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36
436화
“……?”
이안도 외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탑의 잔재가 널브러진 검은 언덕 너머. 호수처럼 자욱하게 깔린 잿빛 안개 일부가 파도치듯 넘실대고 있었다.
형체가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자 마수들이 분명했다.
“교전 없이 물러나기에 숲에서 기다리려는 것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나 봅니다. 심지어 더 많아진 것 같군요. …좋지 않은데요.”
경계를 따라 좌우로 번지는 물결을 내려다보며, 히케드가 덧붙였다. 이대로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일대를 완전히 포위할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느새 외벽으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루시아가 덧붙였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 마수들은 정말 저 안개를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았다.
뒤이어 히케드를 돌아본 그가 물었다.
“이 권역은, 전하가 떠나셔도 유지되는 겁니까?”
“…그리 오래되지는 않을 겁니다. 완벽하게 구축된 영역이 아니거든요. 사제들이 애써주긴 하겠습니다만… 길어야 몇 시간이면, 일대가 다시 안개에 덮일 겁니다.”
히케드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진 것도 그래서일 터였다.
눈을 가늘게 뜬 채 턱을 어루만지던 그가 읊조렸다.
“차라리 우리를 따라오면 다행이겠지만… 아니라면, 낭패를 보겠군요.”
따라오는 것도 그다지 다행은 아닐 텐데.
생각하며,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어쨌건 늑대들만 남은 상태에서 저것들에게 습격을 받는다면, 피해가 막심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멸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탑을 둘러싼 성벽은 곳곳이 무너진 데다 그리 높지도 않았고. 대문도 없이 구멍이 뻥뻥 뚫린 탑 내부도, 농성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심각한 눈빛이 된 루시아가 읊조렸다.
“그럼, 떠나기 전에 저것들을 처리해야겠네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 겁니다. 저놈들은 그냥 물러나 버리면 그만일 테니까요. 우리가 떠나면,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다시 이곳을 공격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흠….”
낮게 침음한 히케드가, 이윽고 결심한 듯 이안을 돌아보았다.
“어쩔 수 없군요. 권역을 제대로 형성한 뒤에 떠나야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안이 되물었다. 권역을 형성하는 방법 따위는 알지 못했지만, 어쨌건 쉽지는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진작 해 두지 않았을 리 없었다.
히케드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
“꽤 많은 힘을 소모하게 되긴 하겠습니다만, 할 수밖에요. …염려 마십시오. 지치고 피곤한 건, 아주 익숙합니다.”
댁을 염려하는 게 아니거든.
이안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그들은 고작 일곱으로 대마족의 소굴에 쳐들어갈 계획이 아니던가.
한 명 한 명이 소중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전력인 히케드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건 치명적인 문제였다.
목숨이 걸린 일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윽고 짧게 혀를 찬 이안이 입을 열었다.
“외부의 힘의 도움을 받으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외부의 힘이요…? 설마….”
되묻던 히케드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다.
…역시, 이자도 느꼈었구만.
그 눈빛의 의미를 곧바로 깨달은 이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품은 혼돈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른손을 슬쩍 허리 뒤편으로 돌려 아공간 속에 밀어 넣는 채였다.
히케드의 눈매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그럼요…?”
“루시. 물러나라.”
내뱉은 이안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네모반듯한 목함이 놓여 있었다.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주문 회로가 은은한 빛을 머금고 마력을 뿜어냈다.
루시아가 몇 걸음 더 물러난 것을 확인한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고개를 갸웃 하며 목함을 받아 든 히케드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내부에서 불길한 자줏빛이 스멀스멀 번지는 가운데, 히케드의 미간에 슬며시 골이 패였다.
“이건…?”
“공허의 표식입니다.”
안에 담긴 건 상형 문자 같은 표식이 새겨진 작은 돌덩이였다.
“전하의 어둠으로 물들여야 되긴 하겠지만, 안에 담긴 힘이 보템이 될 겁니다.”
이안이 덧붙인 말에, 히케드가 표식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덧붙였다.
“이런 걸,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제국에서, 타락자를 죽이고 얻은 겁니다.”
“…이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보통 인물은 아니었을 텐데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에드워드 크랄렌.”
이건 과거, 제국 서부의 지배자인 크랄렌 공작과 싸우던 중에 손에 넣은 전리품이었다.
본래는 안에 담긴 혼돈을 흡수할 생각이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지다 지금에 이른 것이다.
히케드가 눈을 부릅뜨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그 예의 바르고 총명하던 친구가, 타락했단 말입니까?”
“…예. 아시는군요.”
정말 알 줄이야. 이안은 내심 놀라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대답했다. 심지어 그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묘사이기도 했다.
“맙소사…. 하긴. 놀랄 일은 아니군요. 혼돈을 받아들인 건, 나도 마찬가지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가능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히케드가 상자에 담긴 공허의 표식을 내려다보았다.
“강대한 힘이 느껴지는군요. 다소 위험하긴 하겠습니다만, 이걸 이용한다면 훨씬 더 적은 힘으로 권역을 형성해 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탁, 상자를 닫은 히케드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런 물건을 제게 넘겨 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성자 대행께도 도움이 될 물건 같은데요.”
이안이 품은 혼돈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안이 한쪽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대신, 이나스 커글의 정수를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
“아하… 다른 생각이 있으셨군요. 알겠습니다. 성자 대행. 공정한 거래로군요.”
탁 풀어진 웃음을 지으며 말한 히케드가, 뒤편의 루시아를 슬며시 일별했다.
“사제님께서 단순히 적응이 빠르신 게 아니셨군요. 성자 대행께서 혼돈을 품고 계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거예요. 비밀이라 여겨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만. 괜한 배려였나 봅니다.”
그래서 알은 척을 안 한 건가.
이안이 내심 읊조리는 사이, 히케드가 덧붙였다.
“성자 대행의 비밀은 내 이름을 걸고 지킬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배려 감사합니다. 전하.”
피식 웃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케드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놓여 있던 투구를 집어 들었다.
“저는 남아서 이 표식을 물들여야겠군요. 먼저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선선히 대답한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지켜보고 있던 루시아가 냉큼 곁으로 다가왔다. 투구를 뒤집어 쓰는 히케드에게 가볍게 목례한 이안이 그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성자 대행.”
몇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다시 히케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 전하.”
걸음을 멈춘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뿔 투구를 뒤집어쓴 히케드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구로 얼굴을 가린 것만으로도, 그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다정하고 소탈한 황태자가 아닌, 어둠에 물든 흑태자의 모습이었다.
안면 가리개 너머로 검푸른 안광이 푸스스 번지는 가운데, 히케드의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마족의 혼돈은 얼마든지 양보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혼돈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새로운 대마족이 탄생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저도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히케드의 안광이 설핏 가늘어졌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제가 그리된다면, 성자 대행께서 막아주시면 되겠군요. 에드워드 크랄렌에게 그랬던 것처럼.”
“…….”
대답 대신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이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뒤통수를 간질이던 히케드의 시선이 이내 느껴지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최상층을 빙 둘러 계단으로 접어든 이안이, 이윽고 다시 걸음을 멈췄다.
“…전하는 아직 위에 계시오.”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 한복판에, 판금 갑옷을 걸친 흑사자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렌이 아니었다. 검과 방패를 든. 그래서 다른 이들이 무기로 땅을 찍을 때, 검면으로 방패 위를 두드리던 자였다.
물론 안면 가리개 너머의 안광은 검푸른 빛이 아닌 노란 색이었고, 격렬하게 일렁이고 있지도 않았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사자가 말했다.
“그웰로드 달린입니다. 두 분을 모시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디아나의 서신을 받은 분이시군.”
“예. 디아나 경은 휴식 중입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덧붙인 그웰로드가 몸을 돌렸다.
그는 바로 아래층의 통로로 이안과 루시아를 안내했다.
위층은 지붕이 없으니, 사실상 최상층인 셈이었다.
아마 히케드와 같은 층을 쓰게 된 것이리라.
“이 방입니다. 성자 대행.”
원형 통로를 걷다 이윽고 멈춰 선 그가, 옆의 나무 문을 열며 덧붙였다.
“수고하시오.”
“…토벌에 동행하기로 결정 하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웰로드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멈춰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소. 잘 해 봅시다.”
“그럼… 성자 대행께서 용의 무구를 휘두르시는 모습을 견식할 수도 있겠군요.”
또 이 얘기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기대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웰로드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흑사자들이 용의 무구에 관심을 보이는 건, 그들이 잃은 것에 대한 동경일지도 몰랐다.
히케드가 그렇듯, 이들 역시 원해서 타락한 것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찬란한 여신을 향한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적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을 동정하면 안 되는데.’
상념을 털어버리며, 이안은 장내를 돌아보았다. 좁아 터진 간이 침상이 몇 개 놓인 작은 방이었다.
뻥 뚫린 창문 너머로 흐릿한 어둠이 일렁이고 있어,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맨 끝의 침상에는, 물론 디아나가 누워 있었다. 그녀는 가면도 벗지 않은 채 몸을 웅크리고 죽은 것처럼 잠든 채였다.
“…루 엔테르 맙소사.”
루시아의 탄식이 번진 건, 문이 닫히고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충격을 간신히 견디고 있었던 듯, 바닥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은 채였다.
이안이 돌아보자, 녀석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읊조렸다.
“죄송해요, 이안 님. 아까, 그렇게 끼어들어서.”
“아니야. 덕분에 여러 가지 의문들이 확실해졌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이안이 가장자리의 침상에 걸터앉았다. 엉덩이 아래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번졌다.
루시아의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쩌죠…? 이대로면 정말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될 텐데… 전하의 말씀에 반박할 수가 없었어요.”
“당연하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뿐이었잖아. 안 그래?”
이안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5챕터는 황제와 흑태자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리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뇌리를 스치는 채였다.
아마 분기점이기도 할 터였다. 그가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낮게 침음한 루시아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벽이 사라진다 해서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아마 이 안의 괴물들은 그대로일 텐데 제국이 둘로 나뉘기까지 한다면… 대륙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거예요.”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그들이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히케드를 죽인다 해도 아마 달라질 건 없을 터였다. 오히려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히케드는 순교자 취급을 받게 될 테고, 이 땅의 생존자들은 그의 유지를 이어받을 테니까.
그리고 그들은 분명, 더 극단적이고 과격한 방식을 동원하게 될 터였다.
물론 루시아는 그런 생각까진 알지 못할 터였다. 녀석의 머릿속에, 히케드를 죽인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을 터였다.
루시아가 맥없이 읊조렸다.
“어쩌시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걸 전하께서 모르실 리는 없는데 말이에요. 대체….”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이안이 툭 내뱉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황좌를 원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럼…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고 하시는 걸까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결코 명예로운 이름이 붙지는….”
“지금 생각해봐야 의미 없어.”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을 잘랐다. 루시아의 시선을 마주 본 그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까. 당장 확실한 건 하나뿐이지.”
“뭔데요?”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라는 거.”
덧붙인 이안이, 녀석에게 손에 든 성혈함을 휙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 든 루시아가 이내 눈을 치켜떴다.
“…이걸, 절 주시려고요?”
“빌려주는 거야. 당장은 나보다 너한테 더 필요할 테니까.”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받은 순간부터 떠올린 생각이기도 했다.
그의 저항력은 성혈 없이도 충분히 높았고, 신성력을 매개로 하는 장비 역시 성 다미엘의 반지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번 전투에서는 마법보다 성화가 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적색 마법은 아군까지 구워 버릴 수도 있었지만, 성화는 그럴 일이 없지 않던가.
루시아가 고민도 잊은 듯 성혈함을 내려다보았다.
“…잊어버리지 않게 잘 간수할게요.”
“마력이 빠져나가는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도 몰라. 너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오염되어 있었다면 더더욱.”
“그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어요.”
루시아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혈함을 꾹 움켜쥐는 채였다. 피식 웃은 이안이 건너편을 턱짓했다.
“그럼 얼른 와서 누워. 그런 고민을 할 시간에, 한숨이라도 더 자는 게 도움이 될 테니까.”
루시아가 튕겨오르듯 일어섰다. 이안도 침대에 풀썩 몸을 뉘였다. 곧바로 눈을 감고, 명상을 활성화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