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67
467화
“……!”
루시아와 디아나는 물론, 이안도 꿈틀대는 세렌을 돌아보았다.
모로와 나란히 걷고 있던 덕분에, 세렌의 머리는 사실상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윽… 으윽….”
덕분에 이안은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번지는 낮은 신음을 아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맥 한번 기가 막히게 끊네.
이윽고 짧게 입맛을 다신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남은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어느새 다시 그를 돌아보던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묘하게 아쉬운 눈치였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어쨌건, 세렌의 앞에서는 나눌 수 없는 대화였다.
미련을 떨치듯 안장 앞으로 몸을 숙인 루시아가 속삭였다.
“세렌 경. 정신이 드나요? 들린다면 대답해 줘요.”
“들립….”
간신히 대답한 세렌이 다시 신음 섞인 숨을 토해냈다. 뒤이어 그녀가 모로의 마갑에 처박고 있던 얼굴을 옆으로 살짝 돌렸다.
검푸른 머리칼 사이로, 곡선을 그리는 뾰족한 뿔과 창백한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아직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한 채였다.
“들립니다… 사제님….”
하지만 어쨌건 의식은 제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루시아가 낮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누구인지도 아는군요. 다행이에요.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
중얼대던 세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한순간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은 듯 굳어졌던 그녀가, 이윽고 탄식을 토해냈다.
“성흔…!”
정신을 잃기 직전의 기억이 되돌아온 것이리라.
“대체…? 대체 이게 무슨….”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오.”
옆에서 이어진 고저 없는 목소리에, 세렌의 목소리가 순간 칼로 자른 것처럼 끊어졌다. 뒤이어 눈동자만 굴려 이안을 돌아본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성자 대행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요…?”
“그렇소.”
이안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이나스 커글의 광기에 침식당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혼돈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음을.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그녀의 성흔에 자신의 혼돈이 스며들게 된 것까지.
“오해는 하지 마시오. 경을 내 권속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
설명을 끝낸 이안이 담담하게 첨언했다. 모로의 마갑에 한쪽 얼굴을 기댄 채 망연자실하게 듣고 있던 세렌이, 그제야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그런…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습니다. 성자 대행…. 생명의 은인께 그런 괘씸한 의심을 품을 수는 없죠…. 그저 놀랐을 뿐이에요….”
“그러시다면 다행이고.”
깊은 한숨을 내쉰 세렌이 다시 조심스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괜찮으시다면… 성흔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편할 대로 하시오. 이동하기 위해서 묶어둔 것일 뿐, 경을 포로 취급할 생각은 없으니.”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맥없이 덧붙인 세렌이 눈을 감았다. 디아나가 홱 완전히 몸을 돌려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세렌을 바라보는 눈빛에 묘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괜찮을까요?”
루시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세렌이 또다시 정신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이리라.
이안은 대충 어깨만 으쓱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성흔과 또다시 공명을 시도하지는 않을 테니까.
쿠구….
흑사자도 결국은 기사라는 걸 알게 된 건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혼돈의 정수가 낮은 울림을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안의 한쪽 눈매가 절로 일그러지는 사이.
“컥…! 콜록…!”
얼굴의 핏줄을 따라 흐릿한 보랏빛이 번지던 세렌이 발작적인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검푸른 어둠과 피가 뒤섞여 튀어나왔다.
“경…!”
눈을 치켜뜬 루시아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으르렁대는 정수를 억누르며, 이안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코 똥인지 된장인지 또 찍어 먹어 보다니….’
하긴. 어쩌면 성흔의 의미를 과소평가한 건 그인지도 몰랐다. 저들에게 성흔은 그저 단순한 힘의 근원 정도가 아니지 않던가.
“쯧….”
혀를 찬 디아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홱 다시 앞으로 몸을 돌린 건 그때였다. 그녀의 한쪽 어깨에 걸린 수통이 묵직하게 흔들렸다.
히케드의 지원이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버린 게 분명했다.
“괜찮… 괜찮습니다… 사제님….”
하지만 어쨌건, 세렌은 이번에는 정신까지 잃지는 않았다.
숨결을 따라 번지던 검푸른 어둠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혈관을 따라 일렁이던 보랏빛 역시 잦아들고 있었다.
“성자 대행의… 말씀대로군요….”
피범벅인 입술을 간신히 달싹이며, 세렌이 다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뒤엉킨 혼돈을 저 혼자서 해결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안이 뭔가 대답하기도 전에, 미간을 찌푸린 루시아가 내뱉었다.
“그러다 성흔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 수도 있어요. 물론 경의 영혼에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힐 테고요. 죽거나, 그보다 나쁘다면 껍데기만 남게 될 수도 있다고요.”
“혹은, 정말 내 권속이 되어버리거나.”
툭 덧붙인 건 이안이었다. 세렌이 멈칫하는 가운데, 그의 고저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된다면 전하와 나의 관계에도 그다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겠지.”
“……!”
그제야 눈을 부릅뜬 세렌이 그를 돌아보았다. 변이되어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이안이 싸늘하게 덧붙였다.
“잊었나 본데, 나는 아직 전하께 받아낼 빚이 남아 있소. 이제는 거기에 경의 목숨값도 더해졌고.”
히케드가 꽤 마음에 드는 자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거래를 포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벌써 드라그 벨가에서 손에 넣은 장비들의 내구도가 상당히 많이 떨어지지 않았던가.
대마족들을 더 토벌하려면, 히케드의 창고를 탈탈 털어 장비를 최대한 든든하게 보충해야 했다.
“나는 어느 쪽도 포기할 생각이 없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소?”
이안이 세렌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맺었다.
굳어진 채 그의 눈을 마주 본 것도 잠시.
“…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성자 대행.”
이윽고 세렌이 고개를 아래로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
“면목이 없군요….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갚긴커녕, 반대로 폐를 끼칠 뻔했으니 말입니다. 앞으로는…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여러모로 민망한 듯한 말투였다.
신경 쓰지 않고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듣자 하니 흑사자들은 거점의 위치를 여럿 안다던데.”
“…맞습니다. 성자 대행.”
“길을 아는 지역에 도착하면 우리를 거점으로 안내하시오. 그 뒤엔 전하께 소식을 전하시고.”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성자 대행. 그런데….”
곧바로 대답한 세렌의 시선이, 비로소 모로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지금 여긴… 어디인 겁니까?”
“여긴 사막이오.”
“…어디라고요?”
이안의 짤막한 대답에, 세렌이 눈을 부릅뜨며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디아나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가 덧붙였다.
“자세한 건 우리 길잡이에게 물으시오. 나도 그 이상은 모르니까.”
“…….”
세렌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디아나가 낮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설명을 다시 하기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정확히는, 별 쓸모도 없는 짐덩이에게.
“내 예상이 맞다면… 이 대협곡은 칼리크람 산맥인 것 같습니다.”
세렌의 눈을 잠시 바라본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내뱉었다.
“칼리크람이라면….”
세렌의 눈매가 슬며시 좁아졌다.
디아나가 대답 대신 루시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루시아도 궁금한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또 한 번 혀를 찬 디아나가 말을 이었다.
“황금 사막 최남단에서 시작되어, 남동부 중앙을 비스듬하게 가르는 산맥의 이름이죠.”
“아…! 이제야 기억나요. 책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산맥 서쪽은 황금 사막. 동쪽을 붉은 사막이라고 부른다던가요. 그럼….”
비로소 탄성을 흘리며 내뱉은 루시아의 시선이, 좌측으로 펼쳐진 검은 황무지로 돌아갔다.
“저 너머가 본래는 정말… 그 황금 사막이었다는 거겠군요. 아까는 왜 알려 주지 않은 거예요?”
“이안이 넘어가라고 해서.”
“아하….”
이안을 슬쩍 일별한 루시아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여길 쭉 따라가면 너무 먼 길을 돌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결국엔 다르마라자의 권역을 지나가야 할 겁니다.”
일행의 앞을 가로막듯 휘어지며 저 멀리까지 이어진 대협곡을 훑어보며 내뱉은 디아나가, 다시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사막을 가로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죽음의 사막이 아닌 곳으로.”
“고된 여정이 되겠군요….”
고개를 치켜들어 황야를 눈에 담으며, 세렌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사막을 무사히 지난다 해도, 고립된 바다를 우회해야 할테니 말입니다.”
“가장 빠르게 제국의 영토로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디아나가 슬쩍 세렌을 일별하며 덧붙였다.
“누군가 우리를 마중 나오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으니까.”
“…면목이 없군요.”
세렌이 다시 고개를 툭 떨구며 읊조렸다. 자신이 방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라는 것을 비로소 자각한 모양이었다.
-계획은 알겠는데….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던 이안의 뇌리로 나지막한 속삭임이 번진 건 그때였다. 고개를 떨군 세렌이 문득 굳어지는 가운데.
“요그…! 깨어났군요!”
홱 옆을 돌아본 루시아가 탄성을 흘렸다.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의 정수가 시끄럽게 굴어서 말야. 내가 없으니 심심했나 보지, 루시?
속삭이며, 녀석이 이안의 장갑 손목 틈으로 스르륵 기어 나왔다.
이안의 팔을 미끄러지듯 타고 올라가는 검은 뱀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눈이 조금 더 동그래졌다.
“탈피…? 탈피라도 한 거예요?”
-그래…. 나도 깨어나고서야 알았지만 말야.
녀석이 이안의 어깨 위로 고개를 치켜들며 덧붙였다. 물론 여전히 얇고 긴 실뱀이었지만, 어쨌건 손가락에만 겨우 감기던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알겠는데, 뭐?”
이안이 툭 덧붙였다. 이안의 견갑위로 마저 기어 올라오면서, 요그가 덧붙였다.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을 게 너무 뻔해서 말이야. 남몰래 조용히 지나가기엔, 네가 품은 혼돈이 너무 거대해졌잖아?
루시아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굳어졌다. 눈을 깜빡인 녀석이 이내 덧붙였다.
“…어딜 지나가든, 대마족이 우리의 존재를 알게될 거란 말인가요?”
꺼림칙 한 눈빛이 되어 있던 디아나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홱 루시아를 올려다보았다.
루시아가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가운데, 요그가 보랏빛 혀를 날름댔다.
-아마도. 너는 이미 경험이 있지 않아, 친구?
“…….”
이안은 부정하지 못했다. 이나스 커글의 권역에 발을 들였을 때도 놈에게 바로 존재를 들키지 않았던가. 놈의 혼돈까지 흡수한 지금은, 권역 인근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들키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곧바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라. 어차피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의 미간이 조금 더 좁아졌다. 요그의 말투가 아주 즐겁게 느껴져서였다.
탓할 생각은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일행을 이곳에 떨어뜨린 건 이 녀석이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또 남 일처럼 즐기고 있으니, 내심 부아가 치민 것이다.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루시아가 숨을 죽인 채 이안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맙소사….”
문득 나지막한 경악성이 번졌다.
“정말로… 그 뱀이 말하고 있는 거군요….”
세렌이었다. 어느새 다시 고개를 치켜든 그녀는, 반쯤 얼빠진 얼굴로 요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오…?
요그는 물론, 루시아와 이안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눈을 동그랗게 뜬 루시아가 내뱉었다.
“요그의 속삭임이 들리는 거예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