
강철 장화와 정강이 보호대를 딱 맞게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전하는 여전히 고결함을 잃지 않으신 것 같더군요. 우리가 봐 온 모든 것들이 증명하듯이요. 어쩌면 전하께서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던 녀석이, 잠시 머뭇거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이안 님과 비슷한 상태이신 건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꽤 합리적인 추론이라 생각하며, 이안이 덧붙였다.
“그분과 달리, 나는 전혀 고결하지 않지만.”
발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를 잠시 바라본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안 님도 그래요. 공허의 유혹과 광기에 물들지 않고, 반대로 혼돈을 다스리고 계시잖아요. 본질을 잃지도, 굴레를 벗으려 하지도 않으시고요.”
“글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새로운 초월자 후보생이 된 것 같다만.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이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각반 좌우로 손을 가져가는 채였다.
“전하께서도 그러신 게 아닐까 싶어요. 흑기사들이 이성을 유지하는 것도, 그 덕분이고요. 어쩌면… 전하께서 타고나신 능력이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르고요.”
“뭐, 확실하진 않지만. 고대 신을 섬기시는 것 같진 않더군.”
그랬다간 놈들의 영향으로 영혼이 서서히 뒤틀릴 테니까.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괴물이 되어있어야 했다.
이안은 발텐이 뿜어내던 검푸른 어둠을 떠올렸다.
밖에서는 본 적 없는 색이었다.
아마 공허에서 받아들인 혼돈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인 것이리라. 역천룡이 그랬듯이.
인간도 그럴 수 있다는 건 이제야 알게 된 참이었다.
물론, 이안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고대 신이 개입 중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문제는 벽이 무너진 뒤예요. 황실과 교단이 전하와 이쪽의 생존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해졌으니까요.”
루시아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분명 이들을 타락자로 규정할 거예요. 발텐 경의 반응으로 봐선, 이들도 황실과 교단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고요.”
“감정이 좋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요….”
루시아의 얼굴은 걱정보다는 암담해 보였다.
해결할 방법이 없는, 감당할 수 없는 난제를 마주했기 때문일 터였다.
이대로는 벽이 무너지더라도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럼 뭐, 전하께선 흑태자라 불리게 되시겠군.”
하지만 이안은 심드렁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이 둘로 나뉠 게 걱정되어 평생 이곳에서 살다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개인에 불과한 그가, 그런 거대한 그름을 완전히 바꿔 놓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히케드를 죽여버리는 선택을 한다 해도 그럴 터였다.
‘오히려 확실히 종교가 되겠지.’
그는 북부의 초인이자 백금룡의 대행자가 아니던가.
히케드는 순교자가 될 것이며, 성인. 어쩌면 신으로 추앙받을지도 몰랐다.
생존자들은 기꺼이 그의 유지를 이어 받을 터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 땅의 생존자를 전부 죽이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게 가능한가는 둘째 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훌륭한 살인마라 해서, 학살자가 되는 것까지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안이 보기엔 이들은 오히려 피해자에 가깝지 않던가.
벽을 무너뜨리고 탈출해야 하는 입장에서, 거대한 흐름이 무너지는 것까지 감수하며 이들과 대립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황실과 교단을 위해서는 더더욱.
“흑태자라… 세상에.”
탄식하듯 읊조린 루시아가, 이내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미 제국이 둘로 나뉘리란 사실을 받아들이신 거군요.”
“그보단, 지금 생각해 봐야 달라질 것도 없다고 보는 거지.”
비스듬하게 걸친 허리띠까지 왼손이 닿게 편하게 조율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장은, 벽을 무너뜨리는 게 우선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히케드가 꽤 훌륭한 지도자이며 말이 통할 만한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된 건 큰 소득이었다.
지금 히케드가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잘하면 빚까지 잔뜩 지운 채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옳은 말씀이세요. 그러려면, 전하의 도움이 필요하겠고요.”
“정확히는 이들의 도움이지. 남은 시간 안에 벽을 무너뜨리려면 꽤 급진적으로 움직여야 할 테고. 그러려면….”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계속 지금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를 해야 돼. 전하의 명령에 따르게 되는 게 아니라.”
“…네. 어떤 생각이신지,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루시아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사도와는 거리가 먼, 아주 현실적인 눈빛이었다.
…나랑 미구엘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이 넌지시 덧붙였다.
“그런데, 디아나는?”
“떠날 채비를 하러 세렌 경과 함께 갔어요. 전 이안 님을 모시러 온 거고요.”
“…아, 그래. 나만 준비하면 끝나는 거군.”
“다들 아직 준비 중일 거예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아냐. 다 끝났어.”
이안이 목을 이리저리 꺾어 뼈 소리를 내며 말했다.
전신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제는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켜주는 감각이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서인지 머릿속이 맑고 몸이 아주 가벼웠다.
“궁금하네. 수인 대마족도 꼬리를 자르면 얌전해 지는지.”
읊조리며 망토를 팔뚝을 가리게 당긴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확인해 보러 가자.”
“넵…!”
루시아가 냉큼 몸을 돌렸다.
…천천히 하라더니.
내심 웃음 지은 이안이 녀석의 뒤를 따랐다.
***
앞장선 루시아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침침한 통로를 거침없이 나아갔다.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마주치는 늑대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났다.
“…….”
“…….”
그들은 이안과 루시아를 마주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좌우로 물러나 섰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한쪽 주먹을 흉갑에 얹은 채였다.
흑사자와 비슷한 대우라기보다는, 아예 다른 세력에서 온 귀빈으로 대우하는 것 같았다.
아마 세렌과 나눴던 대화가 전파된 것이리라.
“또 봐요. 부적 고마워요.”
별 반응 없이 걸음을 옮기는 이안과 달리, 루시아는 눈이 마주치는 이들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건넸다.
늑대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붙임성이 좋다니까….’
그들이 들어왔던 출입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문 바깥에 모여선 이들을 눈에 담던 이안이, 목에 걸어 두었던 가면을 주섬주섬 걸치고 있는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다들 아직 준비 중일 거라며?”
“어차피 늦었는데, 조금 더 늦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요.”
뻔뻔하게 내뱉은 루시아가 두건을 눌러썼다.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말고삐를 쥔 둘이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나란히 출입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온 건 가면을 쓴 백금발의 요정이었다.
“보기 좋네.”
디아나를 바라본 이안이 넌지시 덧붙였다. 그녀가 몸에 걸친 장비들은 거의 다 새로운 것들이었다.
가죽에 얇은 철판을 덧대고, 안감에 주문 회로가 잔뜩 새겨져 있는 보호구들.
가고 싶지 않아 했던 주제에, 창고는 제일 많이 털어 온 것이다.
“…내 몸에 잘 맞는 게 많아서 어쩔 수 없었어. 잘 맞는데 안 걸칠 수는 없잖아.”
디아나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내뱉었다.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누가 뭐래? 보기 좋다는 건데. 내가 잘 골라 뒀다 싶네.”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더군. 평소에도 눈여겨 봐왔나 보지.”
“뭐, 보이니까.”
“……!?”
가면 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본 디아나가, 이내 말을 이끌고 홱 몸을 돌렸다.
…또 왜 저래.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끔뻑였다. 루시아가 쪼르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둘은 같은 말을 탈 예정이었다.
이내 미련 없이 시선을 돌린 그가, 그 뒤에 멈춰선 자신의 흑마 쪽으로 다가갔다.
“굳이 직접 배웅하실 필요는 없는데….”
흑마의 고삐를 쥔 건 발텐이었다.
말을 올라타기 좋게 옆으로 돌려 놓은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든 아쉬움을 달래고 싶어서 말입니다. 두 분을 전하께 안전하게 모셔야 하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별말씀을. 덕분에 편하게 왔소.”
이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험악한 겉모습과 그렇지 않은 태도는, 여전히 꽤나 이질적이었다.
평소엔 오크를 만날 때가 아니면 느끼기 어려운 감흥이었다.
“설마, 마갑도 경이 직접 입히셨소?”
뒤이어 흑마로 시선을 돌린 이안이 덧붙였다.
흑마의 전신에는 이안이 고른, 거무튀튀한 빛깔의 마갑이 덮여 있었다. 머리와 몸통뿐만 아니라, 다리에까지 딱 맞는 판금이 겹겹이 감겨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고작해야 반나절 남짓 쉬었건만.
흑마는 기운이 넘치는 듯 콧김을 뿜고 있었다.
“……?”
기운만 넘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흑마를 훑어보던 이안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내 말이 맞소?”
본래도 크고 우람했지만, 확실히 훨씬 더 덩치가 커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콧잔등 위부터 정수리까지. 칼날 같은 뿔들이 사슬로 좌우를 이어 붙인 머리 갑주 사이로 삐죽삐죽 돋아나고 있었다.
심지어 아직 돋아나는 중인 것 같아 보였다.
“성자 대행의 말이 맞습니다. 사실, 저도 놀랐습니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하는 건 처음 봤으니까요. 머잖아, 진정한 마수 전마의 주인이 되실 겁니다. 오로지 성자 대행만을 모시는.”
“…그때까지 잘 살려야겠군.”
혼돈력을 먹여서 그런 건가.
내심 읊조린 이안이 등자를 밟고 안장 위로 올랐다. 허벅지 사이로 느껴지는 몸통의 감촉이 확실히 더 묵직하고 단단했다.
그에게 고삐를 건네며, 발텐이 덧붙였다.
“최고의 동반자가 되어 줄 겁니다. 제 엘리자베스가 그렇듯이요.”
“…경의 전마의 이름이, 엘리자베스였소?”
“저는 주로 리자라고 부르죠.”
거, 취향 한번 고풍스럽네.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고삐를 당겼다. 흑마가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
“무사히 전하를 뵙고,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성자 대행.”
주먹을 흉갑에 얹은 발텐이 문득 말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보겠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말하건데….”
흑마가 말머리를 돌리는 사이, 이안이 고개를 돌려 발텐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에 잡아먹히지 마시오.”
“……!”
안면 가리개 사이의 노란 안광이 순간 커졌다.
아주 잠깐이었다. 이윽고 발텐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흑마가 발텐을 등진 채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비로소 열린 대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루시아와 디아나를 태운 전마가 행렬의 끝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
“…….”
행렬은 열 명쯤 되는 중무장한 늑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 같이 가면의 한쪽 눈매에, 길게 가로지르는 흠집이 새겨져 있었다. 우두머리급의 최정예 늑대들이 동행하는 것이다.
그들이 탄 전마의 안장 좌우에는 보급 물자가 담긴 가방이 각각 하나씩 묶여 있었다.
저들은 전투보다는 물자 보급을 위해 동행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끝에, 완전히 변이된 마수 전마에 탄 세렌이 그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왼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쿠… 구구구구….
진동과 함께, 요새의 다리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안이 루시아와 디아나의 전마와 나란히 멈춰섰다.
늑대들에 이어 이안까지 차례로 일별한 세렌이 입을 열었다.
“균열까지 쉬지 않고 달릴 예정입니다. 뒤쳐지지 마십시오.”
이안과 루시아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침음한 건 루시아의 뒤에 탄 디아나뿐이었다.
마수 전마의 고삐를 움켜쥔 세렌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녀의 전마가 달려나갔다.
늑대들. 그리고 어느새 전마를 다루는 데 제법 익숙해진 루시아가 그 뒤를 따랐다.
“…….”
온갖 색이 뒤엉킨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이안도, 이윽고 고삐를 후려쳤다.
크릉…!
앞발로 땅을 긁고 있던 흑마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나갔다.
혼돈과 광기가 가득한, 대마족의 권역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