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3
043화
아겔 란 왕성, 외곽 첨탑.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난간 앞에, 레지스 브란트 공작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감은 눈꺼풀 너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고, 지팡이를 쥔 손끝이 움찔댔다.
불룩 튀어나온 미간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번진 핏줄이 꿈틀댔다.
그는 지금 도시의 구석구석을 인식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랐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색의 파장과 냄새, 소리로 넓은 공간을 동시에 인식했다.
마경을 열며 손에 넣은 초감각.
그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사냥개들을 통제했다.
비명과 공포가 가득한 것과 달리, 성벽 밖의 희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레지스의 섬세한 안배였다.
그는 아겔 란이 완전히 무너지길 바라지 않았다.
백성들은 도시의 밀알. 희생은 공포와 분노가 그들의 영혼에 각인될 정도면 충분했다.
그의 주요 목표는 오히려 내성의 귀족들과 그들의 가신들이었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거나,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한 수였다.
버차드 후작까지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최후가 멀지 않았다고까지 여겼건만.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길은 열리는 법이지.’
이 광기의 밤이 지나면, 소수에 불과했던 그의 추종자들이 다수의 편에 서게 되리라.
“큭큭…….”
레지스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이 번졌다.
메브 리우렐이 떠올라서였다.
가장 거슬리는 변수가 되어 돌아온, 티르 엔의 종년.
초감각으로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 좌절과 절망 속에 파묻혀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왕국의 수족들을 죄다 잘라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문이 거의 다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 이만하면 추종자들의 복수도 충분히 해 준 셈이었다.
물론 자신이 그린 그림을 망친 대가는 아직 받지 않았다.
그 종년의 영혼과 사냥개들은, 그가 모시는 신에게 조공으로 바칠 생각이었으니까.
그만하면 마경을 열고 권능을 물려받은 대가로도 충분하리라.
“……!”
순간 레지스의 눈매가 꿈틀댔다.
또다시 외성 밖의 거슬리는 존재가 느껴진 탓이었다.
무언가가 외곽 지역을 오가며 사냥개들과 싸우고 도망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엔 메브인 줄 알았으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저렇게 민첩하지 않았다.
물론, 대단한 놈은 아니었다.
레지스는 외곽의 사냥개들에게 놈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어차피 사냥개들에겐 사냥감이 필요한 법이었다.
레지스의 종양처럼 튀어나온 미간이 터질 듯 꿈틀댔다.
이토록 많은 사냥개들을 통제해 본 것은 처음인지라, 제어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마경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힘이었다.
지금은 단지 하룻밤에 불과하지만.
언젠가 왕국 전체를 신께 바치고 영원히 이 권능을 손에 넣을 것이었다.
그때라면 그 역시 능히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때가 온다면, 제국을 상대로도 참된 진리를 설파할 수 있을 터.
“그 빌어먹을 년만 없어지면… 더 이상 나를 막을 자는….”
중얼거리던 레지스의 입이 닫혔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툭 튀어나온 미간이 핏줄과 함께 잦아들고, 초감각이 흩어졌다.
레지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첨탑 아래의 광경이 펼쳐졌다.
“열어 줘! 열어 달라고!”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아, 아아악!”
굳게 닫힌 성벽을 울부짖으며 두드리던 뒤늦은 대피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몇 마리의 사냥개들이 헐떡이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필멸자란 어쩌면 저토록 하찮은가.
레지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 가운데.
“공작 각하.”
병사가 첨탑으로 들어섰다.
언제 미소 지었냐는 듯 침통한 표정으로, 레지스가 고개를 돌렸다.
병사가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런 위험한 곳에 계십니까. 각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많은 이들이 무너질 것입니다.”
“재앙이 닥치지 않았나. 찬란한 여신의 종이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지. 방금도 누군가의 가족이 성문을 두드렸네. 왜 문을 열지 않았는가?”
“폐하의 명이십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해서,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다른 귀족 나리들도요.”
“그래. 함께 돌아가세. 위험한 것은 자네 홀로 남아도 마찬가지일 테니.”
병사가 계단을 가리켰다.
극진한 태도. 레지스는 사양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좁은 복도와 몇 개의 방을 지난 그는,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대회관에 들어섰다.
외곽과 통로를 따라 친위기사단과 병사들이 늘어선 가운데, 모여 앉은 피난민들이 쑥덕대고 있었다.
추종자 몇과 시선을 교환한 레지스가 상석의 왕좌로 향했다.
그 위에 걸터앉아 짜증과 초조함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내고 있는 놈이 바로, 어윈 아치볼트 브란트. 그의 조카이자 국왕인 어윈 2세였다.
형님의 피만 물려받았을 뿐인 한심한 놈이라 생각하면서도, 레지스는 특유의 자비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폐하. 찾으셨습니까.”
“숙부. 밖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국왕이 그를 올려다봤다.
머리 위, 사슴뿔을 엮은 형상의 왕관이 촛불의 불빛을 따라 금빛으로 일렁였다.
“각 성벽의 병사들이 분투 중입니다. 마물들도 성벽을 기어오르지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백성들은… 찬란한 여신께서 가호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빌어먹을… 왕국의 수도에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다니. 소문이 퍼지면 아겔 란이 약해졌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번 일을 극복하면 오히려, 왕국의 저력을 입증하시게 될 겁니다. 날이 밝으면, 저주의 근원을 찾아 뿌리 뽑으시지요.”
“그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가더군요. 숙부의 혜안이 필요합니다.”
“혜안이라면, 어떤…?”
국왕이 손짓했다.
이쪽을 곁눈질하던 몇몇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다시 해 보시오.”
국왕이 명했다.
고개를 숙인 귀족이 입을 열었다.
“소신은, 이번 일의 배후에 리우렐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는?”
“전대 가주인 버논 리우렐이 어둠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바. 또한, 메브 리우렐 경은 왕국의 분란을 조장하고 망상증에까지 빠졌습니다. 끝내 검은 벽의 광기를 불러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레지스의 하수인인 자였다.
몇몇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인 자들이 더 많았다.
국왕의 표정까지 확인한 레지스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허나 리우렐 경은 엄정한 여신의 사도로, 아겔 란을 대표하는 성기사요. 또한 비통에 잠긴 누이이며, 리우렐가는 대를 거쳐 왕국에 충성한 명가이지.”
“…….”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좌중을 돌아본 레지스가 내뱉었다.
“하물며 본인이 요청한 회의를 앞두고,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단 말씀이시오?”
“진정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에 리우렐가의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단 말씀이십니까? 또한, 폐하의 방패이신 리우렐 경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필시 어딘가에서 저주받은 마물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그만.”
국왕이 손을 들어 레지스의 말을 잘랐다.
“숙부의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만. 내 귀에는 저들의 말이 아예 허무맹랑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리우렐 경이 돌아온 이후로 아겔 란에 불길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친위 기사를 의심하다니, 어리석은 놈.
생각하면서도, 레지스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오나 폐하….”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요. 이 빌어먹을 밤이 지나간 후에,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혀내어 리우렐 경의 명예를 되찾도록 도와주면 될 일입니다.”
“…….”
레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국왕이 덧붙였다.
“조사는, 숙부께서 맡아 주세요. 정말 리우렐 경이 무고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내 진심으로 사죄하고 더 언급하지 않을 테니.”
“…….”
내 뜻에 반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멍청한 놈. 그래서 고맙구나.
내심 웃음 지은 것과 달리, 레지스는 고개만 숙였다.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고, 몇몇 친위 기사들의 눈에 소리 없는 불안이 스치던 그때.
“심려치 마십시오, 폐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좌중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 온 대회관의 입구로 향했다.
국왕과 레지스도 마찬가지였다.
“소신이 왔나이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촛불 아래, 전신 갑옷 차림의 기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저년이 어떻게 여기에…?’
레지스의 눈빛이 가라앉는 가운데.
국왕이 미간을 좁혔다.
“경. 하나 묻겠네. 어떻게 성안으로 들어온 것인가?”
“정문으로 들어왔습니다, 폐하.”
메브의 모습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사냥개들의 검은 피를 전신에 뒤집어쓴 형상.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갑옷에 맺힌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잿빛 가죽 갑옷을 걸친 사내가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단 한 사람도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메브에게서 기이할 정도로 불길한 존재감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의 주변에 타락자들이 도사리고 있사온데, 신이 어찌 폐하를 홀로 남겨 둘 수 있겠사옵니까?”
“타락자들이라니… 아직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저벅, 저벅-
메브는 왕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이윽고 대회관의 입구에 멈춰 섰다.
새 부리 형상의 안면 가리개가 느릿느릿 장내를 훑었다.
“보이지 않으십니까? 아겔 란을 혼란에 빠뜨리고도 이곳에 태연하게 숨어,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리는 자들이요.”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었으나, 국왕의 귀에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레지스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저년이, 진정 미친 것인가?’
그의 눈매가 순간 꿈틀댔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서늘한 시선이, 일순간이지만 그에게서도 멈췄었기 때문이다.
…설마. 정말 다 안단 말인가?
그가 속으로 읊조릴 찰나.
“허나 심려치 마옵소서. 소신이 이곳에 왔나이다.”
메브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점점 인상을 구기던 국왕이 내뱉었다.
“경,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가문의 식솔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천천히 일어선 메브가 대답했다.
“모두 죽었습니다, 폐하.”
“…….”
국왕이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짓는 가운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켜보시옵소서, 폐하.”
스르릉….
메브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소신이 이 자리에서, 타락자들을 뿌리 뽑겠나이다.”
“뭣… 이라?”
비로소 국왕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장내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휘몰아쳤다.
창을 쥔 병사들의 손이 가늘게 떨리던 한순간.
“리, 리우렐 경이 정말 미쳤다! 우리를 전부 다 죽일 셈이야!”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피난민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폐, 폐하! 폐하를 모셔라…!”
레지스가 뭔가 입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가 소리쳤다.
친위기사단의 일원. 메브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메브에게 압도되어 있던 그가, 뒤늦게 자신의 소임을 떠올린 것이다.
여섯 단원이 거의 동시에 국왕을 향해 달려갔고, 남은 기사들도 검을 뽑았다.
병사들의 떨리는 창끝이 메브를 겨누기 시작한 가운데.
솨아아-
가슴 앞에 모아쥔 메브의 검에서 붉은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불길하게 일렁이는 붉은빛이 메브의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신의 불충을,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그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레지스의 눈에 비로소 핏발이 섰다.
저 미친년이, 정말 무작정 타락자들을 쳐 죽이러 이곳에 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에 남은 전원을 죽여서라도.
***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군.’
이안은 내심 헛웃음을 지으며 메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태까지 단 한 걸음도 움직인 적이 없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메브의 존재감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었다.
복수의 사도가 내뿜는 신성력은, 단죄의 사도일 때의 그것처럼 찬란하지 않았다.
피처럼 끈적하게 흘러내리며 불길하게 타올라 증발했다.
그것이 복수의 본질이라는 듯이.
이안이 기억하는 피 흘리는 복수자의 모습, 그 자체.
그리고 그가 보기에, 그때와 같은 건 겉모습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복수를 끝내고 죽을 생각이신가 본데….’
메브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목과 어깨를 풀던 이안이, 서늘한 눈빛으로 몸을 날렸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받아야 할 보수가 남아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