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34
434화
언덕 곳곳에 널브러진 탑의 잔해를 지나치며, 히케드가 덧붙였다.
“우린 여길, 흑요정 탑이라고 부릅니다.”
무너진 탑은, 몇 개 층만 간신히 남은 상태로도 제법 거대했다.
작은 영주성 정도의 크기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탑을 둘러싼. 마찬가지로 곳곳이 무너진 낮은 성벽을 지나친 일행은, 곧 문도 없는 아치형의 출입구로 발을 들였다.
“확실히… 요정의 건축물이네요.”
늑대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장내를 돌아보며 루시아가 읊조렸다.
1층은 본래 회관 정도의 역할을 했을 원형 공간이었다. 한복판에 발목만 남은 조각상이 낮은 단상 위에 솟아 있었고, 깨지고 부서진 판석들이 평평하게 깔려 있었다.
외곽을 따라 솟은 기둥에는 이런저런 장식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금 간 부분이 많은데. 괜찮나.’
이안이 심드렁하게 생각하는 사이, 자신의 전마를 놔 버린 히케드가 덧붙였다.
“전마는 이 녀석을 따라가서 보관하면 됩니다.”
이안은 홀로 태연하게 멀어지는 전마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짐을 정리하는 늑대들 너머에는, 검은색 나무판자를 이어 붙여 만든 칸막이가 솟아 있었다. 은근한 악취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저런 걸 설치할 자재는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이안이 디아나에게 모로의 고삐를 내미는 사이, 루시아가 물었다.
히케드가 녀석을 돌아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여기 남아 있던 것들로 만든 겁니다. 이나스 커글의 권속들이 소굴을 지어 놨었으니까요. 나무 움막 같은 게 잔뜩 있었죠.”
“아하… 하긴. 전시에는 적의 물자도 이용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아를 일별하며 이안이 덧붙였다.
“그래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실 겁니까?”
“위로요.”
히케드가 검지를 위로 들었다.
이안과 루시아.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고삐를 잡은 디아나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탑의 각 층은 외벽을 따라 원형으로 이어져 있어서, 중심부는 텅 비어있었다.
‘원래는 소라빵 같은 형태였나.’
위로 갈수록 빈 공간이 줄어들긴 했지만, 어쨌건 지금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 너머로 검푸른 어둠이 일렁였다.
“우리 모습이 들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히케드가 태연하게 첨언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할 일을 다 끝내면 쉬고 있어. 눈도 좀 붙이고.”
“그웰로드 경이 안내해 줄 걸세.”
“…예.”
히케드가 덧붙이자, 고개를 숙인 디아나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위협스럽게 그르렁 대면서도, 모로 역시 나란히 그녀를 따라갔다.
이안을 돌아본 히케드가, 옆의 계단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가실까요?”
이안과 루시아는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벽면을 따라 커다란 나선을 그리며 꼭대기까지 이어졌다.
때때로 난간과 발판이 부서진 부분들이 있었지만. 이안은 물론 루시아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마족 같진 않은데.’
이안의 시선은 앞서 계단을 오르는 히케드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칙칙하게 어둠에 물든 육중한 갑옷. 허리띠 뒤편에 고정한 작은 가죽 가방이 눈에 띄었다.
‘나랑 비슷한 부류인 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안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와 함께 하다보면 결국은 알게 될 부분이었다.
“여깁니다.”
이윽고 최상층으로 들어선 히케드가, 계단 옆의 통로로 발을 들이며 내뱉었다. 어차피 계단은 몇 미터 위에서 뚝 끊어져 있었다.
‘더럽게 위험해 보이네, 진짜.’
생각하면서도 통로로 접어든 이안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지붕도 없이 뻥 뚫려 있었다. 통로 옆, 벽면을 따라 이어진 방들 역시 곳곳의 벽면이 허물어져 내부를 훤히 드러낸 채였다. 탑의 외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검은 땅에 딱 어울리는 공간이지 않습니까?”
무너진 벽면을 지나쳐 본래는 방이었을 공간으로 들어서며, 히케드가 쾌활하게 물었다.
이쪽으로 들어선 건 앞의 통로가 허물어져 있어서였다.
벽면은 물론 바닥도 곳곳이 허물어져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그는 아주 익숙하게 지나치며 외벽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선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올 일이 많지 않습니다. 황국의 첨탑들이 떠오르더군요. 거기서 내려다보는 제도는, 아주 아름다웠는데 말이에요. 여긴, 그 향수를 조금은 채워주는 장소라고 할 수 있죠.”
거, 더럽게 긍정적이시군.
무너진 벽면을 뛰어넘고 바닥의 구멍을 피해 따라가며, 이안이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어쨌건 루시아는 즐거워 보였다. 유적지를 탐험하는 기분이라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나스 커글이 그림자 숲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곳을 군단의 전초 기지로 삼으리라 결심했었습니다.”
내뱉으며 성큼성큼 나아가던 히케드가 이윽고 걸음을 늦췄다. 그들이 들어선 통로의 정 반대편이었다.
“이렇게 현실이 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말입니다.”
이 앞은 벽면이 전부 무너져서, 바닥에 벽돌과 석회 조각들이 굴러다녔다. 하지만 어쨌건 시야는 탁 트여 있었다. 탑의 외벽 역시 종아리 정도까지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가, 제가 이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양팔을 활짝 펼친 히케드가 외벽 쪽으로 다가가며 내뱉었다. 왼손에 쥔 투구를 달랑대는 채였다.
외벽 앞에 멈춰 선 그가 이안과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안과 루시아는 선선히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탑 밖의 전경이 시야 가득 펼쳐졌다.
“저긴… 그림자 숲인가요?”
일대를 훑어보던 루시아가 이윽고 물었다. 히케드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주 받은 숲이지만, 이렇게 보면 나름의 운치가 있지 않습니까?”
경치를 응시하며, 이안은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탑의 잔해가 곳곳에 널브러진 새카만 언덕 아래, 짙게 깔린 잿빛 안개가 호수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새카만 나무들이 뒤덮인 드넓은 숲 저 너머까지.
이른 새벽의 늪지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토벌 경로를 짜기에도 좋아 보이는군요.”
이윽고 읊조리듯 내뱉은 이안이, 팔을 들어 잿빛 어둠 저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가, 이나스 커글의 소굴 같으니.”
잿빛 안개가 깔린 새카만 숲 저 너머. 도시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인위적인 윤곽들이 얼핏얼핏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숲 한복판에 지어진 고대 유적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리하시군요. 성자 대행.”
빙긋 미소 지으며 말한 히케드가 일대를 한차례 훑듯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 일대의 지도가 있긴 합니다만. 실제와는 꽤 괴리가 있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육안으로 관찰하려는 의도도, 없진 않습니다.”
“우릴 이곳으로 데리고 오신 것도 그래서겠군요.”
직접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설득이 쉬워질 테니까.
이안이 고저 없이 덧붙인 말에, 마침내 그를 돌아본 히케드가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이거, 성자 대행 앞에서는 잔꾀가 통하질 않겠군요. …하지만 정말, 이곳의 경치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토벌에 성공한다면, 이 일대가 다시 우리의 영토가 될 테니까요. 물론 놈을 죽인다 해서 모든 정리가 끝나는 건 아니겠지만… 이런.”
말을 멈춘 히케드가, 이안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순서를 건너뛸 뻔했군요. 감사 인사와 보답이 먼저인데요.”
“감사는 이미 받았으니, 다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선히 대답하며 이안도 그를 마주 보았다. 루시아가 자연스럽게 다시 이안의 옆으로 다가섰다.
“사실, 지금 내심 난처해하는 중입니다. 본래는 작위와 함께 병장기를 선물해 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연 히케드가, 입가에 난처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내리는 작위나 직책 따위는, 두 분께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거든요. 이미 착용 중인 장비들도 아주 훌륭해 보이고요.”
이안은 루시아와 눈빛을 교환하며 어깨만 으쓱였다.
“어렵군요… 흠… 역시….”
콧잔등을 긁적이던 히케드가, 이윽고 뭔가 결정을 내린 듯 손에 쥔 투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른손은 허리 뒤편으로 가져가는 채였다. 허리띠 뒤편의 가죽 가방을 뒤적이는 것이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제가 가진 것 중에선 보답으로 드릴만 한 물건이 이것뿐이군요.”
그가 내민 건,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은제 보관함이었다.
이안이 가진 궐련함보다 얇고 작았지만, 표면에 온갖 금장식이 아주 화려하게 덮여있었다. 상판 한복판, 루 솔라를 상징하는 황금 원이 유독 크게 눈에 띄었다.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들었습니까?”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히케드가 보관함을 내밀었다.
선선히 받아든 이안이 보관함의 고정쇠를 풀었다. 상자는 윗면을 완전히 위로 밀어 여는 형태였다.
내부를 확인한 그의 눈매가 이윽고 설핏 가늘어졌다.
“이건…?”
안에 놓인 건 재질을 알 수 없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금속 파편이었다. 녹아내린 쇳물을 그대로 굳힌 듯한 형태였다.
다만 표면에 무지개 같은 윤기가 흘렀고, 신성력이 느껴졌다.
“어떻게…?”
신성을 느낀 듯, 곁에 선 루시아가 탄식했다. 이안이 슬쩍 팔을 내려 녀석에게 상자 안을 보여줬다.
루시아가 멍하니 읊조렸다.
“이건 대체…?”
“일곱 여신의 축복을 받은, 초대 황제 폐하의 성혈입니다.”
대답한 건 히케드였다. 이안과 루시아의 시선을 받은 그가, 태연하게 양 손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붕어하시던 순간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는데, 떨어지면서 여덟 조각으로 나뉘었다고 하더군요. 그게, 그중 하나죠.”
“태황의… 성혈…! 루 솔라 맙소사….”
멍하니 입을 벌린 루시아가 경악성을 흘렸다. 뒤이어 이안을 돌아본 녀석이 더듬더듬 덧붙였다.
“제국의… 국보에요, 이안 님…!”
그러게. 엄청나긴 하네.
이안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건, 정보창을 이미 확인하고 있어서였다.
성혈의 조각. 전설 등급의 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몇 가지 저항력과 함께 성유물이나 성흔의 신성력을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느리지만 신성력을 회복시켜 신성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인 것이다.
그가 짧게 입맛을 다신 건, 액티브 스킬에만 적용되는 효과이기 때문이었다.
‘투쟁의 축복은 예외란 거지….’
하긴. 카르하는 일곱 여신과는 별개의 존재였다. 여신들과 달리 신이 된 인간이지 않던가.
게임에서는 기사나 수행 사제용 아이템이었으리라.
이윽고 정보창을 닫은 그가, 히케드를 바라보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런 보물을, 그렇게 허술하게 가지고 다니셨던 겁니까?”
“뭐, 어쨌건 지니고 다니긴 했잖아요?”
히케드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이 다시 한번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루시아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국보를 넘기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그 정도는 되어야, 내 진심이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루시아를 내려다본 히케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었다.
“그건 사실, 내게는 이미 그다지 의미가 없는 물건이기도 합니다.”
“…….”
루시아의 눈이 순간 가라앉았다.
그러시다면야. 하고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보관함의 뚜껑을 닫을 찰나, 녀석이 내뱉었다.
“혼돈을 받아들이셨으니까요?”
“……!”
멈칫한 이안이 녀석을 돌아보았다.
히케드도 순간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루시아가 덧붙였다.
“전하께선 진정, 신들을 저버리신 겁니까? 이곳에서… 이들의 새로운 신이 되기라도 하시려고요?”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다니.
이안이 비로소 미간을 좁힐 찰나, 히케드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사제님도 정말이지, 보통이 아닌 분이시군요. 내가 청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허심탄회한 대화가 될 줄은 몰랐는데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한 그가 다시 루시아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할 질문은 아니군요. 그런 생각은, 감히 품은 적도 없습니다. 사제님.”
“…….”
“내가 혼돈을 받아들인 건, 어디까지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안은 대답하는 히케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당황했을 뿐이었던 듯, 그의 입가에는 다시 특유의 소년 같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내 부족한 능력으로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누군가 손을 더럽혀야 한다면, 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 역시 내심, 언젠가 한 번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갸웃하는 건 오히려 루시아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성혈이 아무런 의미도… 신들을 저버리신 게 아니라면….”
읊조리던 루시아가 멈칫했다.
눈을 치켜뜨며 다시 히케드를 올려다 본 녀석이, 이윽고 덧붙였다.
“전하께선, 그분들을 섬기는 자들을 등지신 거군요. 대교회를… 용서할 수 없으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