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72
472화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세렌의 눈을 바라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주문쟁이란 말이오.”
“그게 무슨… 성자 대행께서, 뭐라고요…?”
하지만 세렌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분명 제대로 들었으련만, 머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나스 커글 때 확실히 못 봤던 거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훌쩍 시체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차피 여차하면 마법을 사용해야 할 상황이 아니던가. 미리 밝혀두고 속 편하게 쓰는 편이 차라리 덜 귀찮아질 터였다. 히케드에게 알려지게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미 눈치채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백마법사의 혈통이라는 사실까지는 알 수 없을 테니까.
크르릉….
바닥에 배를 깔고 앉아 있던 모로가 다시 주섬주섬 일어서는 가운데, 이안은 디아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디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야나르 타쉬가 뭔가 준비하기 시작한 것 같아. 이안 호프.”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대답하며 멈춰선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겁을 먹은 것 같아서 내심 기대했는데. 역시는 역시군.”
“겁…? 너한테?”
“착각한 게 아니라면, 아마도.”
“흠….”
대마족이 두려워한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듣고서도, 디아나는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낮게 침음하며 가면 아래의 턱을 긁적일 뿐이었다. 상대가 이안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기는 것이리라.
사아아-
모래 언덕을 타고 불어온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갈 찰나, 그녀가 내뱉었다.
“그럼 널 사막에서 쫓아내기 위해 뭔가 꾸미는 걸지도 모르겠네.”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미 다 생각해 뒀겠지?”
옆으로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만 한 게 아니라.”
“…그래. 물론이지.”
디아나가 이안의 뒤편을 흘깃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세렌은 이제야 충격에 빠진 듯 이안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아는 모로의 곁으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 이젠 저런 마물들이 계속 매복하고 있을 테니까.”
이어진 디아나의 말에, 이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갈 거미는 적지 않은 경험치를 줬다. 어쩌면 다른 마물들도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다 상대해가며 사막을 종단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말을 잠시 멈추고 문득 한숨을 내쉰 디아나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 뱀의 마법을 나한테도 새겨 줘.”
이안의 견갑에 축 늘어져 있던 요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호오, 하는 녀석의 탄성이 뇌리로 번지는 가운데 이안이 말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죽을 만큼 싫지만…. 어쩔 수 없잖아.”
꺼림칙한 눈으로 요그를 일별한 디아나가 덧붙였다.
“길잡이는 내 역할이니까. 싸움이 네 역할이듯이.”
왜 안 하던 짓을 하나 했더니….
비로소 이안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됐어.”
“…응?”
“어차피 세렌 경이 이 녀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전달받으면 돼. 미안한 얘기지만….”
디아나의 조금 어리둥절해진 눈을 마주 보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에는 누군 싸우고 누군 안 싸울 상황이 아니니까.”
“아니… 나도… 싸워야 된다고?”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러고 싶지 않으면 길을 잘 안내해.”
덧붙인 이안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요그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팔뚝 위를 미끄러져 기어갔다.
“이 녀석은 이제 네가 달고 다니고. 생각만큼 감지 범위가 엄청나게 넓지는 않으니까, 딱 붙어 다니는 게 도움이 될 거야.”
“아니… 그럼 그냥 세렌에게….”
이안의 손바닥 위에 똬리를 트는 요그를 내려다보며 주절대던 디아나가, 이내 화들짝 뒤로 물러났다.
이안이 손목만 휘둘러 그녀에게 요그를 던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 바닥에 떨어진 요그가, 쉭쉭대는 숨소리를 내며 바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지 마. 기다려. 잠깐만. 이안, 이안…?”
녀석을 돌아보며 다급하게 내뱉은 디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몸을 돌려 모로에게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로의 안장 앞에 올라탄 루시아가 그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이안을 잠시 바라보던 디아나가 불현듯 굳어졌다.
“……!”
소리없이 기어온 요그가 그녀의 발등을 타고 종아리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촉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려는 듯, 그녀의 다리에 몸을 칭칭 감으면서.
“제기랄….”
나지막이 탄식한 디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요그가 보라색 혀를 날름댔다.
-잘 해보자고, 귀쟁아.
물론, 디아나에게는 들리지 않는 속삭임이었다.
***
검은 사막은 평평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사구들이 가득해서, 모래로 이루어진 산맥을 지나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귀쟁이에게 오른쪽으로 가라고 해. 반편아.
일행은 얕은 계곡처럼 이어지는 사구와 사구 사이를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단 한 번도 멈춰서지 않은 채였다.
-농담이야. 거긴 뭔가 있어. 이번에는 왼쪽으로 가야 돼.
요정의 목에 몸을 두르고 있는 검은 뱀의 조언 덕분이었다. 녀석이 때때로 꼬리를 달싹일 때마다, 디아나의 어깨가 움찔댔다.
‘하여간 악취미라니까….’
이안은 묵묵히 뒤따르면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요그가 권력을 만끽하는 모습을 보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어쨌건 덕분에 그들은 모래 바다 속에 모습을 숨긴 포식자들의 습격을 당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물론, 모래 속에 숨은 거대 포식자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이 검은 사막의 실질적인 위협거리들은 그보다는 훨씬 작았다.
-뭔가 기어오니까 처리해. 반편아.
물론 요그는 그런 위험 요소들도 놓치지 않았다.
주로 소리 없이 기어 다니는 작은 강아지만 한 크기의 검은 전갈이나, 모래 위로 귀만 내놓고 헤엄쳐 다니는 사막 쥐 따위였다. 물론 편의상 쥐라 부를 뿐, 톱날 같은 이빨을 가진 아주 징그러운 마수였다.
이번에는 전갈이었다.
콰직-!
소검으로 전갈의 몸통을 찍어버린 세렌이 숙이고 있던 몸을 들었다. 허리띠에 매달아 둔 두 구의 사막 쥐 시체가 달랑댔다.
또다시 전갈 거미 같은 걸 먹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력일 터였다.
‘내가 보기엔 저것도 똑같이 역겹지만….’
이안이 생각할 찰나, 세렌이 바둥대는 전갈을 모로 쪽으로 던졌다.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던 모로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려 전갈을 낚아챘다.
으적- 으적-
모로가 경쾌하게 입을 움직이기 시작한 가운데, 이안과 눈이 마주친 세렌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눈 아래를 가린 천 복면 아래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시죠.”
그녀는 길잡이 호위이자 통역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혼돈력을 다룰 수 없다 해도, 비교적 작은 사막의 마수들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일행의 긴장감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방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시야를 가리는 사구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아아아아-
어느 순간부터 메마른 바람이 쉬지 않고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구 꼭대기마다, 바람에 흩날린 모래들이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곡선을 그리며 일렁댔다.
가뜩이나 좁아진 가시 범위를 더 좁게 만들 뿐만 아니라 호흡까지 방해해서, 이안이 보관함에서 꺼낸 천 옷으로 코와 입을 가리는 복면을 만들어야 했다.
루시아는 그 위에 철가면까지 한 겹 더 덮어쓴 상태였다.
지금 일행 중에서 복면으로 호흡기를 가리지 않은 건 디아나뿐이었다. 그녀의 나무 가면은 바람에 섞인 모래까지도 막아주는 것 같았다.
“…….”
여전히 느껴지는 묘한 조바심을 떨쳐내며,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신기루처럼 넘실대는 검은 그림자들 너머로 적갈색의 하늘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크고 작은 수많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어그러지고 있었다.
‘…목성 표면 같아 보이기도 하고.’
언젠가 보았던 다큐멘터리를 떠올리며, 이안은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야나르 타쉬가 공격이 아닌 방어를 준비하며 만들어 내는 흔적이길 내심 바라는 채였다.
그렇다면 놈의 권역으로 발을 들이지 않고 지나칠 수 있을 테니까.
환영을 보았기 때문인지, 이안은 놈의 권역이 그다지 멀지 않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냥 위로 지나가야 할 것 같은데.
요그의 느긋한 속삭임이 번진 건, 동산처럼 높이 솟은 사구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어느 쪽을 봐도 느낌이 썩 좋지 않아.
세렌이 녀석의 속삭임을 전하자, 디아나가 짧게 혀를 찼다.
그들이 사구를 오르지 않고 돌아간 건, 그게 여러모로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번 모래 언덕은 꽤나 높지 않은가.
“…뭐, 차라리 잘됐네. 올라간 김에 방향을 다시 잡아야겠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언덕으로 발을 들이며, 이내 디아나가 읊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서쪽으로 너무 치우치고 있는 것 같거든. …듣고 있어, 뱀? 우리는 북쪽으로 가야 한다고. 서쪽이 아니라.”
-그건 네 역할이지, 귀쟁아. 무작정 북쪽으로만 갔다면, 넌 이미 웬 놈의 뱃속에 들어가 있었을 거라고.
이어진 요그의 핀잔은, 물론 디아나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세렌은 입꼬리만 묘하게 씰룩대며 묵묵히 디아나의 곁에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시야가 좁네요.”
그 뒤. 이안의 품에 등을 기대앉은 루시아가 읊조렸다.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옆을 돌아보고 있었다. 녀석과 같은 방향을 돌아보며, 이안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점점 세지고 있으니까.”
크고 작은 사구 위로 솟구치는 모래바람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검은 오로라가 사막 위에 드리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마도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리라.
-이런… 이쪽도 아니었던 건가?
요그의 속삭임이 번진 건, 일행이 모래 언덕을 반 이상 올랐을 무렵이었다. 세렌은 물론 이안과 루시아의 시선이 디아나의 목덜미로 향했다. 눈치채지 못한 건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기는 디아나뿐이었다.
-저 앞에서도 뭔가… 썩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데.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의 시선이 언덕 위로 향했다. 반대편에서 불어오고 있는 바람이,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검은 궤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쨌건, 이안에게는 아무런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쿠구구구…
땅을 타고 둔중한 진동이 번진 건 그때였다. 화들짝 어깨를 떤 디아나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는 가운데.
키- 에에에- 키아아아-
넘실대는 바람을 타고, 흐릿한 울부짖음이 이어졌다. 디아나가 반사적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미 다들 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흠… 마물들끼리 싸우는 건가?
요그의 긴장감 없는 속삭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앞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고개를 끄덕인 세렌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눈매를 찌푸리며 이안을 바라본 디아나 역시, 못 이긴 척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신 앞장서지 않고 모로의 옆을 나란히 걷는 채였다.
키에엑- 키아아-
언덕 너머에서 번지는 땅 울림과 포효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직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놈이 비명을 지르고 있으며, 꽤 커다란 놈이리란 사실만은 분명했다.
사아아아-
장막처럼 넘실대며 솟구치는 모래바람이 가까워졌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일행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사이를 지나쳤다.
키에엑- 이에에에-
사구 반대편 능선의 전경이 드러났다. 저 아래에 다리 여섯 달린 거대한 검은 도마뱀이 땅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마에 돋은 여러 개의 뿔에서 원시적인 마력의 파장을 마구 뿜어내는 채였다.
훨씬 크고 역겹게 생기긴 했지만, 사막 바실리스크가 분명했다.
까드득- 까득-
나뒹굴며 발악하는 놈의 몸 곳곳에는, 그보다 훨씬 더 작은 것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새카만 애벌레, 그보다는 구더기에 가까워 보이는 뾰족한 꼬리를 가진 벌레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늑대만 한 크기에, 머리에 크고 작은 날카로운 이빨들이 원을 그리며 돋아 있긴 했지만.
키에엑- 키엑-!
그것들은 모래 속을 헤엄치다 펄쩍펄쩍 뛰어올라 사막 바실리스크의 몸 곳곳에 이빨을 박아넣고 있었다. 놈의 가죽을 뚫고 파고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쿠웅- 쿠우웅-
물론 바실리스크가 발악하듯 뒹굴 때마다 툭툭 떨어져 나가거나 짓눌리긴 했지만. 그저 모래 속으로 파고 들어갈 뿐인 것 같았다.
내장이 터져 널브러진 건 고작해야 두 마리 정도였다.
-호오….
하지만 마물들 간의 전투를 재미있다는 듯 지켜보고 있는 건, 요정의 목에 몸을 두른 검은 뱀뿐이었다.
“…….”
“…….”
언덕 위에 나란히 선 일행들은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파도치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모래의 바다 저 너머를.
“이런… 미친….”
먹구름처럼 넘실대는 어둠의 장막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편의 하늘까지 가릴 정도로 높이 솟아있기까지 했다.
그 불길하게 꿈틀대는 한복판을 홀린 듯 바라보던 루시아가, 이윽고 읊조렸다.
“저건… 설마….”
“…모래 폭풍이야.”
대답한 건 디아나였다. 말하면서 현실감이 되돌아온 듯 가면 너머의 눈을 치켜뜬 그녀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모래 폭풍이 오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