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4
044화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는 메브의 모습은, 붉은 횃불을 방불케 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머, 멈추시오! 막아라! 폐하를 지켜!”
기사들 중 하나가 외쳤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향해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확실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맞설 수 있는 자는 드문 법.
다들 공포에 질린 채, 홀린 듯 메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덕분에, 아무도 자세를 낮춘 채 옆으로 내달리는 이안을 주목하지 않았다.
‘일단 한 놈.’
손가락에서 따끔한 느낌이 번지고, 늪지의 원한이 인근의 하수인 한 놈을 향해 마수를 뻗쳤다.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고 다음 목표에게로 달려갔다.
문득 필립, 미구엘과 함께 저택의 은신처에 두고 온 루시아가 떠올랐다.
끔찍한 참상을 눈앞에서 겪고도 겁먹은 표정조차 짓지 않던 소녀.
하지만 그를 응시하던 눈빛만큼은 간절했다.
부디 자신의 부탁을 잊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듯한.
‘…이래서 애새끼들은 싫다니까.’
생각하며, 이안은 코앞으로 다가온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의 접근을 눈치챈 듯, 놈의 눈이 커졌지만.
터억-!
이미 이안의 손아귀는 놈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아귀에 맺혀 있던 혼돈력의 일부가 놈의 눈과 코, 입을 통해 밀려들었다.
아주 적은 양.
‘효과가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이안은 놈을 확 끌어당겨 메브 쪽으로 내던졌다.
“어억-?!”
“꺄악!”
데굴데굴 굴러간 귀족 놈이 메브와 병사들 근처에 자빠졌다.
돌발 상황에 피난민 사이에서 짧은 비명이 번졌다.
달려들듯 말 듯 한 거리까지 가까워졌던 병사들과 메브의 시선이, 쓰러진 귀족에게로 돌아갔다.
“어윽… 컥… 크윽…?”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던 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보라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핏줄이 전신에 돋아나고, 근육이 뒤틀리면서 팽창했다.
“벼, 변이…?”
병사들 중 하나가 중얼대는 그때.
발작하던 귀족이, 뒤틀리듯 일그러진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 아아- 악-!”
고통에 찬 절규.
그제야 피난민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 다들 도망쳐!”
그 외침을 시작으로 피난민들이 사방의 통로를 향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또 다른 귀족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던 이안이, 변이 중인 타락자를 일별했다.
‘정말 되네.’
변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하급 타락자들을 보며 떠올렸던 발상이었다.
이것들은 어쩌면 오염된 마력이 아니라 거기 섞인 혼돈력을 다룰 줄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그래서 순수한 혼돈력을 역으로 밀어 넣으면 오히려 반작용이 일어나지 않을까 추측하게 됐는데, 그 예상이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혼돈력을 다룰 줄 아는 레지스 같은 제대로 된 타락자들에겐 오히려 힘을 보태 주는 꼴이 되겠지만.
이런 반쪽짜리들에게는 앞으로도 써먹을 수 있는 카드가 하나 생긴 셈이었다.
‘아직은 구별할 수 있는 타락자가 많지 않지만.’
혼돈력을 밀어 넣은 귀족을 또다시 집어 던지면서, 이안은 장내를 향해 소리쳤다.
“폐하를 안전하게 모셔라! 병사들은 타락자를 상대해!”
도망치는 피난민과 변이하는 타락자. 신성력을 전신에 두른 복수의 사도까지 뒤엉킨 혼란의 한복판에서, 이게 누구의 외침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국왕을 감싸고 있던 여섯 기사단원 중 하나가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반항하다 사과했던 젊은 놈, 조나단.
이번에도 이안을 가장 먼저 발견한 그는,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소리쳤다.
“호위병들은 폐하를 따르라! 폐하, 대피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이게 대체… 그래, 알겠소-”
당혹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횡설수설하면서, 국왕이 거의 연행되다시피 끌려나갔다.
어쨌거나 귀족들 사이에 진짜 타락자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방금 드러났기 때문이다.
절반에 가까운 병사들이 국왕을 따라 도망치듯 이동하는 가운데.
푸스스….
검을 늘어뜨린 메브가 변이 중인 귀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숨에 놈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완전히 변이가 끝나길 기다리듯, 신성력을 고요하게 가다듬은 채 기다렸다.
오히려 그 모습은 주위의 병사들과 기사들을 더 두렵게 만들었다.
“끄… 으으…”
검보랏빛 육체와 곳곳에 튀어나온 촉수.
이목구비가 멋대로 박힌 얼굴로 신음을 흘리며, 변이한 타락자가 메브를 내려다보았다.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
순수한 혼돈의 힘은, 나약한 인간의 정신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아아아아-!”
놈이 팔과 촉수를 활짝 펼치며 메브에게 달려들었다.
검을 쥔 메브의 손아귀에 비로소 힘이 들어갔다.
푸- 확!
붉은 반월이 타락자를 휩쓸었다.
상체가 비스듬하게 양단된 놈이,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허물어졌다.
사방에 검은 피와 내장이 흩뿌려지는 가운데.
터억-
자신을 향해 넘어지는 타락자의 머리통을 왼손으로 움켜쥔 메브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퍼석, 머리통이 터져 나가면서 손아귀에서 붉은 신성력이 타올랐다.
축 늘어진 시신을 움켜쥔 메브의 눈동자에 그간 억눌러 왔던 모든 감정이 휘몰아쳤다.
안면 가리개를 뚫고 새어 나오는 안광이 격렬하게 일렁였다.
“아… 아아…… 아아아아악-!”
온갖 감정이 뒤섞인 절규.
장내에 남은 자들이 공포에 짓눌린 얼굴이 되어가는 가운데.
“커욱… 으윽… 으으윽-”
늪지의 저주로 착란 상태에 빠져 있던 귀족이 변이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내던진 또 다른 자 역시, 마구잡이 식으로 뒤틀린 형태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그들의 변이하는 모습에는 통일성이 없었다.
그들이 머금은 혼돈의 힘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철퍽-
들고 있던 시신을 내던진 메브가 놈들을 향해 쇄도했다.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이 긴 잔상을 허공에 흩뿌렸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해야…?”
그 모습을 손을 덜덜 떨며 지켜보던 병사들이 중얼댔다.
미친 리우렐 경과 맞서게 되는 줄 알았더니.
영문을 알 수 없게도, 정말 피난민들 사이에서 타락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몇몇의 시선이 기사들과, 여전히 상석에 우두커니 선 레지스 브란트 공작에게로 돌아갔다.
미간을 찌푸린 공작과 달리, 기사들도 대부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시선을 느낀 기사들 중 하나가, 검으로 메브의 등을 가리켰다.
“뭣들 보고만 있느냐? 저자는 폐하께 검을 들이민- 읍?”
기사의 눈이 커졌다.
가죽 장갑을 낀 웬 손길이 우악스럽게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기사 주제에 왕이 아니라 공작을 섬기는 건, 괜찮고?”
나지막한 목소리.
어느새? 생각하며 눈을 돌린 기사가, 이안의 검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간신히 달싹였다.
“네놈은 또 누구…. 컥…!”
손아귀를 타고 일순간 밀려든 이질적인 힘에, 기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찰나.
“네놈이 알 필요 없는 사람.”
덧붙인 이안이 놈을 툭 밀쳐내며 물러났다.
근처의 다른 기사와 병사들이 허둥지둥 창칼을 그에게 겨눴다.
“네, 네놈은 또 뭐냐?”
“살고 싶으면 그것들 치워. 그리고 물러들 나는 게 좋을 거다. 괜히 섞여서 개죽음당하지 말고.”
덧붙인 이안이, 별안간 투척용 단검을 기사 하나에게 던졌다.
“큭?!”
부지불식간에 팔뚝에 단검이 박힌 기사의 눈이, 이내 커졌다.
단검 날에 꼬물거리는 무언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뱀이었다. 좁쌀만 한 송곳니가 돋은 아가리를 쩍 벌린.
놈이 그대로 기사의 팔뚝을 깨물었다.
“네놈…! 무슨 사술을…?!”
기사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안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고개를 숙이니 실뱀도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이 물감이 녹듯 흘러내렸다.
숨을 멈춘 채 눈을 치켜뜬 기사의 동공을 가득 채운 건, 오로지 검붉은 신성력을 머금은 성기사의 거대한 모습뿐.
“아- 아아아악-!”
착란 상태에 빠진 기사가 공포에 질린 절규를 내질렀다.
혼돈력을 삼킨 기사도 섬뜩한 숨소리와 함께 변이를 시작했다.
남은 기사와 병사들이, 이안의 조언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그들이 주춤주춤 통로를 향해 뒷걸음치기 시작한 가운데.
“못 뛰겠으면, 여기 숨소리도 내지 말고 박혀 있어. 알겠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던 여인을 회관 구석으로 끌고 가 처박은 이안이 내뱉었다.
눈물범벅이 된 여인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
어째, 이게 더 똥개 훈련 같은데.
숨을 내쉬며, 이안이 비로소 장내를 돌아보았다.
그가 이번 전투의 주역을 메브에게 양보한 건, 그저 그게 더 손쉬워서만은 아니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를 떠나, 어쨌건 메브는 그가 이 세계에서 만난 중에서는 가장 책임감 있고 선한 쪽의 인간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한 끝에, 저 되지도 않은 타락자들에게 무릎 꿇는 광경은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처럼 자신의 억눌린 내면을 마음껏 내보이며 폭주하길 바랐다.
어쩌면 별것 아닌 상사나 선배의 갈굼에, 제대로 된 항변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의 자신이 겹쳐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걱-! 콰직!
그사이, 타락자 둘을 다 썰어 버리고 변이한 기사 하나마저 양단한 메브가 쓰러진 타락자의 머리를 짓밟아 으깨 버렸다.
과거의 그녀가 선보이던 군더더기 없는 전투 방식과는 상반된, 야만적이기까지 한 모습.
전신에 튄 타락자들의 피가 신성력에 증발해 뒤섞이면서, 암흑 기사를 방불케 했다.
푸확-!
그녀의 등 뒤를 노리고 달려들던 마지막 타락자마저 단칼에 찢어발긴 그녀가, 마침내 어깨를 들썩이며 멈춰 섰다.
“…….”
피바다가 된 장내에 일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친 숨을 내쉬던 메브의 시선이, 이윽고 상석으로 향했다.
레지스 브란트.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군…. 가장 이용하기 쉽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자네인데. 어쩌다 가장 예상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 것인지.”
“나 혼자였다면… 그랬겠지….”
메브가 느릿느릿 내뱉었다.
레지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이 문득, 저만치의 회관 구석에 선 이안에게로 향했다.
“그래… 네놈이 배후였던 거군. 오른델의 반란을 주동한 성기사가 있다더니… 그게 헛소리가 아니었던 거야.”
“그렇게 솎아냈는데도, 아직 오른델에 끄나풀이 남아 있나? 그것대로 대단하군. 바퀴벌레 같아.”
이안이 피식댔다.
레지스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일개 용병 따위라고 생각했던 게 내 실책이었군. 하찮은 변수라도 무시하지 말아야겠어. 다음부터는 말이지.”
“네놈에게… 다음이란… 없다-!”
울부짖으며 메브가 돌진했다.
검날을 타고 이어진 붉은 궤적이, 폭발하는 듯한 호선이 되어 레지스를 향해 흩뿌려졌다.
쩌엉-
반투명한 자주색 역장이 레지스의 앞에 피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놀랍게도 역장은 신성력이 담긴 일격을 막아내고도 부서지지 않았다.
신성력과 마력이 뒤섞인 충격파가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는 가운데.
크르르- 크릉-! 크헝-!
사방의 통로에서 십여 마리의 사냥개들이 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의 통로에 가까워졌던 기사와 병사들이 다시 벽면에 몰렸다.
그들을 그대로 지나친 사냥개들이 레지스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역장과 신성력의 잔해 사이로, 레지스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잊은 모양이군. 오늘 밤 나는… 이 아겔 란에서만큼은….”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미간의 피부가 기괴할 정도로 불뚝 튀어나오고, 그곳을 중심으로 얼굴 전체에 거미줄 같은 핏줄이 번진 모습이었다.
온통 자주색으로 변한 눈동자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신이나 다를 바 없다네.”
콰앙-!
남은 역장이 폭발하면서, 검을 내지른 자세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굳어 있던 메브가 튕겨 나갔다.
“내가 참된 신을 섬긴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할 걸세. 그 어떤 목격자도 남지 않을 테니.”
병사와 기사들의 얼굴에 소리 없는 경악이 번지기 시작한 가운데.
스르릉-
단죄의 검을 뽑아 든 이안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지랄하네.”
이미 나한테 한 번 뒈졌던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