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35
435화
“등진 건 내가 아닙니다. 사제님. 저들이죠. 심지어….”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한 히케드가, 루시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우리를 이용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순교 원정이라는 이름으로. 이 검은 땅에 대한 두려움을 무기 삼아 휘두르면서 말입니다.”
“…….”
“이 땅의 백성들은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내가 그들을 다스리고 있다고는 하나, 멋대로 그들을 대신해 용서할 자격까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루시아는 히케드의 붉은 눈을 홀린 듯 응시하며 낮은 침음을 흘렸다.
‘…역시는 역시군.’
이안도 짧게 입맛을 다셨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저, 내심 아니길 바랐던 상황이 현실이 되었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루시아의 반응 역시 비슷한 맥락이리라.
“하지만 전하….”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언젠가 검은 벽이 무너진다 해도,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고 말 거예요….”
떨림을 간신히 억누른 목소리였다. 히케드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씁쓸해졌다.
“그리되겠죠. …그들이 진심으로 참회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천상의 신들이 아니라, 이 땅의 백성들에게.”
“…….”
“하지만 슬프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군요. 솔직히 말해… 내 백성들이 저들을 용서한다 한들, 저들이 다시 제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줄지도 의문입니다.”
“…그렇지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전하.”
루시아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요? 하고 되물으며, 히케드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사제님. 내가 지금 그러하듯, 사제님께서도 진실되게 답해 주세요.”
“…예. 전하.”
“대교회… 아니, 검은 땅 밖의 사람들이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뭐라 부를 것 같습니까?”
“……!”
루시아가 순간 숨을 멈췄다.
이안도 히케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말투만큼이나 여상했다. 어떤 답을 듣게 될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아마도….”
잠깐의 적막 끝에, 이윽고 루시아의 대답이 이어졌다.
“전하는… 흑태자라 불리게 되실 겁니다.”
더는 목소리의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히케드가 한 박자 늦게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흑태자요? 어둠에 물들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군요. 내가 예상한 대답은 타락자. 혹은 마족이었지만 말입니다.”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그가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적어도, 그것들보다는 듣기 좋은 호칭이군요. 마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 사제님.”
그 호칭을 붙인 장본인인 이안은 내심 헛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저걸 정말 좋아할 줄이야.
물론 루시아는 전혀 웃지 않았다. 그저 소리 없이 탄식한 듯, 가면 주위로 아지랑이 같은 숨결이 번졌을 뿐이었다.
“맞아요. 모두가 나를 그리 부를 겁니다.”
뒤이어 히케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교회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이들이. 어쩌면, 내 아우까지도.”
“전하의 아우라면….”
“리샤르. 황제 말입니다.”
“…….”
더듬더듬 되묻던 루시아의 목소리가 대번에 잦아들었다.
“그럼 이 흑태자를 따르는 백성들이 어떻게 될지는,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히케드가 그런 녀석의 눈을 차분하게 마주 보았다.
“이들이 순수를 지키고 있다 한들, 대교회는 순순히 믿어 주지 않을 겁니다. 죽었길 바랐던 이들일 테니 더더욱.”
루시아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히케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들이 참회한다면…. 그래서 내 백성들이 무사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내 목이라도 내어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루시아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 역시 피가 고인 것처럼 가라앉았다.
루시아가 나지막이 탄식했다.
“전하….”
“…이런. 내가 너무 심각해졌었군요.”
읊조리며 눈을 깜빡인 히케드가,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직 이 마경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보다 저 밖의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리거나, 이 마경이 대륙을 전부 집어삼킬 것을 걱정하는 게 현실적인 텐데 말입니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한 말이겠지만. 루시아는 오히려 더 얼어붙었다.
“…….”
이안은 눈동자만 굴려 녀석을 돌아보았다. 가면이 루시아의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저렇게 굳어버린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들켰을지도 모를 노릇이었으니까.
‘벽이 무너지기까지… 이제 1년도 안 남았겠지.’
생각하던 이안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적게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를 이어서였다.
시간 감각이 사라진 건, 사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제님. 내가 말이 과했군요.”
루시아를 바라보던 히케드가, 이윽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모든 교인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대물림해 죄를 묻지도 않을 겁니다. …또한, 두 분께 내 뜻을 강요하지도 않겠습니다.”
자책과 미안함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루시아에 이어 이안까지 일별한 그가 덧붙였다.
“끝내 나를 막겠다 해도 이해하겠습니다. 두 분은 그럴 자격도, 정당한 이유도 있으시니까요.”
이안은 진심이냐 되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지금까지 본 모습만으로도, 그가 허언을 내뱉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이안의 눈을 잠시 바라본 히케드가 이내 빙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마경을 무너뜨릴 때까지는, 서로 뜻을 함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함께 해결해야 할, 공통의 문제가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전하.”
“……!”
이안이 곧바로 대답하자, 루시아가 눈을 치켜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이대로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도 괜찮겠냐는 눈빛이었다.
‘괜찮으니까, 머리 좀 식혀.’
생각하며 슬쩍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덧붙였다.
“괜찮으시다면, 이제 그 공통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군요.”
사실, 지금은 설득 불가능한 문제로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었다.
여긴 이나스 커글의 결계 안이자, 놈의 소굴 바로 옆이 아니던가.
“바라는 바입니다. 성자 대행.”
히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미안한 듯 루시아를 일별하는 채였다.
살짝 고개를 숙인 루시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그가 낮게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었다.
“성자 대행께 나를 따르거나 도울 의무가 없으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지원 부대를 이곳까지 호위해 주신 것만으로도 아주 큰 도움을 받았지요. 하지만 염치불구하고, 또다시 어려운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군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안의 눈을 마주 본 그가, 이윽고 물었다.
“성자 대행. 대마족 이나스 커글을 토벌하는 것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이나스 커글 토벌전.
눈매가 설핏 가늘어진 건 보상만 조금 다를 뿐, 내용은 앞서 받은 사냥의 시간 퀘스트와 거의 같아서였다.
‘타락자 전용 퀘스트와 일반 퀘스트를 동시에 받은 건가…?’
물론, 사실 여부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이나스 커글을 죽이면 손에 넣게 될 보상이 늘어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물론, 거절하신다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아쉽긴 하겠습니다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히케드가, 조금 머쓱하게 덧붙였다.
“거절을 고민한 게 아닙니다.”
대답하며 퀘스트 창을 닫은 이안이, 히케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상황에 대한 정보와 전하께서 제안하실 조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조건이요…? 아하. 보답 말씀이시군요.”
고개를 갸웃 하던 히케드가, 이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정말이지, 성자 대행께선 여러 가지 의미로 놀라움을 선사하시는군요. 용병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저는 용병이 맞습니다만.”
“…예?”
이안의 대답에, 히케드가 뒤늦게 눈을 깜빡였다.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친우들을 제외하곤, 부탁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의뢰의 내용을 듣고, 합당한 보상을 책정한 뒤에 움직이죠.”
“…그럼, 이곳까지 행차하신 것도 그래서였습니까?”
히케드의 다소 멍한 대답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손에 쥔 성혈함을 살짝 들어 보이는 채였다.
비로소 다시 웃음을 터뜨린 히케드가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이제야 성자 대행께서 맺고 끊음이 확실하신 이유를 알겠군요. 정말 용병 출신이셨다니…. 하지만 차라리 잘 됐군요.”
출신이 아니라 현역이라니까….
이안이 내심 입맛을 다시는 사이, 낮게 목을 가다듬은 히케드가 입을 열었다.
“이나스 커글은 아마도, 숲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일 겁니다. 가능했다면 진작 우리를 죽이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겠죠. 이곳은 놈의 결계 안이니 말입니다.”
“그렇겠죠.”
환영을 통해 놈의 상태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안은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히케드가 탑 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이만한 크기의 결계를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길 기다리거나, 다른 사자들의 지원을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놈의 권속들이 돌아올 것을 염려하시는 거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나스 커글을 섬기는 마족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하나같이 아주 강하죠. 일부만 돌아온다 해도, 우리의 승산은 높지 않을 거예요.”
이거, 타임 어택 퀘스트였나.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게임에서는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중간 보스들이 추가되는 식이었으리라.
소위 고인물이라 불리는 자들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기다렸을지도 몰랐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현실이 된 지금은 더더욱.
“그전에 이나스 커글을 죽여야 합니다. 하지만 예상하시다시피, 늑대들을 모두 이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야성의 광기를 견디지는 못할 테니까요. 설사 견뎌낸다 하더라도, 대다수가 목숨을 잃을 겁니다.”
담담하게 말을 이은 히케드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소수의 인원만으로 숲을 돌파할 겁니다. 최단 거리를 가로질러, 놈의 소굴로 곧장 침투할 거예요. 그 과정도, 놈과의 전투도 아주 위험할 겁니다. 현재로선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만….”
그가 흔들림 없는 붉은 눈으로 이안의 눈을 응시했다.
“성자 대행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승산이 훨씬 더 높아질 겁니다.”
“…저도.”
내뱉은 건 루시아였다. 히케드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슬쩍 다시 이안의 옆으로 서며 덧붙였다.
“저도 동행할 겁니다. 전하.”
히케드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자 못지않은 전력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마다할 상황이 아니군요. 알겠습니다. 보상도, 두 분 몫으로 책정해야 하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히케드가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곧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루 바일의 병기고에는, 정화대를 비롯한 성전사단의 무구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주인을 잃거나 합당한 주인을 찾지 못한 물건들이죠. 물론, 제대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루 바일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나요?”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안은 녀석을 슬쩍 돌아보았다. 충격을 극복한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건 녀석도 당면한 상황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물론입니다. 과거의 절반도 남지 않았고, 이제는 땅속에 파묻혀 있지만. 여전히 건재합니다.”
선선히 대답한 히케드가, 루시아와 이안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지금도 훌륭한 장비들로 무장하고 계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만약을 대비한 여분의 장비는 필요하실 겁니다. 특히나 이곳에서는요. 본래는 사자들을 위한 물건이니,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이안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민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정화자의 장비가 아닌가.
역시나. 살짝 혀로 입술을 축인 히케드가 덧붙였다.
“두 분 께서 직접 돌아본 뒤에 선택하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혹시 내가 동행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한 가지만 더.”
이윽고 이안이 내뱉었다. 히케드가 말해 보라는 듯 턱짓하자, 그가 덧붙였다.
“이나스 커글을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면, 전리품을 우선 선택할 권한도 주십시오. 적어도 하나는.”
“어렵지 않은 조건이군요. 그렇게 하십시오. 그럼….”
히케드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의뢰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성자 대행?”
성혈함을 왼손으로 옮긴 이안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의뢰는 성립되었습니다. 전하.”
“그 말씀이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군요. 최선을 다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히케드가 안도하듯 미소 지었다.
‘이렇게 대놓고 좋아하다니. 흥정에는 영 소질이 없으시군.’
아니, 그 반대인가…?
내심 덧붙이며 이안이 손을 놓는 사이, 히케드가 루시아에게도 손을 내밀며 덧붙였다.
“좀 전의 대화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제님. 오늘 이 자리에서 꺼내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말이었어요.”
“…아닙니다. 전하. 제가 여쭤보았던걸요.”
루시아가 그의 손을 양손으로 공손히 맞잡으며 대답했다. 물론 목소리가 무거워지는 것까지 감추지는 못한 채였다.
“먼 길 오신 분들을 너무 오래 잡아 두었군요. 푹 쉬십시오. 고된 일정이 될 테니 여독을 확실히….”
손을 놓으며 덧붙이던 히케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탑 밖으로 돌아갔다.
“이런….”
그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불청객들이 돌아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