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39
439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갔다.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내심 읊조리며, 그는 안장 앞에 앉은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
좀 전까지 탑 꼭대기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이제 어둠이 자욱하게 뒤덮이고 있는 바깥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어쨌건 요그의 속삭임을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지금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을 테니까.
-분명히 네가 품은 혼돈의 아주 좋은 양분이 될 거라고.
요그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개의치 않고 이어졌다.
-어쩌면… 실패한 것들을 여럿 잡아먹는 것보다도 훨씬 더.
이안의 시선이 다시 제단 쪽으로 향했다.
어둠이 뭉실뭉실 솟아오르는 한복판.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히케드의 실루엣이 일렁이고 있었다.
좌우에 선 사제들의 안광 역시, 어둠 사이에서 도깨비불처럼 타올랐다.
-게다가 저 녀석은 자격을 갖췄으면서도 아직 굴레를 벗어 버리지 않았지. 현명한 선택이지만, 어쨌든 아직은 필멸자에 불과해. 친구, 너처럼 말이야.
더럽게 열성적이네. 안 어울리게.
이안은 슬며시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자신이 품은 혼돈이, 자아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레벨이 몇 단계 오르면서 지금은 다시 그의 의지를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지만. 혼돈을 마구 흡수하다 보면 또다시 제멋대로 굴기 시작할 게 분명했다.
그러다 통제를 완전히 벗어날 정도로 커버리기라도 한다면, 반대로 그를 집어삼키려 들 터였다.
‘…대마족들은 아마도 그렇게 되어버린 거겠지.’
그런 순간이 온다면, 잡아먹히거나 잡아먹는 양자택일의 갈림길만 남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요그가 바라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그 사이에서 혼돈을 받아먹는다면, 본인이 원하는 존재의 완성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안은 녀석의 소망을 이뤄줄 생각도,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혼돈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최악의 결말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저놈을 죽이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거야. 마침 딱 좋은 상황도 앞두고 있잖아? 내가 너라면 말야, 아마도-
음험한 속삭임이 이어지는 사이, 이안이 오른손을 들어 입 앞을 가렸다.
“내가 너라면, 슬슬 닥칠 거야. 대답이 없다는 건, 보통 긍정의 의미는 아니니까.”
그가 속삭이듯 읊조린 말에, 요그의 속삭임이 바람 빠지듯 잦아들었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이안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헛수고 그만 하고, 네 역할이나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친구들과 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더더욱.”
잠깐의 침묵 끝에, 요그가 대답했다.
-…그러지. 하지만 알아 두라고, 친구. 언젠가 반대로, 저 녀석이 너를 먹어 치우려 들 수도 있다는 걸 말이야. 아직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상황이라는 건, 언제나 변하게 마련이니까.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맞아. 네가 당장 친구들을 만나는 상황으로 바뀌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아니… 내 말은 그런 의미가….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난 네 친구가 아니야.”
요그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낮은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입가를 가리던 오른손을 내렸다.
물론 요그를 당장 아공간에 넣어 버릴 생각은 없었다. 싸움 직전이 아니던가.
아공간에서 친구들과 회포를 풀 시간은, 이나스 커글을 무사히 처리한 뒤에 마련해 줄 계획이었다.
‘반대로 나를 먹어치우려 들 수도 있다라….’
요그의 속삭임을 곱씹으며, 그는 심드렁하게 히케드의 의식을 눈에 담았다.
물론, 정말 그런 상황이 일어난다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애초에 히케드를 같은 편이라 여기고 있지 않았으니까.
히케드의 인간적인 면모는 솔직히 마음에 들긴 했지만,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가능하면 엮이고 싶지 않은, 아주 복잡한 개인사까지 가지고 있지 않던가.
끝내 서로 칼을 겨누게 된다면,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터였다.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지만.’
그저 마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도움이 필요해서나, 아직은 그의 혼돈을 흡수할 생각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히케드는 그 빌어먹을 놈의 결말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도 필요한 존재 같지 않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 챕터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게 분명했다. 적으로든 우군으로든.
게임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그와 엮이며 대마족들을 토벌하게 되었으리라. 퀘스트가 생겨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저자 역시 대마족들이 이 거대한 마경의 핵이라 여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사 아니라 해도, 토벌해 나가는 과정에서 마경을 무너뜨릴 확실한 단서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면 그때도 백금룡이 벽을 무너뜨렸을 테고.’
물론, 그가 대행자인 지금은 더 빨리 일어나게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래서 더더욱, 히케드에게는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쯤 정신 나간 대마족들이 득시글대는 채로 벽이 무너지는 건 좋은 분기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제는, 좋은 결말로 이어지는 분기점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럽긴 했지만.
솨아아아….
그때, 기둥처럼 솟구치던 어둠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불씨만 남은 것처럼 짓눌려 있던 횃불들이 다시 조금씩 타올랐다.
하지만 어둠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제단 주위로 스멀스멀 번지고 있었다.
양팔을 치켜든 채 마주 선 사제들의 전신에도 새카만 어둠이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그건 이안과 흑사자들을 등지고 선 히케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갑옷은 완전히 새카맣게 물들었고, 그 틈으로 푸르스름한 혼돈이 불길하게 넘실댔다.
“…….”
장내에 적막이 내려앉은 가운데, 히케드가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지나치자 제단의 모습이 드러났다. 위에는 어둠을 뭉실뭉실 뿜어내는 공허의 표식이 놓여 있었다.
이안이 검푸르게 물든 문양을 응시하는 사이, 히케드가 단상 옆에 선 자신의 전마에 올라탔다.
다각- 다각-
마찬가지로 더 짙은 어둠에 물든 전마가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마는 물론, 그 위에 탄 히케드 역시 뒤편으로 검푸른 어둠을 전상처럼 남기는 채였다.
쿠웅-
둔중한 소리가 장내를 울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2층 난간을 빙 둘러싼 채 지켜보던 늑대들이, 손에 든 창의 창대를 일제히 바닥에 내리찍으며 낸 소리였다.
그들의 전신 역시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어두웠다.
“…….”
그들을 등진 채 다가오는 히케드는, 흑태자보다는 마왕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의식을 치렀음에도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존재감이 선명해졌다.
하지만 마른침을 삼키는 루시아와 달리, 그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태연했다.
‘…확실히, 나보다 흡수 효율이 좋은 것 같은데. 타락자라 그런가.’
곁을 스쳐 지나가는 히케드를 바라보며, 이나스 커글과의 싸움이 생각보다는 쉬워질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덧붙일 뿐이었다.
다각- 다각-
흑사자들까지 지나친 히케드가, 비로소 비어있던 정중앙의 선두에 멈춰섰다.
마찬가지로 갑옷 전체가 새카맣게 물든 흑사자들이, 검푸른 안광을 고요하게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
이안의 시선이 히케드 너머, 아치를 그리는 출입구의 밖으로 향한 건 그때였다.
제단의 어둠이 잦아들고 있음에도, 여전히 밖은 먹구름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검푸른 모래 폭풍을 앞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히케드가 뒤편을 돌아보는 것까지 확인한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비로소 설핏 말려 올라갔다.
‘이래서 출발 직전에 의식을 치른 거였군.’
히케드의 의도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출발 전, 그가 했던 말들의 의미 역시.
크르르….
잔뜩 경직되어 있던 모로가 낮은 숨소리를 토해냈다.
녀석의 목덜미에 손을 얹어 혼돈을 흘려 넣으면서, 이안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넘실대며 번지는 제단. 그리고 양팔을 치켜든 채 마주 선 사제들의 모습이 다시 선명해졌다.
검게 물든 그들의 두건 망토는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설핏 드러난 빛바랜 사제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솨아아아….
그들이 치켜들었던 손을 내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 손짓에 반응하듯, 일단의 어둠이 제단으로 빨려들듯 응집됐다.
크르렁-!
히케드의 전마가 저주파 섞인 포효를 토해낸 건 거의 동시였다.
녀석이 검푸른 안광을 흩뿌리며 앞발을 치켜들고 있었다.
슈화아아아-
제단에 응축된 어둠이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어둠의 파장이 밀려오는 가운데, 흑사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히케드에게 집중됐다.
기울어진 안장 위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세를 다잡고 있던 그가 이윽고 내뱉었다.
“나를 따르라.”
밀려든 어둠이 이안의 등을 떠밀듯 휩쓸고 지나쳤다.
다시 앞발을 땅에 댄 히케드의 전마가 달려 나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흑사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 뒤를 따라 내달렸다. 어둠의 물결이 그들을 휩쓸고 지나치는 채였다.
“…가자.”
내뱉으며, 이안도 고삐를 후려쳤다. 나지막이 그르렁대던 모로가 그대로 흑사자들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히케드를 지나친 어둠의 물결이, 그대로 탑 바깥에 자욱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먹구름처럼 넘실대던 어둠이 맹렬하게 휘몰아치며 멀어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히케드가 그 어둠의 해일을 따라잡으려는 듯 속도를 높였다. 흑사자들 역시 연신 고삐를 후려쳤다.
앞으로 살짝 몸을 숙인 이안이 내뱉었다.
“자세 낮추고 꽉 붙잡아. 저 안으로 들어가서, 어둠을 몰고 달리려는 것 같으니까.”
“…알았어요.”
투구를 깊이 눌러쓴 루시아가 모로의 넘실대는 갈기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바로 앞을 달리는 그웰로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안은 한 번 더 고삐를 후려쳤다.
모로가 거칠게 콧김을 뿜으며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곧, 검푸른 어둠이 자욱하게 이안의 시야를 뒤덮었다.
***
다각 다각 가닥-
자욱하게 휘몰아치는 검푸른 어둠 속에서, 내달리는 전마들의 발굽 소리만이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때때로 모로에게 한줌씩의 혼돈력을 밀어 넣으며, 이안은 전력 질주에 가까운 속도를 유지했다.
시선은 앞을 달리는 흑사자의 푸르스름한 잔영에 고정한 채였다.
‘…눈 더럽게 시리네.’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눈조차 자주 깜빡이지 않았다.
자칫 한눈을 팔았다간 미아가 되어버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력 탐지조차도 눈을 더 시리고 어지럽게 할 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어쨌건, 적어도 히케드는 이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게 분명했다.
일행의 속도는 출발한 이래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었고, 때때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방향을 조금씩 바꾸기도 했으니까.
그건 때때로 굵고 기다란 그림자들이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 이후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솨아아아….
그러던 한순간, 마침내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끈적한 서늘함 대신, 바람결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묘하게 또렷해졌다. 앞에 달려가는 흑사자의 뒷모습은 물론, 시야 전체가 서서히 밝아졌다.
물론 여전히 어슴푸레하게 어두웠지만, 한동안 자욱한 암흑 속에 있던 지금은 주위가 밝아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뒤이어 앞서 달리던 기수들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발맞춰 고삐를 당기면서, 이안이 속삭였다.
“루시, 괜찮냐?”
“…네. 멀쩡해요. 멀미가 조금 나긴 하지만요.”
모로의 목덜미를 와락 껴안고 있던 루시아가 허리를 조금 펴며 대답했다. 빈말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크르릉… 쿠후… 쿠후….
전마들의 거친 숨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걷는 수준까지 속도를 줄인 히케드의 주위로 흑사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안도 자연스럽게 그웰로드의 뒤편으로 다가섰다.
“…….”
히케드가 상반신을 돌려 이안을 돌아본 건 그때였다.
눈이 마주친 이안이 살짝 고개를 까딱이자, 마주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세심하긴.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비로소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세게 휘몰아치던 어둠이, 연기처럼 바스러지며 흩어지고 있었다.
그 너머로 곁을 스쳐 지나가는 마경의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굵고 길쭉한, 아주 높이까지 자란 나무들이었다.
가지 역시 안장 위에서 일어서도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 뻗고 있었다.
어둠에 떠밀려 흩어졌을 잿빛 안개들이 다시 꾸물꾸물 발아래로 흘러들었다.
‘…정말 단박에 도착했네.’
그림자 숲 한복판이 분명했다.
히케드의 계획대로 단숨에, 심지어 한 마리의 그림자 마수조차 마주치지 않고 도착한 것이다.
하긴. 탑을 포위했던 마수들은 어둠의 해일에 휩쓸려 나가는 안개와 함께 뿔뿔이 흩어졌을 터였다.
일행이 해일 속에 모습을 감추고 이동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다각… 다각….
전마들의 발굽 소리가, 자욱하게 깔리는 잿빛 안개에 가려졌다.
넘실대는 안개는 전마들의 허벅지 아래까지 차올랐다.
끝없이 펼쳐진 나무들은 보기보다 빼곡하지 않고, 적당한 간격을 두고 솟아 있었다.
다섯 마리의 전마가 대열을 갖춘 채 나아가기에도 충분히 여유로웠다.
본래는 일조량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간격이겠지만. 마경이 된 이후로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사아아아….
삽시에 육안으로는 땅을 볼 수 없게 됐다.
숲이 아니라 잿빛의 늪지대를 헤치고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안개에 가득한 혼돈을 느끼며, 이안이 오른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뭐가 좀 느껴지냐?”
-짐승 냄새가 가득하군. 여기에선… 내 감각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요그의 무책임하고 느긋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뭔가 있더라도, 가까이 다가오기 전까진 눈치채기 어렵겠어.
무능력할 땐 솔직하다니까.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숲의 어둠을 돌아보는 루시아에게도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을 뿐 아니라, 선두의 히케드 역시 계속해서 아무렇지 않게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이 숲의 지리를 어느 정도는 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모로의 목덜미에 손을 얹어 또 한 번 혼돈력을 한 줌 밀어 넣으며, 이안이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
대각선 옆, 세렌의 뒤에 탄 디아나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안이 괜찮다는 의미로 턱을 한 번 까딱였다. 디아나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가면 너머의 눈빛이 음울했다.
‘약발이 벌써 다 된 건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어차피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디아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
체념한 듯 축 널어져 있던 디아나가 불현듯 고개를 치켜든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묵묵히 나아가던 이안과 루시아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
하지만 다아나는 둘의 시선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주위를 두리번댔다. 가면 너머의 눈매가 잔뜩 가늘어진 채였다. 대충 다듬은 백금발 사이로 튀어나온 뾰족한 귀가 움찔댔다.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긴. 숲이 텅 비어있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