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59
459화
애초에 요그는 모드로 만들어진 녀석이 아니던가. 모드가 충돌을 일으키거나 버그를 발생시키는 건, 드문 일도 아니었다.
녀석의 도움으로 틈새를 빠져나온 방식 역시, 게임에서는 본래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아무런 퀘스트도 안 떴던 건가….’
물론, 중요한 건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남을 방법이었다.
제단의 혼돈에 이끌린 것인지, 두개골과 이 사원이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인지. 혹은 정말 우연히 발생한 불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일어났고, 게임일 때처럼 재시작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평소와 달리, 이안의 미간은 슬며시 일그러지고 있었다.
“……?”
흐릿한 약초 냄새가 코끝을 스친 건 그때였다.
가면을 벗어 목에 걸치고 궐련을 입에 문 디아나가, 왼손에 들고 있던 촛대의 촛불로 궐련 끝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연신 숨을 들이켜는 데도, 궐련 끝에는 옅은 연기만 번질 뿐이었다. 궐련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물에 젖었기 때문일 터였다.
이안과 루시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볼을 오므리며 궐련을 빨던 것도 잠시.
“하… 시발….”
궐련 촛대를 든 왼팔을 툭 떨군 디아나가, 궐련을 오른손으로 옮기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해탈한 듯한 헛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였다.
“어이가 없네. 그 개지랄을 떨고 겨우 살아 돌아와서 이젠 굶어 뒈지게 생겼는데. 궐련 한 대도 내 마음대로-”
“그거 다시 잘 넣어 놔.”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뒤이어 허공에 작은 불꽃이 번지자, 디아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꺼낸 궐련을 입에 문 이안이, 손가락 끝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이내 손가락을 툭 털어 불꽃을 던져버린 그가 덧붙였다.
“시도해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이안이 입에 문 궐련을 빤히 바라보던 디아나가 굳어졌다.
멈칫한 건 세렌을 바로 눕히던 루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궐련의 연기를 훅 내뿜는 이안을 바라보던 디아나가, 곧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무슨 방법…?”
이안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는 이미 아까 전부터,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알고 있었다.
다만 전혀 내키지 않았을 뿐이었다. 게임에서 존재하던 상황인지를 고민한 것도 그래서였다.
존재한다면 게임의 방식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시발….’
내심 읊조리며 궐련을 손가락 사이로 옮긴 그가, 이윽고 약초 냄새나는 연기와 함께 내뱉었다.
“갈색 마법.”
“역시….”
“…갈색?”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하는 가운데, 디아나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가면을 목에 걸친 탓에 특유의 표정 변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채였다.
“세렌 경도 그랬잖아. 갈색 마법사들이 상황을 해결해 줄 거라고.”
이안이 손가락의 궐련을 까딱대며 덧붙였다. 저도 모르게 한쪽 눈가를 찡그리는 채였다.
디아나의 눈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야. 여기 갈색 마법사가 어디 있….”
덧붙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다시 궐련을 입에 무는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눈을 깜빡였다.
“…설마?”
이안은 대답 대신, 궐련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안 호프… 너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디아나가 더듬댔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인 그녀가, 이윽고 간신히 목소리를 내뱉었다.
“너는… 적색 마법사잖아…?”
이안이 그녀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디아나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는 사이, 이안이 손가락 사이에 옮긴 궐련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가져다 댔다.
“적색 마법을 쓸 수 있다고, 반드시 적색 마법사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
디아나의 얼굴이 더 어리둥절해졌다. 귀로 듣고도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입술 사이의 궐련은 떨어뜨리지 않은 채였다.
전혀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은 눈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본 이안이, 루시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세렌 경의 상태는 어때?”
“네…? 아, 네. 세렌 경이요.”
묘한 눈으로 디아나와 이안을 번갈아 보던 루시아가, 화들짝 세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할 거예요. 영혼에 충격을 받은 것 같거든요.”
“그래…? 차라리 잘됐네.”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아공간에서 금속 보관함을 꺼내 들었다. 남은 연기를 훅 뿜어낸 그가 보관함을 루시아 옆에 내려놓았다.
“경이 깨어나기 전에 여기서 나가 보자.”
“…지금, 바로요?”
눈을 끔뻑이며 되물은 루시아가 이내 덧붙였다.
“요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보는 게 어때요? 요그라면 뭔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지도 모르잖아요.”
“이번엔 그 녀석도 별 도움이 안 될 거야. 게다가 틈새를 탈출하면서 꽤 무리했어.”
이안의 가라앉은 시선이, 상자의 뚜껑을 여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잠든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미동도 없는 걸 보면, 한동안 계속 잠들어 있을지도 몰라.”
뚜껑을 뒤로 젖힌 그가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세렌 경이 이 녀석보다 먼저 깨어나면 오히려 피곤해져.”
“하긴….”
루시아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입단속을 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다시 기절시키는 것도 어렵겠고. 그냥 다 지나간 뒤에 얼버무리는 게 빠르겠어요.”
눈동자가 칙칙하게 가라앉은 와중에도,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건조한 호선을 그렸다.
“실패해서 죽게 되더라도, 그 편이 더 나을 거야.”
“하지만… 해내실 거잖아요?”
루시아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한 줌의 의심도 없는 눈빛이었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이번엔 정말 장담 못 해. 하지만 최선은 다해 봐야지.”
내뱉은 그가 보관함 안에서 칭칭 엉킨 줄을 집어 들었다. 마수 가죽을 엮어 만든, 본래는 모로를 어딘가에 묶어둘 때 쓰려고 챙긴 물건이었다.
“안장 앞에 묶어놔야겠어요. 거기가 제일 안정적이고 안전할 테니까요.”
줄을 받아 들며 루시아가 덧붙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바닥에 누운 세렌에게로 몸을 숙였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흑사자를 종이 인형처럼 집어 올리는 사이.
“아니… 잠깐…. 잠깐만….”
궐련을 멍하니 입에 문 채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디아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상태인데도, 얼굴에 의문과 놀람을 가득 머금은 채였다.
“그러니까… 이안 호프… 네가 정말… 갈색 마법사라는 거야…? 적색이 아니라…?”
“…….”
축 늘어진 세렌을 갑옷째로 한쪽 어깨에 들쳐 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건 마구 엉킨 줄을 풀기 시작한 루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곧 그녀의 시선이 이안쪽으로 돌아갔다.
“디아나는, 믿어도 되지 않을까요?”
“저 귀를 보고 다시 말해.”
“하지만 이미 많이 알잖아요. 조금 더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네.”
심드렁하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모로 쪽으로 마저 몸을 돌렸다.
모로는 그의 의도를 눈치챈 듯, 머리와 목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이안이 녀석의 목덜미와 안장 사이에 세렌을 얹는 사이, 루시아가 다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감당할 수 있겠어요, 디아나?”
“…….”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루시아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디아나가, 이윽고 궐련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갈등은 길지 않았다.
“감당은… 지금도 안 돼. 그러니까 나는….”
연기를 내뿜으며 더듬더듬 내뱉은 디아나가 다시 눈을 떴다.
“여기서 무사히 나간다면… 다 잊을 거야. 지금까지 그랬듯이.”
“디아나다운 대답이라 오히려 믿음이 가네요.”
루시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물론 디아나는 전혀 웃지 못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안이 갈색 마법사가 맞다는 거네. 하지만 그럼 적색은… 대체….”
타들어가는 궐련의 불씨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웅얼대던 그녀가 문득 굳어졌다.
모로 옆에 선 이안에게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덧붙였다.
“백색…?”
“…….”
이안은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짧게 혀를 차고는, 모로의 목덜미에 널듯이 얹은 세렌의 위치를 다잡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오히려 디아나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줬다.
“백마법사라고…? 네가…? 전설의, 그…?”
물론 그만큼의 경악을 몰고 온 사실이기도 했다. 멍하니 내뱉던 그녀가 떨어뜨릴 뻔한 궐련을 간신히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시지만요.”
루시아가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다시 엉킨 줄의 매듭을 풀기 시작하는 채였다.
디아나의 얼빠진 시선이 녀석과 이안을 오갔다.
“말도 안 돼… 그러니까… 백금룡의 대행자가… 혼돈을 품은 데다… 백색 마법사이기까지 하다고…?”
“북부의 대전사이시기도 하고요.”
디아나는 루시아의 첨언에는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검은 땅의 온갖 불가해한 것들을 보며 살아온 그녀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수인이 인간이 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손을 탁탁 턴 미증유의 존재가 디아나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디아나의 몸이 절로 얼어붙었다. 하나만 알아도 목숨이 위험한 비밀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됐다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안이 원한다면, 그녀는 언제든 목이 달아나게 될 터였다.
굳어버린 디아나의 눈을 잠시 바라본 그가, 툭 덧붙였다.
“계속 거기 서서 궐련이나 축내고 있을 거야?”
“네…?”
디아나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모로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필 만큼 폈으면 값을 해.”
“어, 그, 그래… 해야지….”
눈을 깜빡인 디아나가 주춤주춤 앞으로 다가왔다. 이안에게 궐련을 공손히 내밀기까지 하는 채였다.
이안이 궐련을 입에 무는 사이, 루시아가 줄을 내밀었다.
“단단히 고정하자고요. 목이 꺾이거나 낙마하지 않게요.”
“그래…. 알았어….”
디아나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모로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사이 루시아의 옆에 떨어진 수통을 집어 든 이안이, 연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겨우 길이 좀 보이나 싶었는데….’
눈앞에 아른거리던 초월 마법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갈색은, 그가 게임에서 가장 등한시하던 속성이 아니던가.
그가 익힌 갈색 마법은 하위 마법인 모래 늪과 함몰이 전부였다.
“모로?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그사이 디아나의 반대편으로 건너간 루시아가 세렌의 몸을 줄로 칭칭 감기 시작했다. 디아나 역시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평소와 달리 모로가 콧김을 뿜어대는 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였다.
“거점들을 마법으로 땅속에 파묻었댔지.”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진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수통을 보관함 안에 던져 넣고, 안에서 또 다른 수통을 꺼내 들고 있었다.
디아나의 맹한 시선을 받은 그가 덧붙였다.
“정확히 어떻게 한 건지, 알고 있어?”
“…나도 직접 본 건 아니야. 이야기만… 들었지.”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수통의 마개를 열면서, 이안이 계속하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수준 높은 주문 쟁, 아니, 마법사들이 여럿 모였다더군. 도시를 일부라도 땅속에 묻는 건, 마법사 한 명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니까.”
“본론만 해.”
허공을 빤히 응시하며,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지금 그는 스킬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스킬을 올려야 할지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날려 먹을 스킬 포인트의 양이 결정될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듣기론 먼저 도시 주위의 땅을 가른 뒤에….”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디아나의 목소리가 더듬더듬 이어졌다.
“도시를 지하로 가라앉히고… 그 위에 새로운 암석층을 형성하고 다시 땅으로 덮었다더군.”
“…….”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이안의 눈매가 점점 더 가늘어졌다.
‘더럽게 많이 써야 되네… 시발…’
문득 옛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아히고른 산맥 지하, 거인 여왕의 궁전에 갇혔던 바로 때가.
만약 때마침 비밀 통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곳이 그대로 그의 무덤이 되었을 터였다.
지각 변동으로 지층만 냅다 들어 올렸다면, 무너진 천장에 깔려 납작해졌을 테니까.
“엄청난 마력과 주문. 그리고 섬세한 통제력이 필요한 일이겠지.”
스킬창을 바라보는 그의 귓가로 디아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너는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전설의 백마법사니까. 그 무너진 잔해더미 근처의 지층을 찢어버리고, 우리가 선 쪽의 지반을 위로 들어올리기만 하면 돼.”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되는 듯, 그녀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줄을 휙휙 넘겨 세렌의 몸을 묶으면서 디아나가 덧붙였다.
“게다가 땅 위까지 갈 필요도 없어. 출구와 이어진 통로가 있을 테니까. 거기에 다시 이어 붙을 정도로만 들어올리면 될 거야. 어때, 간단하지, 이안?”
“…….”
“…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