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53
453화
“…아니야. 네가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는-”
“정말이군요. 세상에…. 전 정말 몰랐어요. 꿈에도요…!”
이안이 내뱉었지만, 루시아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탄성을 터뜨렸다. 입가에 의미를 알고 싶지 않은 미소까지 머금는 채였다.
“정말이지, 놀라움의 연속이네요.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사실들뿐이에요…!”
한 번 더 부정하려던 이안은, 결국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이런 부분에까지 눈치가 빠를 필요는 없을 텐데.
쿠구구… 장내에 옅은 진동이 번진 건 그때였다.
화들짝 시선을 돌린 이안이 미간을 좁힐 찰나.
“이러다 의식 세계가 무너지겠군. 왜들 이러는 거야?”
눈만 끔뻑이던 요그가 내뱉었다.
이안의 미간을 조금 더 좁아지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덕분에 방금 그 진동이 꿈에서 깨려는 전조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
전혀 느끼지 못한 것처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본 그가, 이내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사이 루시아를 돌아본 요그가 덧붙였다.
“고작 얼굴이 바뀐 건데 넌 왜 그렇게 놀라고, 이 친구는 왜 이렇게 당황한 거야? 꿈에선, 별거 아닌 일이잖아? 지금 나처럼 말야.”
“맙소사… 진심으로 묻는 건가요, 요그?”
루시아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으며 녀석을 마주 보았다. 요그가 곧바로 어깨를 으쓱였다.
“난 언제나 진심이야. 루시.”
“…이안 님이 당황하셨다는 것까지 알아채고도 모르는 거면, 요그는 아직 알 준비가 안 된 거예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한 루시아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내 입으로 알려줄 수는 없어요. 그건 너무 무례한 일이거든요.”
“……?”
“그래서….”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요그를 무시한 채, 루시아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언제부터인 거예요, 이안 님?”
“…….”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이고 목소리까지 낮춘 채였다.
다시 눈을 뜬 이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마주 보는 루시아의 눈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완고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아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덧붙였다.
“언니도 알고 있나요? 저한테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었거든요.”
“…아니.”
이윽고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힐 때보다 지금이 더 답하기 어려웠다.
“나도 깨달은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그러셨군요….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는 루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반드시 무사히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언니를 다시 만나면, 마음을 전하셔야 할 테니까.”
“아니.”
“……?”
“그럴 생각은 없어, 루시.”
이어진 이안의 대답에, 녀석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졌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인 루시아가 재빨리 덧붙였다.
“아니, 어째서요? 혹시, 거절당하실 것을 염려하시는 거예요? 그건 전혀… 아니.”
실언할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고개를 가로저은 루시아가, 코로 크게 숨을 들이쉬며 다시 이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저는 전하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울게요. 뭐든지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야.”
“…….”
이안이 말을 잘랐다. 멈칫한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녀석의 눈을 잠시 가만히 바라본 그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덧붙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만 얘기하자. 없던 일로 해 주면 더 좋고.”
“하지만….”
“이러다 꿈에서 깨겠어. 아직 나눠야 할 말이 남았잖아?”
“…알았어요.”
입술만 몇 차례 달싹인 루시아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 가득 맺힌 의문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이안은 정말 이 부분에 대해 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진작 스스로 결론을 내린 문제였다. 적어도 머리로는.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이안이 요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큰둥한 얼굴로 양팔을 목뒤에 기대고 있던 요그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 친구.”
“내 예상에 우린 지금, 세상의 틈새에 떨어진 것 같은데.”
이안이 거두절미하고 덧붙였다.
할 말이 많은 듯 입술만 움찔대던 루시아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홱 돌아오는 가운데, 요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표면이 찢어지면서 그 너머로 떨어졌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연옥에 떨어졌단 말씀이신가요?”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요그가 다시 빨대를 입에 물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네. 너희 세상의 그림자. 찢어지고 부서진 세계와 온갖 찌꺼기들이 고이는 공간이니까. 이제 나도 꽤 아는 게 많아졌어. 안 그래?”
내용과 달리, 녀석의 말투는 태연한 걸 넘어 유쾌했다. 빨대를 위아래로 까딱대는 요그를 바라보며 루시아가 나지막이 탄식하는 사이.
“그럼, 들어온 구멍으로 다시 나가면 되는 건가?”
이안이 덧붙였다. 표정만큼이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요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무너진 공간은 이미 본모습을 거의 되찾았을걸. 세상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려는 특성이 있으니까. 한계를 넘기 전까진 말야. 그게 아니라면, 너희 세상은 진작 공허가 되었겠지. 아마….”
녀석이 엄지와 검지를 닿을 듯 오므렸다.
“아주 작은 흉터만 남았을 거야.”
“균열….”
멍하니 듣고 있던 루시아가 읊조렸다. 요그가 힐끔 돌아보자, 녀석이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가 봐 온 균열들이, 그 흉터인 거군요.”
“마경은 이미 왜곡된 세상이니까, 온전히 본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겠지. 덕분에 뭐, 균열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렸어.”
빨대를 까딱대며 대답한 요그가 다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겪어 봐서 알겠지만, 균열에서 걸어 나가는 건 아무리 너라도 불가능에 가까울 거야. 애초에 같은 균열을 찾기도 어렵겠지만.”
“…….”
“파편과 찌꺼기로 가득한 세상이, 그렇게 안정적일 리 없잖아? 아마 엄청나게 뒤죽박죽일걸?”
이안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일행끼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게 분명하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뿔뿔이 흩어졌다면 이렇게 의식 세계를 통해 하나로 이어질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럼, 어쩌려고? 생각이 있다며.”
“호오…?”
덧붙인 말에, 요그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빨대를 까딱대는 녀석의 보라색 눈이 슬며시 휘어졌다.
“여기서 막힐 줄은 몰랐는데. 하긴. 그래, 너라도 모든 걸 바로 알아낼 수는 없겠지.”
“그렇지. 몸의 대화는 바로 나눌 수 있지만.”
이안이 일어서려 하자, 요그가 재빨리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도 작은 즐거움 정도는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친구.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잖아. 내가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더더욱. 안 그래?”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이안이 멈칫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들자, 요그가 선심 쓰듯 덧붙였다.
“네 그 작은 감옥 구석에 처박혀 있는 또 다른 죄수가 있잖아. 친구.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조용히 지내는 녀석 말야.”
“…암흑 성물?”
그제야 눈매를 슬쩍 꿈틀댄 이안이 되물었다.
흡혈 여제를 죽이고 손에 넣었던 암흑 성물. 틈새를 걷는 자의 두개골을 곧바로 떠올린 것이다.
틈새와 연관 지을 만한 물건은 그것뿐이었다.
“암흑… 성물이요…?”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는 루시아와 달리, 요그는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고는 옆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안이 곧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의식을 흘려보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을 텐데.”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건 세상의 그림자에서 태어난 존재였어.”
요그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엿보기만 할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 네 손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겠어?”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만들 수도 있단 거냐?”
“내가 매개체가 되어 그 안에 담긴 힘을 제대로 일깨울 수 있다면. 지금 네가 품은 혼돈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아마도.”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확실하지는 않다는 거군. 또.”
“당연하잖아. 나도 처음 해 보는 거니까.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나가게 되거나, 다 같이 나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물론, 통로를 여는 것조차 실패할 수도 있겠고.”
“…….”
이안은 좁힌 미간을 풀지 않은 채 요그의 보라색 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이 뱀 새끼에게 자신을 비롯한 모두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없냐?”
“글쎄…. 뭐, 너도 알고 있겠지만. 다른 것들과 같은 방식으로 나갈 수도 있겠지.”
“검은… 벽이요?”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침식의 순간 벽이 토해내는 건, 광기에 먹혀 경계의 어둠이나 균열 속으로 걸어 들어간 마물들이리라 유추하지 않았던가.
“정말 검은 벽은 이쪽과 저쪽을 가를 뿐만 아니라, 틈새로도 이어져 있는 거군요….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어요.”
요그가 어깨를 으쓱이자 멍하니 읊조린 루시아가, 불현듯 눈을 치켜떴다.
“틈새에 너무 많은 것들이 쌓여 버린 거예요. 수없이 이어져 온 전쟁… 그리고 초월자들 간의 싸움에서 만들어진 찌꺼기와… 세상에 새겨진 상처로 인해서…. 더는 연옥에만 담을 수 없게 될 만큼… 그래서… 거꾸로 물질계로…?”
녀석이 두서없이 중얼댔다. 전혀 새로운 이론이 불현듯 떠오른 모양이었다.
물론 이안은 검은 벽의 정체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건 안 되겠군.”
그저 단호하게 결론 내릴 뿐이었다. 벽이 다시 침식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까지 버틸 수도, 무사히 벽을 넘을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아니면 뭐. 이대로 영혼이 텅 비어버릴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겠지. 고통은 없을 거야. 아마 너나 나 정도를 제외하면 의식을 되찾지도 못할 테니까. 꿈속에서 행복하게 죽게 되겠지.”
요그의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 이 선택을 할 리 없다는 걸 이미 아는 말투였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이안의 싸늘한 얼굴을 돌아본 녀석이,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뱉어 버렸다. 뒤이어 자신의 허벅지에 팔을 얹은 녀석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지금이, 네가 나를 조금 더 믿어줘야 할 때인 것 같아. 친구.”
“…….”
“그게 일의 성패를 크게 좌우할 것 같거든. 결국, 나는 네 힘을 빌려야 하니까.”
이안은 요그의 보라색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여전히 밉살스럽게 빛나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너도 모르진 않겠지.”
이윽고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얼음이 거의 다 녹아 버린 컵을 집어 든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면 아공간이 네 연옥이 될 거라는 걸.”
“물론이지. 게다가 나는 루시도 마음에 든다고. 적어도 이런 곳에서 헤어지고 싶지는 않을 만큼은.”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빨대를 입에 물며 대답한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너도 마저 먹고.”
“…지금, 이 상황에서요?”
루시아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다면 남기고 간 것들을 아쉬워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 거다.”
“…….”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내려다본 루시아가, 이윽고 다시 포크를 집어 들었다.
“…부정할 수 없네요. 그럴게요.”
녀석이 아이스크림이 녹아 눅진해진 와플을 푹 찍어 입에 넣었다.
이안은 남은 커피를 천천히 홀짝대며 그런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이 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으신 거죠?”
루시아가 툭 내뱉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뭐가.”
“마음을 전하지 않으시려는 이유요.”
“…….”
“여기서 나가면 다시는 여쭤보지 않을게요. 게다가 어차피 전,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루시아가 배시시 웃으며 덧붙였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옅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앞에 컵을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시아가,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치켜떴다.
“…다시 돌아가실 생각이신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