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56
456화
찢겨나간 안면 가리개 사이로 일렁이는 보랏빛이 그제야 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혼돈이 세렌의 목과 얼굴을 타고 핏줄처럼 번지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이런 미친.’
이안은 곧바로 흉갑에 얹은 오른손을 뗐다. 뿜어져 나가는 혼돈력을 거둬들이는 채였다.
하지만 혼돈의 정수는 그의 의지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쿠구…! 쿠구…!
오히려 더 거세게 혼돈을 토해내며, 세렌의 전신을 옭아맸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인력. 동시에 정수에서 전해지는 탐욕에, 이안의 미간이 더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또…?’
그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힘이 들어가면서, 활짝 펼친 손가락 끝이 절로 구부러졌다.
이안이 버티자, 반대로 세렌의 흉갑이 위로 살짝 끌려 올라왔다.
이안이 왼쪽 무릎으로 그녀의 허리를 짓누르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다시 그의 손바닥에 달라붙었을 터였다.
꾸… 구구구국….
이를 악문 이안의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힘겨루기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퍼슥-
이안이 힘으로 오른팔을 확 떨치듯 치켜들었다. 손아귀에서 번진 보랏빛 파장이 흩어지고, 정수의 고동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본래의 색으로 되돌아오는 이안의 눈동자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널브러지는 세렌에게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컥… 쿨럭….”
다행히 그녀의 경련은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고개를 옆으로 툭 떨궜을 뿐이었다. 세렌의 전신에서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안면 가리개 너머로 일렁이는 보랏빛도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안이 치켜들고 있던 팔을 비로소 툭 떨구는 사이.
-왜 멈춘 거야, 친구…?
요그의 의문 섞인 나른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조금만 더 했으면… 그 녀석을 네 권속으로 삼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요그가 자신을 엿 먹이려던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서였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녀석은 정말 그저 세렌을 살려서 그의 권속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갈수록 아는 건 많아지는데….’
인간을 이해하는 건 아직 멀었네.
이안은 고개를 살살 가로 저었다.
물론 일반적인 타락자라면 충분히 힘을 볼모 삼아 굴복시킬 수 있었겠지만. 세렌을 비롯한 흑사자들은 그런 부류가 아닌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히케드를 향한 충성심이 신앙 수준이지 않던가. 원치 않는 다른 주군을 섬기느니 차라리 자결을 택할 터였다.
‘그게 아니라도… 그자의 부하를 이런 식으로 빼앗을 순 없지.’
돌아가서 받아내야 할 보상이 잔뜩 남아 있지 않던가. 이제 이 흑사자의 목숨값도 거기 포함될 터였다.
세렌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다시 일어섰다.
몸이 아주 가볍게 느껴지는 건, 비단 중력이 본래대로 되돌아왔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방금 혼돈의 정수와 힘겨루기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틈새에서는 능력치 역시 전반적으로 떨어져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이래서, 늘 상태창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니까.’
우측 저 너머가 밝아진 건 그때였다. 옆에 선 모로의 그림자가 이안의 전신에 드리웠다.
크르릉…!
모로가 놀란 듯 콧김을 뿜었다. 동시에 백색 소음처럼 이어지던 디아나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이안은 음영 진 모로의 옆머리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앉아 있어. 이 친구는 밟거나 깨물면 안 돼. 알지?”
그르렁댄 모로가 뒤로 돌아, 오르막 위편으로 머리를 댄 채 주저앉았다.
덕분에 녀석의 반대편 저 너머, 허공에 소리 없이 일렁이는 주황색 불꽃이 드러났다.
“괜찮아요. 디아나. 이제 괜찮아요….”
그 아래, 주저앉아 몸을 떠는 디아나와 그녀의 목을 감싸 안은 루시아의 뒷모습도.
“루시… 페르…?”
디아나의 가면 너머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얼마나 악을 썼는지 목이 다 쉬어 있었다.
“맞아요. 여긴 디아나의 악몽 속이 아니에요. 현실로 돌아왔어요.”
“너… 너…! 으읍…!”
헐떡이던 디아나가 불현듯 눈을 치켜떴다. 루시아를 다급하게 옆으로 밀쳐낸 그녀가 그대로 앞으로 몸을 숙였다. 가면을 머리 위로 밀어 올리는 채였다.
“웩…! 우웩… 콜록….”
가면을 정수리에 얹은 디아나가 속에 든 것들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옆으로 밀려났던 루시아가 다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콜록대며 구토를 이어간 것도 잠시.
“건드리지마…!”
디아나가 휙 왼팔을 떨쳐 루시아의 손을 쳐냈다. 와락 인상을 구긴 그녀가 눈물까지 맺힌 눈으로 루시아를 노려보았다.
“왜… 왜 그런 미친 짓을…! 뒈질 거면 너 혼자서나-”
소리치던 그녀가 이내 굳어졌다. 울상을 지은 루시아가 다시 그녀에게 와락 달려들어 껴안았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디아나. 전부 내 잘못이에요….”
“…….”
잔뜩 치켜 올라간 채 굳어져 있던 디아나의 어깨가 스르륵 내려갔다.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루시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윽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거 놔… 당장….”
“미안해요. 디아나. 내가 잘못했어요….”
“아니… 토 묻는다고… 비켜야 닦을 거 아냐…”
…그냥 놔둬도 되겠네.
지켜보던 이안이 비로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슬슬… 나를 좀… 주워 주지 않겠어…?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어서 말야….
요그의 다 죽어가는 속삭임이 뇌리를 간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장내를 터덜터덜 오르던 이안의 입가에, 문득 낮은 한숨이 이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눈을 뜨자마자 이런 난장판이라니.
꿈에서의 기억이 벌써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때 느낀 여유와 평화도.
심지어 시원하고 달콤한 것들을 먹으며 재잘대던 루시아 역시, 지금은 흙먼지투성이인 데다 어깨에 요정의 토사물까지 묻히고 앉아 있지 않던가.
‘…떠나지 않긴 개뿔.’
본래의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스럽게 밀려들었다.
시발. 입술만 달싹여 읊조리는 와중에도, 그의 몸은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멈춰서서 허리를 숙이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불길하게 생긴 두개골을 집어 든 것이다.
-생각보다 더 힘든데…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어….
눈구멍 사이로 기어 나온 요그가 그의 손바닥에 툭 떨어졌다. 녀석은 힘겹게 장갑 틈으로 파고들어 손가락에 감겼다.
“…….”
요그의 사념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이안은 틈새를 걷는 자의 두개골을 눈에 담았다.
전체적으로 실금이 잔뜩 번져서, 손아귀에 힘을 주면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몰골이 되어 있었다.
정보창으로 확인해보니, 내구도가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
‘…두 번은 못 써먹겠네.’
어쨌든 부서지지는 않았다는 게 위안이었다.
아주 느리긴 하지만 내구도가 스스로 회복되는 데다, 각종 능력치 옵션은 그대로였으니까.
입맛을 다시며 두개골을 아공간에 던져 넣은 그가, 뒤이어 금속 보관함을 꺼내는 사이.
“그런데….”
루시아를 밀어내고 바닥에 남은 토사물을 뱉어내던 디아나가, 입가를 손으로 닦으며 읊조렸다.
“여긴 대체 어디야?”
“어… 그게….”
옆에서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루시아도, 비로소 눈을 끔뻑이며 시선을 돌렸다.
“일단은… 고대 유적… 같아요.”
판석이 깔린 기울어진 장내가 성화의 빛에 어렴풋이 그 전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금이 가거나 무너져 내린 기둥들이 곳곳에 보이고, 바닥과 마찬가지로 기울어진 천장이 몇 미터 위에 있었다.
드문드문 새겨진 본래 형태를 알 수 없는 문양들은 흐릿한 보랏빛을 머금은 채였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는 거야?”
내리막 저 너머. 어둠에 잠긴 통로를 눈에 담으며 디아나가 물었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는 균열 너머, 세상의 틈새에 떨어졌다가 돌아온 것 같거든요.”
“균열… 너머? 그럼 그게, 정말 균열이 만들어진 거였다고?”
눈을 치켜뜬 디아나가 홱 루시아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루시아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디아나의 입이 순간 멍하니 벌어졌다.
“말도 안 돼… 거기서 되돌아오다니… 도대체 어떻게…?”
“궁금해?”
되물은 건 이안이었다.
눈을 치켜뜬 디아나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이안이 터덜터덜 비스듬한 장내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세 개의 양초가 나란히 꽂힌 얇은 촛대를. 왼손에는 가죽 수통과 식량 꾸러미를 움켜쥔 채였다.
“정확히 아는 건 나뿐이거든.”
“어… 그렇다면….”
이안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던 디아나가,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는 게 낫겠네…. 그래. 중요한 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이니까….”
그럴 줄 알았다.
피식 웃은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그래서, 화해는 끝난 거냐?”
“…….”
디아나와 루시아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침묵은 잠깐이었다.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디아나.”
흉갑에 한 손을 얹은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때는 제가 이성을 잃었었어요. 죽더라도 이안 님과 함께 죽겠다는 생각뿐이었거든요. 거기에 디아나까지 말려들게 하면 안 됐어요. 내 잘못이에요.”
“솔직히… 마음 같아선 뺨이라도 치고 싶지만….”
슬며시 미간을 좁히며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은 디아나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용서할게. 루시페르. 어쨌든 죽지는 않았으니까. 덕분에… 그 빌어먹을 짐승 새끼가 뒈지는 것도 볼 수 있었고.”
“용서해 줘서 고마워요. 디아나.”
“대신, 이제 서로 빚은 없는 거다.”
디아나가 덧붙인 말에, 루시아의 눈매가 휘어졌다.
“물론이죠. 아무런 빚도 없어요.”
“대신 이제는 나한테 있지.”
“……?!”
루시아의 옆에 선 이안이 툭 덧붙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이안을 올려다본 디아나가, 이내 덧붙였다.
“…내 목숨을 구해줬으니까?”
“그래.”
“아니… 그건… 우리 사이에… 당연히….”
디아나가 더듬댔다.
농담인데. 속으로만 읊조리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위쪽에 일렁이는 성화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이제 끄자, 루시. 여긴 우리뿐인 것 같긴 하지만. 신성을 낭비해서 좋을 건 없잖아.”
“네.”
선선히 대답한 루시아가 손을 내저었다. 성화가 주황색 잔상을 남기며 흩어졌다. 녀석의 안광까지 잦아들자, 장내에 칙칙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천장 곳곳에 흐릿한 보랏빛이 일렁일 뿐이었다.
화륵-
작은 불꽃이 주위를 밝힌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눈동자가 붉게 물든 이안의 얼굴 앞에 피어오른 불꽃이었다.
이안은 그 앞에 촛대를 가져다 대고 차례로 불을 붙였다.
그가 고개를 까딱여 불꽃을 던져 버리는 사이, 루시아가 물었다.
“그건 어디서 가져오신 거예요?”
“제도에 있는 내 집에서.”
마석 등도 횃불도 없을 때를 대비해 하나 챙겨 둔 물건이었다.
조금 더 밝아진 주위를 한차례 돌아본 이안은, 곧 자신을 올려다 보는 디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어깨를 움찔 떨자,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왜 놀라? 내가 마법을 쓰는 걸 이미 다 봤으면서.”
“말도 안 되니까… 아니…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못 봤어.”
엉겁결에 대답한 디아나가 고개를 털듯이 가로 저으며 덧붙였다. 반사적으로 검지를 입 앞에 가져다 대는 채였다.
“내가 본 건… 부싯깃으로 불을 붙이는 모습이야….”
“호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히케드 전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
디아나가 다시 눈을 치켜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싸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난기 섞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이안이 덧붙였다.
“그럼 방금 빚은 없던 걸로 해주지.”
히케드와 흑사자들은 그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을 터였다.
설사 누군가 봤더라도 루시아의 마법이라 여길 거리였다. 사실상 제대로 된 목격자는 디아나뿐이었다. 물론 그녀가 떠들어 댄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 물론이지…!”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이니까…!”
“좋아. 훌륭하네.”
미소 지은 이안이 그녀에게 가죽 수통과 식량 꾸러미를 툭 던졌다.
디아나가 반사적으로 받아 드는 사이, 그가 루시아의 곁에 주저앉았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것 같으세요, 이안 님?”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림자 숲 지하가 아니라는 건 확실해. 여긴 일종의… 사원 같거든.”
“사원이라고요?”
“그래.”
촛대를 옆에 기대 놓은 이안이, 뒤편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저 위에 단상과 제단이 있어.”
루시아와 디아나의 고개가 동시에 위로 돌아갔다. 저 위에 흐릿한 단상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은은하게 일렁이는 보랏빛 역시.
“고대 이교도의 신전인 거군요….”
루시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는 듯한 말투였다.
“뭐든, 배부터 채우고 나서 움직이자. 지금은 다들 먹어야 돼.”
이안이 디아나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녀가 재빨리 식량 꾸러미의 끈을 풀기 시작했다.
“…….”
은은하게 번지는 구린내에 이안의 미간이 절로 꿈틀댔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으련만. 현실처럼 선명한 꿈을 꾼 후유증이었다.
“…왜. 뭐, 문제라도 있어?”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과 루시아를 번갈아 돌아본 그녀가 덧붙였다.
“표정들이 왜 그래?”
이안은 그제야 루시아도 자신처럼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와 입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으며, 녀석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정말 접시까지 핥아먹었어야 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