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474
474화
쩍 벌어진 아가리에 이어, 굵고 기다란 검회색 몸통이 일행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이번엔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게 아니야. 나도 바깥 쪽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고.
야나르가 뿜어내는 광풍에 모두가 짓눌리는 가운데, 요그의 속삭임이 뇌리를 스쳤다.
야나르의 머리가 허물어지는 모래 감옥의 반대쪽 벽면까지 뚫어버린 건 거의 동시였다.
카드드드드드-
허리가 앞으로 꺾인 와중에도, 이안은 고개를 돌려 야나르의 몸통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유충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크네.’
놈의 검회색 외피는 껍질이란 단어가 무색할 만큼 두껍고 단단해 보였다. 벌레보다는 거대 뱀장어라 불러야 할 것 같은 형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쿠구…
충격파에 섞인 혼돈에 반응하듯, 혼돈의 정수가 울림을 토해냈다. 물론, 이런 감상에나 빠져있을 때는 아니었다.
-그럼 다들 숨 참으라고.
야나르가 일행의 위를 휩쓸고 지나간 여파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어둠이 자욱하게 휘몰아치며 밀려들기 시작했으니까.
모래 폭풍이었다.
콰과과과과-
전신을 울리는 듯한 굉음과 모래 섞인 광풍이 어지럽게 일행을 덮쳤다.
휘몰아치는 어둠 사이로 금빛에 가까운 연갈색의 안광이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간신히 주문을 완성한 이안이었다.
슈화악-
힘겹게 치켜든 왼손에서, 혼돈 섞인 마력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졌다. 일대를 뒤덮었던 광풍과 새카만 어둠처럼 휘몰아치던 모래가 삽시에 나선을 그리며 밀려났다.
-서두르자고, 친구. 방금 알게 된 건데, 작은 것들이 더 있어.
가지가지 하네, 진짜.
이안은 내심 읊조리며 상반신을 번쩍 치켜들었다.
소용돌이치듯 휘몰아치는 모래 나선 너머, 흐릿한 실루엣들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물론 저게 뭔지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이안이 치켜든 왼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쉬아악- 쩌저저적-
모래의 나선이 삽시에 빨려들듯 주위를 감쌌다. 날아들던 실루엣 하나가 사이를 뚫고 들어온 건 거의 동시였다.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홱 상반신을 뒤로 젖혔다.
쩌저저적- 콰직-
모래 감옥이 단단하게 응축되는 가운데, 이안을 빗겨나간 실루엣이 내벽 구석에 처박혔다. 모래 감옥을 깨뜨리지는 못한 채, 그대로 부딪쳐 튕겨 나왔다.
일행들의 한복판 쪽으로.
“다들 물러나!”
소리친 이안이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아공간에 들어갔던 오른손이 검 자루를 움켜쥔 채 빠져나왔다.
흑검이 아닌 진은 강철 검이었다. 새하얀 검면을 따라 황금빛 진언이 눈부시게 번지는 사이.
“시발…!”
탄식하는 디아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사방으로 나뒹굴듯 흩어졌다. 움직이지 않은 건 모로뿐이었다.
콰직-
녀석은 고개를 홱 휘둘러, 날아드는 실루엣을 이안 쪽으로 쳐냈다. 이안이 샛노란 마력이 번지기 시작한 칼날을 그대로 내리쳤다.
서걱-
단칼에 반 토막이 나며 널브러진 건, 물론 모래 유충이었다.
샛노란 마력의 칼날이 모래 바닥에 깊숙이 박히는 가운데, 그대로 자루를 놔 버린 이안이 유충의 머리 부분을 그대로 짓밟았다.
콰직-!
반 토막이 나고도 여전히 꿈틀대던 유충의 아가리가 완전히 짓이겨졌다. 잘린 단면에서 터져 나온 끈적한 점액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광검의 칼날 근처로 튀었다.
“이런 미친….”
한순간 눈부시게 밝아졌던 장내가 다시 어두워지는 가운데, 디아나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야나르…? 야나르라고?!”
“방금, 방금 그게, 그 야나르라고요?”
감옥 구석까지 굴러갔던 루시아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며 되물었다.
“확실해 보입니다.”
대답한 건 반대편의 세렌이었다. 푸스스, 모래 먼지를 흩뿌리며 몸을 일으킨 그녀가 덧붙였다.
“야나르 타쉬가, 모래 폭풍에 권속을 실어 보낸 모양입니다.”
“뭐… 이게 이동식 간이 권역이라도 된단 건가.”
유충의 꼬리까지 짓밟아 버린 이안이 읊조렸다. 디아나가 튕겨 오르듯 일어선 건 거의 동시였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루시아와 세렌이 모로의 앞쪽으로 모이는 가운데, 그녀가 내벽을 손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아직 저 바깥에 여전히 그 미친 지렁이 새끼가 있다고! 우린 독 안에 든 쥐고. 이번엔 운 좋게 버텼지만, 다음 번엔-”
“아닐지도 모르지. 다들 알 거야.”
말을 자른 이안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신경 바짝 곤두세우고 있어. 어디로 오는지만 알면, 피할 수도 있을 테니까.”
“……!”
멈칫한 디아나의 눈매가 묘하게 일그러지는 가운데.
-안 그래도 노력 중이야 친구.
요그의 속삭임에, 세렌과 루시아의 시선이 이안의 오른손으로 집중됐다.
-방금까진 느껴졌는데, 이제는 멀어지면서 놓쳤어. 큰 놈이니까, 다시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야.
이 상황이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쨌든 녀석의 말투는 평소보다 훨씬 고분고분했다.
그만큼 큰 위기 상황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터였다.
루시아가 곧바로 내뱉었다.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죠. 그러니까, 대비를 해야 돼요.”
“피할 준비 말고, 다른 걸 더?”
녀석의 시선에 이안이 되물었다.
사실 그의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어쨌든 모래 감옥의 내부 공간이 야나르의 덩치보다 크지 않은가.
녀석의 습격 위치를 예상할 수만 있다면, 이리저리 피하며 버텨 볼 만했다.
그의 예상대로 이 모래 폭풍이 이동식 권역이라면,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만 버티면 되리라.
‘그 뒤에도 덤비면, 그땐 그냥 싸우면 되고.’
이안이 결론을 곱씹을 찰나,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보관함을 꺼내 주세요. 모로에게 우리 몸을 다 묶자고요. 그럼 누군가 튕겨 나가거나 폭풍에 휘말리더라도 낙오될 일은 없잖아요.”
“…그러다 누군가 잡아먹히기라도 하면, 다 같이 먹힐 것 같은데.”
심드렁하게 내뱉는 와중에도, 이안이 오른손을 아공간에 넣어 보관함을 꺼내 놓았다. 곧바로 뚜껑을 열면서, 루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요. 그 전에 줄이 먼저 끊어질 텐데요. 게다가 그런 상황이면, 굳이 줄이 없더라도 다 같이 놈의 뱃속으로 들어갈 거예요.”
“하긴… 그건 또 그렇겠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보관함에서 밧줄 뭉치를 꺼낸 루시아가 세렌 쪽으로 휙 던졌다.
“엉킨 부분을 풀자고요. 중간을 한 번 자르기도 해야겠고요.”
“…예. 알겠습니다.”
자신의 몸을 칭칭 묶었던 그 줄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세렌이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보관함의 뚜껑을 닫은 루시아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얼른 다시 넣어 주세요. 혹시라도 잃어버리면 큰일이잖아요.”
“그래. 미리 말하지만, 나는 안 묶을 거야.”
이안이 보관함의 한쪽 손잡이를 잡으며 대답했다. 곧바로 몸을 돌려 세렌의 곁으로 다가가면서, 루시아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안 님이 묶으실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한 적도 없어요.”
하긴. 이젠 날 너무 잘 알지.
피식 웃으며 보관함을 아공간에 넣은 이안이, 땅에 비스듬하게 박힌 진은 강철 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요그의 속삭임을 기다리며 그가 진은 강철 검을 뽑아드는 사이.
“나도… 그 주문을 새겨 줘. 이안.”
갈등하는 눈빛으로 서 있던 디아나가 불쑥 내뱉었다.
-호오…?
세렌과 함께 엉킨 밧줄을 풀고 있던 루시아가 힐끔 돌아보는 가운데. 이안이 검을 쥔 오른손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 녀석의 주문?”
“그래. 그 뱀….”
짧게 한숨 쉰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그 녀석의 경고를 늦게 들을 수는 없잖아.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
참 한결 같은 녀석이라니까. 옅은 실소를 흘리면서도,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잘 생각했어, 친구.
기다렸다는 듯한 속삭임과 함께, 손목 안쪽에서 따끔한 감촉이 번졌다. 동시에 연기로 변한 요그가 디아나에게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
디아나가 냉큼 왼손을 내밀었다.
위급한 상황이어서인지, 평소처럼 꺼림칙 하긴커녕 오히려 다급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샤아아-
연기가 그녀의 장갑 사이로 스며들고, 손바닥 부분이 불룩하게 솟아 올랐다.
-따끔할 거야, 귀쟁아.
디아나에게는 들리지 않을 속삭임과 함께, 가면 너머 디아나의 눈매가 꿈틀댔다.
응집되는 어두운 주문과 내면에 번지는 묘한 공명을 느끼면서도, 이안은 모로 쪽으로 다가갔다.
“팔목에 묶는 게 좋겠죠?”
“예. 한쪽이면 충분할 것 같군요.”
모로의 양쪽에는 토막 낸 밧줄을 쥔 루시아와 디아나가 서 있었다. 안장 좌우에 줄을 걸어 고정시키는 채였다.
다소 짧은 줄은 세렌이 혼자 사용하고, 긴 줄은 루시아와 디아나가 양쪽 끝에 각각 팔목을 묶으려는 것 같았다.
움켜쥔 왼팔을 늘어뜨리며, 이안이 모로의 곁에 멈춰섰다.
크르릉….
이안의 시선을 느낀 듯, 녀석이 슬며시 콧김을 뿜었다. 이안이 검을 쥔 오른손을 녀석의 머리로 가져다 댔다. 뒤이어 한줌의 혼돈력을 흘려 넣으며, 그가 덧붙였다.
“잘 피해. 셋을 잘 지키고.”
모로가 대답하듯 다시 한번 그르렁댔다. 녀석의 눈과 갈기, 마갑 사이에서 번지는 보랏빛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드디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네, 귀쟁아.
그사이 주문을 모두 새긴 듯, 요그가 속삭였다.
“…….”
디아나가 새삼스럽게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연기로 변한 요그가 다시 이안의 손목으로 되돌아오며 덧붙였다.
-그럼 이제 빨리들 준비해. 그 지렁이가 다시 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
“……!”
“디아나, 받아요!”
디아나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밧줄의 한쪽 끝을 왼쪽 팔목에 묶은 루시아가, 반대쪽을 힘껏 던졌다.
냉큼 받아든 디아나가 왼손 손목에 밧줄을 두르는 사이, 이안이 내뱉었다.
“어느 쪽에서 오고 있는데?”
-지금 네가 보는 쪽이야, 친구.
비로소 앞의 내벽을 바라본 이안이, 옆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다들 저쪽으로 붙어.”
속삭임이 번진 순간부터 벌떡 일어서 있던 모로가,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왼팔에 줄을 묶은 세렌과 루시아가 그 뒤를 따르고, 디아나가 초조하게 밧줄의 매듭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
이안은 자세를 낮춘 채 모래 감옥의 내벽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일렁이던 마력이 한순간 흩어졌다가, 다시 흐릿하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야나르와 충돌하면 무너질 테니, 주문을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 다음 주문을 준비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쿠구… 쿠구…
혼돈의 정수가 불현듯 공명한 건 그때였다. 조금 더 많은 양의 혼돈이 몸속으로 번지면서, 이안의 감각이 한 꺼풀 벗은 것처럼 선명해졌다.
“……!”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혼돈의 기척이 느껴졌다. 야나르가 분명했다.
-온다.
확인시켜주듯 번진 속삭임에, 일행 모두가 바짝 긴장한 눈으로 자세를 낮췄다.
콰드드드득-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 외벽을 단숨에 박살내며, 야나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의 반대편으로 몸을 날리면서도, 이안은 밀려드는 놈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흩날리는 모래 감옥의 파편들과 지옥의 입구처럼 뻥 뚫린 아가리.
그 주위로 종유석처럼 튀어나온 이빨들과 그 뒤편으로 이어진 적갈색 홑눈들. 마찬가지로 적갈색을 머금고 일렁이는 검회색 몸통.
…혼돈?
-이런. 다들 숙이라고.
요그의 속삭임이 번지는 가운데, 야나르의 전신에서 혼돈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쩌어엉-!
단순한 충격파에 불과했지만 모래 감옥을 단숨에 부숴 버리기에도. 그리고 이안과 일행들을 그 너머로 날려 버리기에도 충분했다.
‘시발…!’
준비하고 있던 주문이 산산이 흩어지고, 삽시에 휘몰아치는 어둠이 이안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우박이 어지럽게 쏟아지는 폭풍 한복판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
콰- 과과과과과-
전신을 울리는 굉음 속에서도, 이안을 숨을 내쉬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다. 진은 강철검을 놓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물론, 그의 의식은 여전히 아주 또렷했다.
‘…이걸 어쩐다.’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감각 속에서도, 이안은 내심 혀를 찼다.
그는 아직 충격의 여파조차 제대로 떨쳐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게 아니라도, 이 모래 폭풍 한복판에서 주문을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성공시켜야 했다. 지금 그가 그렇듯, 모래 폭풍 속으로 내던져진 일행들을 살리고 싶다면.
쿠구- 쿠구- 쿠구-
혼돈의 정수가 토해내는 울림이 볼륨을 높인 것처럼 선명해진 건 그때였다. 이안은 몸속으로 물밀 듯이 밀려드는 혼돈을 느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감각이었다.
-호오…? 잠깐만.
동시에 요그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달은 상황에서도, 녀석의 속삭임은 평소와 다름없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었다. 어쩌면 사역마인 녀석의 인지 능력 역시, 이안에 발맞춰 가속화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뭔가 새로운 걸 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이를테면, 네 혼돈을 속인다던가 말야.
녀석의 속삭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안은 전신을 훑는 충격과 폭풍의 압력이 순식간에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콰당- 탕-
동시에 등과 뒤통수에 땅의 감촉이 느껴졌다. 부딪쳐 튕겨 오르면서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한층 가벼워진 듯한 느낌. 숨을 들이쉰 이안은, 곧 이 모래 폭풍 속에서도 전혀 고통스럽지 않게 숨을 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동시에 시야가 삽시에 밝아졌다. 별을 흩뿌린 것처럼 무수히 많은 적갈색의 궤적이 어지럽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상태였다.
‘혼돈의 시야…?’
하지만 이안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적외선 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듯한 이 감각을, 오래 전에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혈액처럼 몸속을 돌고 있는 혼돈력이 만들어낸 현상이리라.
이제는 변이되지 않고도 혼돈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카가가가가-
몸을 휘돌린 이안이, 모래 위로 미끄러지듯 착지했다.
뒤로 주르륵 밀려나면서도, 이안은 주위의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자신을 따라오는 보랏빛 궤적. 모래 폭풍에 어지럽게 뒤섞인 야나르 타쉬의 혼돈.
콰과과과과-
그리고 저 앞, 수면 아래로 뛰어들듯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크고 기다란 적갈색 실루엣은, 야나르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작은, 땅속 곳곳에 꿈틀대는 또 다른 적갈색들.
하지만 이안은 피라냐 떼처럼 꿈틀대며 다가오는 그것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
그의 의식은 그 너머로 쏠려 있었다. 모로가 분명한 보랏빛 실루엣. 횃불처럼 주황색으로 밝게 빛나는 루시아의 실루엣. 그리고 그 반대편, 남색과 보라색이 뒤엉킨 실루엣은 아마도 세렌이리라.
그녀의 주위로 스멀스멀 흩어지는 보랏빛이 선명했다.
‘…내 혼돈이 빠져나가고 있긴 한 거네.’
생각하며 완전히 멈춰선 이안이 다시 무릎을 굽히는 사이.
-어때, 친구? 네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 내가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느긋한 요그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다음 기회에.’
지금은 내 힘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으니까. 속으로만 내뱉으며, 이안이 힘껏 땅을 박찼다.
타타탓-
휘몰아치는 돌풍 속에서도, 그는 전혀 휘청대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느리게 흐르는 냇물을 거슬러 달려가는 듯한 감각.
보랏빛 궤적을 잔상처럼 남기며, 이안은 일행들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물론, 꿈틀대는 적갈색의 작은 것들도 삽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푸확-!
유충이 분명한 선두의 실루엣들이 쏜살같이 튀어 올랐다. 검 자루를 움켜쥔 이안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간 건 거의 동시였다.
솨아아-
모래 폭풍의 자욱한 어둠을 밀어내며, 샛노란 마력의 칼날이 눈부시게 치솟았다.