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63
463화
중위 갈색 마법, 암반 돌출.
본래는 지각 변동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적을 꿰뚫거나 날려버리는 용도에 불과한 마법이었지만.
혼돈력으로 증폭된 지금은 거대한 암석 기둥이 오르막 쪽으로 불쑥 솟아오른 듯한 형상이었다.
‘버텨줘야 할 텐데.’
뒤로 조금 밀려나는 와중에도, 이안은 마력을 조금 더 밀어 넣었다.
다른 방어 주문을 완성시킬 시간이 부족해서 택한 궁여지책이었기 때문이다.
쿠구구구구-
낮은 수준의 방어 마법은 저 산사태를 잠깐이라도 버텨내지 못할 테고, 중위 이상의 주문은 시전에 성공하더라도 완성까지 시간이 필요하지 않던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땅울림을 느끼며 이안이 벌떡 일어서는 그때.
“이안-!”
뒤에서 디아나의 비명이 이어졌다. 곧바로 몸을 돌린 이안의 눈에 들어온 건, 양팔을 앞으로 내뻗으며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디아나의 모습이었다.
‘뭔가 낯익은데.’
가면 너머의 절박한 눈빛을 마주 보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목을 낚아채며 그대로 끌어당겼다.
이안의 흉갑에 얼굴부터 충돌한 디아나가, 그의 허리를 동앗줄로 붙잡듯 감싸 안았다.
쿠웅-
뒤로 밀려난 이안의 등이 암반 기둥에 닿았다. 묵직한 충격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이안은 양팔로 디아나의 등을 가렸다.
콰- 과과과과과과-
크고 작은 암석과 토사로 이루어진 새카만 해일이 기둥의 좌우를 휩쓸고 지나가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전신을 울리는 진동.
쩍… 쩌적…
비스듬하게 솟아난 암석 기둥 내부에서 섬뜩한 울림이 이어졌다.
슬며시 미간을 찌푸린 이안의 왼손에 황금빛이 번졌다.
지이잉-
그대로 피어오른 백금 방벽이, 디아나의 뒤통수와 등을 가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 엄두도 낮 않는 듯, 이안의 흉갑에 가면 쓴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의 허리를 더 필사적으로 끌어안는 채였다.
‘답답하게, 진짜.’
내심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곧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했다.
한편으로는 내면에 의식을 집중하는 중이기도 했다. 권속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희미하게나마 모로의 의식이 느껴졌다. 이 순간에도 점점 더 흐릿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내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정도면… 휩쓸리진 않겠네.’
내심 안도하며, 그가 오른손을 활짝 펼치며 앞으로 내밀었다.
완성된 주문이 곧바로 방사됐다.
이안이 내뻗은 오른손을 와락 움켜쥔 순간.
콰과과과과-
기둥을 갈듯이 휩쓸고 지나치던 새카만 해일의 일부가 이안쪽으로 빨려들듯 구부러졌다.
이안과 디아나의 주위로 소용돌이치며 모여든 흙과 자갈들이, 삽시에 단단하게 이어 붙으며 굳어졌다.
하위 갈색 마법, 모래 감옥.
작은 보호막에 불과했지만, 어쨌건 없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쩍- 쩌적- 카드드드득-
암석 기둥에서 번지는 불길한 소리가 등을 타고 번졌다. 이안은 움켜쥔 주먹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콰과과과과-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진동과 굉음이 이윽고 멀어졌다.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방심하지 않고 버티던 이안이, 비로소 오른손의 힘을 풀었다.
솨아아아-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흙과 자갈의 반구가 돌풍에 휩쓸린 것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이안의 시야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새카만 흙먼지가 사방에 안개처럼 자욱하게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차례 폭격이라도 휩쓸고 지나친 듯한 광경.
“…….”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오른 건 거의 동시였다.
값진 교훈. 물론, 받은 적도 없는 퀘스트였다.
‘교훈은 시발….’
던전에 보상 대신 함정이 기다릴 수 있다는 게, 교훈이야?
내심 이를 갈며 창을 닫은 이안은, 완료된 퀘스트가 하나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자격의 증명…?’
이번에도 역시 받은 적 없는 퀘스트였다. 늘 그렇듯 이름 말고는 자세한 내용도 보상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무슨 자격을 증명했단 거람.
내심 읊조리며 창을 닫자, 이번에는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피에 새긴 지식.
자격을 갖췄으니, 쪼개지고 잊힌 기억들을 일깨울 때가 되었다는 게 설명의 전부였다.
보상은 무려 스킬 포인트 세 개. 그리고 두 개의 물음표였다.
‘이거… 설마…?’
이안의 눈매가 절로 가늘어졌다.
공략 글에서도 본 기억이 전혀 없는 퀘스트였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자격이라니. 그러고 보니, 이제 그는 모든 속성의 상위 마법을 최소한 하나씩은 익힌 상태였다.
‘…하긴. 이건 게임에선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이렇게까지 망한 캐릭터를 여기까지 키우는 건 물론이고, 이만큼의 스킬 포인트를 확보할 수도 없으리라.
애초에 공략 글에서는, 두 개 이상의 속성의 중위 마법을 익혔다면 그냥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시 키우라고 쓰여있지 않았던가.
“끝… 난 거야?”
품에서 디아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상념에서 깨어난 이안이, 퀘스트 창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하… 하아… 시발….”
이안을 안고 있던 디아나의 팔에 힘이 탁 풀렸다. 그대로 옆으로 주르륵 미끄러진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가면의 한쪽 얼굴이 땅에 처박혔지만, 진이 다 빠진 듯 숨만 헐떡이는 채였다.
비스듬하게 걸쳐진 그녀의 몸을 옆으로 짐짝처럼 밀쳐낸 이안도, 암석 기둥에 뒤통수를 기댔다.
“하….”
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번졌다. 뒤늦게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구토감이 밀려들었다. 마력 탈진의 전조 증상이었다. 쩌적, 하는 불길한 소리가 귀를 파고든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앞으로 몸을 숙였다. 몸을 날리지 않은 건, 소리와 달리 육감이 별다른 경고를 보내지 않아서였다. 널브러져 있던 디아나만 영문도 모른 채 옆으로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쩌적- 쿠웅- 쿠궁-
균열이 번진 암석 기둥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 두껍고 뾰족하던 기둥은, 뒷면이 완전히 갈려 나간 것처럼 얇아진 상태였다.
조각조각 난 돌덩이들이 떨어져 내리자, 가뜩이나 자욱하던 일대의 흙먼지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젠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저 옆까지 굴러간 채 그 모습을 올려다본 디아나가, 땅에 툭 머리를 떨구며 읊조렸다.
다시 허리를 편 이안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갔다. 아랑곳하지 않고, 디아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지금 제일 후회하는 게 뭔지 알아, 이안 호프…?”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안이 눈을 감은 채 내뱉었다.
“뭔데.”
“널 처음 만났을 때 더 빨리 도망치지 않은 거.”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그랬다면 유랑단에게 죽었을 텐데.”
“…그러네. 그럼, 그 뼈다귀들과 싸울 때 아무런 부상도 당하지 않은 거. 그랬다면, 네가 날 전선으로 끌고 갈 일도 없었을 테니까.”
“널 보낸 건 백작이야. 내가 아니라.”
“너를 배려해서 그렇게 결정한 거지….”
“뭐, 그건 그럴지도.”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신경도 써 본 적 없는 문제였다.
“네 비밀에 대해서는 평생 함구할 거야, 이안 호프… 뭔가 더 있더라도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돌아가면 날 보내줘…. 정말, 죽은 듯이 살 테니까….”
뭐, 내가 억지로 붙잡고 있기라도 하는 건 줄 아는 건가.
이안은 옆에 널브러져 있는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고개만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디아나가 간청하듯 덧붙였다.
“넌 또 다른 대마족을 찾으러 가겠지…. 넌 이길지도 모르지만, 나는 다음 번엔 정말 죽게 될 것 같단 말이야…. 죽고 싶지 않아….”
이안은 풀썩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진솔한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관자놀이에서 슬며시 손을 떼면서, 그가 덧붙였다.
“아직 궁금해하던 게 남아 있을 텐데.”
“…아니야. 상관없어. 더는 알고 싶지 않아….”
완전히 진심이군. 이안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걱정마. 다음 거점에 도착하면 보내줄 테니까. 그리고 나면, 한동안은 거점 밖으로 나오지 마. 머지 않아, 정말 벽이 무너질 테니까.”
“…아니야. 괜한 희망 같은 건 이제-”
“내가 실패하더라도 일어날 일이야. 백금룡께서 준비하고 계시니까.”
“……!”
디아나의 숨소리가 멎었다. 그렇게 애원한 주제에, 가면 너머의 눈이 슬며시 커지고 있었다.
이안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대행자인 내가 사라졌으니 더 서두르시겠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오래 남진 않았을 거야.”
“그런데 너는 왜… 직접… 아니. 아니야….”
멍하니 읊조리다 간신히 고개를 좌우로 까딱인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만 알고 있을게….”
“그러니까, 다음 거점까지만 조금 더 고생해 달라고.”
숨을 고르며 간신히 욕지기를 가라앉힌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길잡이가 필요한 상황 같으니까.”
주위에는 아직도 흙먼지가 자욱해서, 시야가 그다지 넓지 않았다.
하지만 산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주위는 뜻밖에도 꽤 말끔했다.
뒤편, 허물어진 암석 기둥의 잔해가 커다란 덩어리의 전부였다.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오로지 흙과 돌로만 이루어진 산사태였기 때문이리라.
이 일대가 아주 척박하고 황량하며, 치솟은 흙먼지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 건조하다는 것까지 유추하기엔 충분한 단서였다.
‘뭐 얼마나 먼 곳으로 나온 거람.’
내심 한숨을 삼키며,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욱하게 넘실대는 흙먼지 너머로 마경의 하늘이 보였다.
온갖 색이 불길하게 뒤엉켜 넘실대고 있었지만, 지하에 매몰되어 있던 지금은 그마저도 반가웠다.
“…그런데, 루시페르는?”
디아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고개만 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참 빨리도 물어본다.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사할 거야. 아마도.”
“그럼… 여기서 조금만 더 쉬자.”
디아나가 다시 머리를 땅에 대며 덧붙였다. 이안이 돌아보자, 그녀가 맥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근방에는 마물이 없을 테니까. 한동안은 오히려, 이곳이 근방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일 수도 있다고.”
“…그건 설득력 있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있던 마물들도 도망쳤을 터였다. 게다가 루시아와 모로가 그들을 찾아 돌아오기에도 훨씬 더 편하지 않겠는가.
철컹-
암석 기둥의 얼마 남지 않은 잔해에 등을 기댄 이안이, 왼손을 뻗어 아공간에서 금속 보관함을 꺼냈다.
자욱한 흙먼지를 눈에 담으며 뚜껑을 연 그가, 안에서 마경 감자주를 꺼내 들었다. 울렁대는 속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독주만큼 좋은 게 없었다.
먼저 한 모금을 마신 이안이 옆으로 술병을 내밀며 말했다.
“너도 한 모금 마실래?”
“…궐련도 한 대 피면 안 돼?”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건 안 돼.”
“…….”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킨 디아나가, 이안의 곁으로 엉금엉금 다가왔다.
곧 술병을 받아 든 그녀가 가면을 아래로 내렸다.
“이대로 영원히 잘 수 있을 것 같아….”
핼쑥해진 얼굴이 드러났다. 머리카락을 비롯한 전신이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더 창백해 보였다.
“마시고 자면 되겠네.”
그녀가 맥없이 술을 들이켜는 사이, 이안이 덧붙였다. 디아나가 고개를 저으며 술병을 내밀었다.
“적어도 여기선 절대 안 돼.”
“안 두고 가니까 걱정마.”
“…그런 걱정은 안 했어.”
이안과 디아나는 술병을 주고받으며 자욱한 흙먼지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
이윽고 시야가 조금씩 밝아졌다.
그들이 앉은 비탈길 저 아래는, 일대와 달리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흙과 자갈, 돌덩이를 대야에 잔뜩 담은 다음 확 흩뿌려 버린 듯한 형태였다. 이안은 능선 위쪽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사실,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아서였다.
“…호오.”
그 너머를 훑던 이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거무스름한 황야.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보랏빛 궤적을 발견한 것이다.
이안이 조금 휘청대며 일어서는 사이.
“아니…?”
디아나가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이안과 달리, 그녀는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미친… 여긴… 설마….”
그녀가 나지막이 덧붙이는 가운데, 달려오는 모로의 등 위에서 움직임이 번졌다.
“이안- 님-! 무사하세요-?”
등자를 밟고 선 루시아가 한 팔을 휘두르며 소리치고 있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오른팔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보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무사하다는 신호 정도는 보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루시아의 눈에 든 모양이었다.
“기다리세요-! 금방 갈게요!”
녀석의 외침이 이어지자, 이안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게 속 편하게 웃을 때가 아닌 것 같아. 이안 호프….”
옆에서 디아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진 건 그때였다.
이안이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자,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쉰 그녀가 덧붙였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여긴 사막인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